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사본에는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
2027년 4월 27일 화요일 아침, 나는 그 사실을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상대가 ‘세 번째 사람’을 언급한 뒤부터 우리 모두는 빈칸에 사람 얼굴을 넣고 싶어 했다. 하지만 출력업체가 보존한 02-C의 수신자 표시는 ‘대조 전용’이었다.
“그러면 최초 수신자가 아니라 시험용이군요.” 내가 말했다.
오선영이 바로 고쳤다. “수신자 표시는 대조 전용이야. 시험용인지, 실제로 누군가가 확인한 건지는 접속기록을 봐야 해.”
2026년 11월 2일 밤의 작업대장은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02-A는 외부 공동 접수 대기열에 등록됐고, 02-B는 개별 전송용 작업으로 분류됐으며, 02-C는 두 판본의 내용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비교 파일이었다. 작업자의 설명에 따르면 전송용과 대조용 파일은 같은 버튼으로 만들어도 다른 경로로 보관될 수 있었다.
나는 표를 세로로 접었다. 02-A 옆에는 배정우라는 이름이 있었고, 02-B 옆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02-C 옆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대신 ‘기준 원고 참조’라는 메모가 보였다.
“기준 원고가 뭡니까?”
백이준이 답했다. “출력 전에 문구를 확인하는 원본 파일을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내용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아직 정식 비교 중이고요.”
기준 원고.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쫓는 사건기록의 공통 조상을 떠올렸다. 같은 사건을 두 사람에게 다르게 보이도록 편집하려면 두 판본을 대조할 기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설계서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가짜 문서를 만드는 사람 역시 오탈자를 확인하기 위한 원본은 필요하다.
오전 열 시, 한유리가 자신이 받아온 익명 파일과 출력업체 원본의 화면 구성을 비교했다. 익명 파일에는 02-C의 행이 삭제돼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표 오른쪽 끝이 잘린 상태였다. 그 이유가 누군가의 의도인지 화면 크기 때문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가 02-A와 02-B만 놓고 다툴 때, 상대는 02-C를 알고 있었던 걸까요?” 그녀가 물었다.
“알았을 가능성이 있죠. 그런데 그 파일을 누가 잘랐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메일을 보낸 사람이요.”
“메일을 보낸 사람이 편집한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어요. 누군가는 이미 잘린 이미지를 받아 다시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끝내 사람이 안 나오네요.”
“사람이 나오도록 기록을 읽으면 잘못된 사람이 나옵니다.”
점심 전 경찰이 확보한 출력업체의 보관시간표에는 새로운 항목이 있었다. 02-C의 원본 파일은 2026년 11월 2일 오후 8시 31분에 최초 임시 저장됐고, 이후 밤 9시대에 수정 이력이 있었다. 최초 메일이 내게 도착한 밤 10시 16분보다 빠른 시각이었다.
“그럼 누군가 미래를 알았습니까?” 한유리가 물었다.
“적어도 문서를 먼저 만든 다음 나중에 보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서버와 작업자 단말의 시간이 일치했는지 검증은 남아 있었다. 정민규는 화면 표시만 보고 ‘두 시간 전 생성’이라고 보고하려다 멈췄다. 이번에는 서버시각 동기화 기록과 별도의 결제 처리 시각을 함께 확인한 뒤 판단하겠다고 했다.
“제가 옛날 같았으면 아까 바로 발표했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이제는 아닙니까?”
“지난번에 정정 공문을 보내느라 세 군데가 더 손해를 봤습니다. 누가 내 결론을 듣고 움직이는지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웃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자기 실수를 장식품처럼 내세우지 않는 점이 좋았다.
나는 비교 파일의 구조를 좀 더 자세히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02-C의 표에는 수신자 이름 외에도 '반응 확인 시점'이라는 열이 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런 실제 시각이 기록돼 있지 않았다. 단지 '회신 없음', '전화 연결', '현장 확인' 같은 선택지가 있었다. 이는 실제 행동이 일어난 기록이라기보다 앞으로 수집할 결과를 분류하는 틀에 가까웠다.
“그럼 아직 아무 결과도 없었던 때 만든 파일일 수 있겠군요.”
