진실을 밝히겠다는 사람이 거짓 문서를 보내왔다.
2027년 5월 2일 일요일 오전, 이다원에게 ‘수거함 책임 정정에 협조하라’는 제목의 메일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경찰의 문서관리 담당자로 표시돼 있었다. 첨부 문서에는 이다원이 2026년 11월 2일 밤 공동 수거함에서 02-A를 직접 꺼냈다고 쓰여 있었다. 서명란에는 이미 그의 이름이 인쇄돼 있었다.
이다원은 서명하지 않았다. 오선영에게 바로 전화했다.
“그날 저는 수거함에 손댄 적이 없어요. 그 전에 퇴근했습니다. 이번에는 제 이름까지 가져가려고 해요.”
나는 통화 내용을 전해 듣고 한 가지가 먼저 떠올랐다. 익명 발신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경고를 매번 새롭게 꾸미고 있었다. 정민규, 권다정, 박혜림, 이제 이다원. 범행의 규모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각 사람에게 필요한 걱정을 정확하게 골라 압박한다는 점이었다.
경찰은 문서가 공식 발송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명칸의 이름은 과거 공동 수거표에서 복사한 것이었다. 메일에 연결된 회신 주소도 공식 주소와 한 글자가 달랐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한유리가 물었다.
“아직 찾고 있죠. 하지만 이번엔 문서를 받은 사람이 서명하기 전에 확인했습니다.”
“전에는 속았을 사람들이 이제는 안 속는군요.”
“상대가 사람을 바보로만 생각하면 그런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오전 열한 시, 이다원은 경찰에 자신이 보관한 옛 업무노트를 제출했다. 2026년 11월 2일 공동 수거함의 현물 대조가 다음 날로 미뤄졌다는 메모가 있었다. 누군가 ‘완료’ 버튼을 누른 기록과 실제 담당자가 봉투를 확인한 기록은 분리돼 있었다. 일부 봉투에는 이름이 아닌 작업번호만 붙었으며, 비슷한 번호들이 한 묶음으로 쌓였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럼 02-A를 직접 받은 사람은 없었다는 뜻입니까?”
“그날 밤 본인이 확인한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시간의 실제 수령자는 더 찾아야 합니다.”
나는 그 경계를 지켰다. 부재의 증거와 발생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다르다.
점심에는 최명환이 오선영에게 보낸 공식 답변 일부가 전달됐다. 그는 2025년 월말 선처리 지시를 자신이 직접 작성한 사실은 없으며, 정산관리실 공동 계정은 여러 팀장이 함께 사용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지침을 결재 업무에서 참고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럼 본인이 승인한 건가요?” 한유리가 물었다.
“지침을 참고한 사실과 구체적인 항목을 승인한 것은 다릅니다. 후속 자료가 필요합니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이 사건은 왜 항상 한 발짝씩만 나가요?”
“서둘러 두 발짝 갔다가 다시 열 발짝 돌아오는 일을 겪었으니까요.”
오후 두 시, 한유리가 미리 작성해둔 원고를 내게 보여줬다. 제목은 ‘익명 살인 예고를 만든 회사의 비밀’. 본문에는 02-C가 반응 예상표라는 설명과, 그 자료가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였는지에 관한 여러 가능성이 적혀 있었다.
“출판해도 됩니까?”
“사실로 확인된 부분과 추정은 나눠 쓰세요. 또 원본 파일 주소를 그대로 올리면 누군가 다시 유사 파일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제목을 바꿨다. ‘살인을 예고한 문서, 실제로 확인된 것은 어디까지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기사 제목 하나 때문에 직장을 잃는 사건을 너무 많이 보았다. 우리가 만드는 문장이 그 사슬에 또 걸려서는 안 됐다.
