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년 4월 23일 금요일. 잘린 마지막 일 초를 듣고 나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오선영이 공식 분석을 마친 범위에서 들려준 짧은 음성은 어떤 충격적인 자백도 아니었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딸깍거림. 그게 전부였다. 동영상 교육자료에 없는 구간이라는 것은 확인됐지만 실제로 누가, 언제, 어디서 녹음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일 초만으로 장소를 알아낼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특정 장비음일 가능성을 검토할 수는 있지. 하지만 여기선 배경 소음이 많아. 단정 못 해.”
“상대는 우리가 이걸 맞혀보라고 했습니다.”
“상대가 시험지를 낸다고 우리가 답안지를 만들어줄 이유는 없어.”
나는 웃었다. 수사는 상대의 퀴즈를 푸는 일이 아니라 사실을 찾는 일이었다.
그날 오전에는 더 중요한 소식이 들어왔다. 2026년 11월 3일 오전 8시 12분 공동함 반환 문의의 ‘외부 발송 제한’ 코드가 백업 자료에서도 확인됐다는 것이다. 시스템 교체 표시 오류 가능성을 검토한 결과, 해당 항목만큼은 실제로 발송 제한 표시가 붙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 누군가 막았다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자동 규칙으로 걸렸을 수도 있어. 수동 변경이 있었다는 로그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어.”
“왜 제한됐는지는요?”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만족됐다는 기록이 있어. 수신자 지정이 불완전했고, 원문 출처 검증이 완료되지 않았대.”
나는 종이에 두 문장을 적었다. 수신자 불완전. 원문 출처 미확인. 살인을 예고하는 문서에 정확히 필요한 문제가 아니던가. 누군가 이미 위험한 문서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흔한 문서 보관 오류일까.
“검토 사본이 제가 받은 PDF와 같은지 확인됐습니까?”
“아직. 일부 분류값은 같지만 원본 식별값이 남아 있는지 더 봐야 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앞서 170화에서 찾아낸 02-B 계열이라는 분류만으로 동일한 문서라고 말하면 또 같은 실수를 할 것이다.
오후 한 시, 회사 담당자는 두 종류의 자료를 가져왔다. 하나는 공동함 처리 프로그램의 원본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익명 발신자가 보낸 붉은 화살표가 붙은 자료였다. 원본에는 특정 수신자 이름이 없었다. 익명 자료에는 '배정우'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표시돼 있었다.
“이 사람이 왜 배정우를 넣었을까요?” 한유리가 물었다.
“사람들이 이미 배정우를 범인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름이 들어가면 설명하기 쉬워지죠.”
“서진혁을 넣어도 됐을 텐데요.”
“그랬으면 내가 먼저 의심받았겠죠. 이 자료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효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수신자에게 다른 문서를 보낸 익명 발신자의 습관을 떠올렸다. 02-A와 02-B, 같은 숫자와 다른 사람. 누군가는 수신자의 시선에 맞춰 문장을 바꾸고 있었다.
오후 두 시, 임소율이 회사 재심사 결과의 일부를 알려줬다. 개인에게 귀속됐던 비용 중 몇 항목은 자료 부족을 이유로 회사 부담으로 되돌리는 재검토가 시작됐다고 했다. 아직 확정된 금액은 없었지만, 적어도 개인 책임으로 일괄 분류됐던 상태가 멈췄다.
그녀는 물었다. “배정우 씨도 그때 이런 처리를 막으려고 했을까요?”
“2025년 메시지를 보면 완료라고 답하지 말라는 취지의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책임감을 갖고 행동했는지는 더 확인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도우려다 죽은 거라면요?”
“그 가능성을 생각할 수는 있어도 지금은 증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임소율은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녀에게 확신 하나를 팔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불확실함이 위로보다 더 잔인할 수 있다. 그래도 내가 없는 답을 만드는 건 또 다른 상처다.