백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볼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값을 입력했고 언제 수정됐는지 로그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첫 사건기록에 있는 내 통화시각을 다시 봤다. 22시 27분, 22시 38분. 02-C의 최초 저장본에는 그 숫자가 없었다. 만약 나중의 수정본에서 그 값이 생긴 것이라면, 상대가 미래를 본 것이 아니라 사건을 관찰한 뒤 오래된 표에 정답을 써넣었을 수 있다. 그것을 확인하면 살인을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과 별개로, 예언이라는 포장이 벗겨진다.
오선영은 서두르지 않았다. “편집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편집했다는 증거는 아니야. 실제 버전별 값을 찾아.”
나는 옳은 말을 듣고도 마음이 급해졌다. 우리가 이 한 문장에 속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의심했던가. 그러나 바로 그 조급함 때문에 없는 수정 이력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오후 한 시, 선영에게 다른 문제가 생겼다. 누군가 익명 게시판에 ‘02-C 최초 작성자’라며 김주하의 얼굴이 나온 사원증 사진을 올렸다. 출력업체 출입기록에 그녀의 이름이 없었는데도 게시자는 그녀가 2025년 출력 고장을 숨겼다는 사실과 2026년 사건기록 생성 사실을 붙여 썼다.
“같은 출력이라는 말 때문에요?” 한유리가 물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해의 다른 출력기를 한 이야기로 연결했어요.”
김주하는 전화기 너머에서 한참 말이 없었다. 계약 갱신 심사가 늦어진 지 오래였고, 이번 게시물로 다른 회사 지원도 난처해졌다고 했다. 나는 문서 작업의 연도와 업체가 다르다는 확인 자료를 정리해 담당 창구로 보냈다. 김주하의 옛 실수는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 않은 일을 그녀에게 더하는 것도 안 된다.
오후 네 시, 오선영이 내게 02-C의 목차 일부를 읽어주었다. 주제는 ‘수신자별 문구 차이’. 첫 번째 비교 항목은 피해자 이름이 아니라 연락 순서였다. 02-A에는 ‘담당자 확인 뒤 회신’이라는 문장이, 02-B에는 ‘즉시 확인 요청’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나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것이 진짜 원문이라면 상대는 우리가 어떤 인물인지에 따라 다른 행동을 유도했을 수 있다. 배정우에게는 기다리라고 하고, 나에게는 움직이라고 한다. 그 차이는 우연한 문장 수정이 아닐 수 있었다.
“아직 두 판본이 실제로 발송됐다는 뜻은 아니지?” 선영이 먼저 물었다.
“그렇습니다. 문장을 만들어놓은 것과 전달한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네가 움직인 건 네 판단이야. 누군가 네 선택을 예상했다고 해서 네 의지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나는 잠시 침묵했다. 메일을 처음 받던 날 내가 경찰에 전화한 것은 옳았다. 협박당할 수 있는 사람을 보호해야 했으니까. 상대가 그 선택을 예상한 것이 문제이지, 그 선택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다.
저녁에 한유리가 기사 제목을 바꿨다. 처음 쓴 ‘세 번째 수신자의 정체’ 대신 ‘세 번째 사본에는 이름이 없었다’였다. 조회수는 낮을지 몰라도 읽은 사람이 누군가를 범인으로 단정할 가능성도 낮아질 것이다.
밤 열한 시, 백이준이 연락했다. 02-C 최초 저장 파일에는 배정우와 나의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열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반응 확인’**이었다. 사건기록의 내용을 실제로 예측하려는 파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특정한 문장을 전달하면 어떤 응답이 돌아오는지 확인하려는 문서일 가능성이 있었다.
“반응을 어떻게 확인합니까?” 내가 물었다.
“그건 지금 찾고 있습니다. 실제 전송기록이 있어야 하니까요.”
통화가 끊긴 뒤 나는 처음 배정우와 임소율에게 했던 연락을 다시 떠올렸다. 상대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으킬 반응을 기록하는 사람일 수 있었다.
그때 이메일이 도착했다.
‘이제 이해했나요? 여러분이 확인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말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사후에 그럴듯한 철학을 붙였다고 해서 그의 설명이 진실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누가, 어떻게, 누구에게 실제로 보냈는지를 찾아야 했다.
제18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