오후 세 시에는 문서를 받은 외부 기관에서 실제 회신이 왔다. 그 기관의 계약 담당자는 이다원의 서명이 들어간 가짜 정정서를 사실로 믿고 거래 제한 검토를 시작했다고 인정했다. 다행히 이다원이 공식 확인을 요청하면서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담당자는 '경찰 명의가 적혀 있어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믿을 만한 이름이 보인다는 이유로 사람의 권리와 거래를 멈추는 절차가 너무 쉽게 열렸다. 이다원이 가짜 문서를 받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으로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도 모른 채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이다원은 피해 기관의 직원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제가 동의했는지 확인하는 전화 한 통만 먼저 해주실 수 없었나요?”
상대는 처음에는 보안 절차상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부 검토 결과 본인 확인을 위한 별도 창구가 존재했고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직원의 나태함인지 업무량 탓인지 조사해야 했지만, 적어도 확인 절차가 생략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 그 직원도 범인한테 이용된 거네요.” 한유리가 말했다.
“이용됐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해당 업무에서 요구된 확인을 왜 하지 않았는지 따로 물어야 합니다.”
이다원은 거래 제한이 보류됐다는 공식 답변을 받아 자기 수첩에 넣었다. 그는 과거 수거함 인수인계가 부실했던 날의 자기 책임도 조사받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자기 행동의 빈칸을 먼저 채우겠다는 뜻이었다.
오후 네 시, 오선영은 이다원의 가짜 정정 문서가 배포된 경로 가운데 하나를 확인했다. 예전 허위 방문예약과 비슷한 외부 문서 발급 서비스가 사용됐다. 생성 방식이 비슷하다고 해서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없지만, 해당 서비스를 통해 발송된 기록과 계정 관리자의 협조를 확보할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럼 드디어 발신자를 찾을 수 있겠네요.”
“서비스 계정을 등록한 이름과 실제 사용자는 다를 수 있어. 그래도 이번에는 결제와 접속 기록이 남아.”
나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상대가 치러야 할 비용이 생겼다고 느꼈다. 그동안 상대는 작은 실수 하나를 찾아 정보로 돈을 벌거나 사람을 조종했다. 그러나 여러 기관에서 원본을 보존하고 서로 다른 경로를 대조하기 시작하자, 익명이라는 보호막이 조금씩 얇아졌다.
정민규는 이다원에게 공식적으로 정정 통지서를 전달하면서 문서 제목을 굳이 ‘무혐의 확정’이라고 쓰지 않았다. 그날 확인된 사실은 그가 해당 서명을 하지 않았고, 수거함에서 02-A를 꺼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과거 인수인계의 부실함에 대한 조사까지 끝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다원도 그 차이를 인정했다.
“제가 잘못했던 기록은 남겨도 돼요. 하지만 없는 서명을 했다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그 문장을 수첩에 옮겼다. 오래된 실수를 고치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잘못을 전부 지워주겠다는 약속과 잘못을 전부 덮어씌우려는 협박 사이에 실제 사실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날 밤 8시 40분, 이다원은 내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제가 직접 확인한 것만 적었습니다. 예전에 진작 그랬어야 했어요.’
나는 답했다. ‘늦었다고 해서 소용없는 건 아닙니다.’
잠시 뒤 또 메시지가 왔다. 이번에는 그를 사칭한 계정이 보낸 것이었다.
‘02-A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왜 이렇게 두려워합니까?’
이다원은 그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았다. 대신 보존한 원문을 경찰에 제출했다. 상대가 예상했던 감정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메모에 그 사실을 남겼다. 악역이 사람의 실수를 이용할 수 있다면, 사람의 학습도 악역에게는 예상 밖의 변수가 된다.
그러나 오후 아홉 시가 넘자 선영에게서 긴급 연락이 왔다. 가짜 정정 문서의 결제 기록에 남은 번호가 회사의 경고 하향 사건과 관련된 옛 외주 계약번호와 이어진다는 것이다.
“같은 사람입니까?”
“아직은 같은 계약 관리 경로라는 것뿐이야. 그런데 이 번호는 원래 2025년에 해지됐어야 해.”
나는 종이 위에 새로운 문장을 썼다. ‘계정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계정을 해지하지 않은 건 게으름일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이용한 사람은 따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계약번호가 실제 사람에게 이어진다면, 우리는 비로소 화면 밖의 손을 찾을 수 있었다.
제18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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