늦은 오후, 정민규가 발신 경로와 문서 처리 로그의 시간 기준을 정리한 표를 보내줬다. 익명 메일의 21시 16분 표시가 서버 수신 시각인지, 사설 연락망의 단말 표시인지, 다른 시스템의 재전송 시각인지 각각 따져보는 표였다. 결론은 간단하지 않았다. 시각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경로가 여럿 있었으나, 실제 어느 경로가 쓰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예언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온 겁니까?” 한유리가 물었다.
“예언을 주장할 이유가 약해지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범인이 시간을 미리 알았는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서 조사관님은 언제부터 이런 대답만 하세요?”
“사람을 한번 잘못 의심한 뒤부터요.”
우리는 잠깐 웃었다.
오후 여섯 시에는 오선영이 이메일 전송 경로의 한 부분을 더 설명했다. 최초 메일의 제목과 수정본 제목을 비교해 달라는 요청에, 서버에서는 특정 문자열이 같은 시점에 일괄 생성된 기록이 보인다고 했다. 다만 작성된 시점과 실제 전송된 시점은 다를 수 있었다.
“그러면 누군가 사건 전날 모든 수정본을 만들어놓았을 수도 있겠네요.”
“가능성이지. 반드시 그랬다는 증거는 아냐. 내용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예약 전송과 자동 재발송이 섞였을 수도 있어.”
나는 한때 메일 수신 시각을 범인의 능력처럼 받아들였다. 지금은 시계가 몇 개인지부터 확인하는 처지가 됐다. 사설 연락망의 표시 시각, 메일 서버의 수신 시각, 문서 생성 시각, 사람이 실제로 본 시각. 그중 어느 하나를 지운 채 나머지로 사건을 설명하면 다시 틀릴 것이다.
한유리는 내 시간표를 보더니 말했다. “이렇게 복잡한 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짧게 줄이되 의미를 바꾸지 않으면 됩니다. ‘예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문장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어요.”
그녀는 웃지 않았다. 조회수가 떨어질 거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사건을 더 정확히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의미가 있었다.
나는 그날 ‘앞섰다’는 단어를 모두 다시 검토했다. 공식 보고보다 앞섰다는 이유로 누군가 사망을 미리 알았다고 쓸 수는 없다. 사망 소식을 처음 본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저녁 여덟 시,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연락했다. 2025년 8월 25일 경고 하향 작업과 관련된 윤세한이었다. 그동안 공용계정 완료 처리 기록에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자신이 자동으로 작업자로 지목되는 것이 힘들었다고 했다.
“제가 말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계속 제 이름을 쓰겠죠.”
“공식 조사를 받으셨습니까?”
“받고 있어요. 그런데 서 조사관님께도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어요.”
나는 그에게 직접 진술을 받아 적지 않겠다고 했다. 수사팀에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편이 먼저였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날 T-07 앞에 앉은 적은 있습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언제입니까?”
“아침. 종이 걸림이 나기 전이요. 그리고 나중에도 누군가가 불러서 다시 갔습니다.”
“누가 불렀습니까?”
“그건 확인하고 진술할게요. 오래전 일이라 제 기억만으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오선영에게 통화 사실을 알렸다. 어떤 질문을 했고, 어떤 대답을 들었는지 사실대로 기록했다. 윤세한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제 단말 앞에 있던 사람과 경고를 낮춘 사람이 같은지 따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밤에 익명 발신자는 새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나는 메일함을 닫고 수첩을 펼쳤다. ‘T-07 앞에 있었다’와 ‘09시 43분 08초 실행했다’를 다른 줄에 적었다. 이제야 사건이 누군가의 이름을 갖기 시작했지만, 그 이름에 모든 죄를 먼저 넣고 싶지는 않았다.
내일 윤세한은 자기 손으로 무엇을 했는지 말하게 될 것이다. 그가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독립된 기록이 있어야 했다.
제17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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