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토 후 배포하십시오.’
그 문장은 죽은 사람이 남긴 유언이 아니었다.
2027년 4월 22일 목요일 오전, 오선영은 2025년 구형 업무 교육영상에서 음성 파일과 매우 유사한 안내 문장을 확인했다고 알려주었다. 기술 검토는 계속 중이었지만, 영상에 나온 남성의 목소리와 익명 파일 속 목소리의 억양과 숨소리가 같은 구간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장 뒤의 신호음이었다. 구형 프로그램의 교육영상에서 경고창을 닫을 때 나는 효과음과 닮아 있었다.
“그럼 배정우 유언이라는 건 거짓말이었군요.” 내가 말했다.
“유언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없어. 다만 아직 공식 감정 결론을 기다려야 해.”
“그 영상을 볼 수 있습니까?”
“공개된 교육용 사본은 회사가 제공했어. 원본과 비교한 결과를 나중에 공유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익명 발신자는 열일곱 초짜리 파일 하나로 우리를 2026년 11월 3일 밤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러나 소리는 2025년의 교육자료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었다. 날짜를 파일명에 넣으면 사람들은 그 날짜를 기억한다. 파일 안에서 다른 날짜가 말해지지 않아도.
한유리가 사무실에 들어와 말했다. “그럼 이 사람은 우릴 속이려고 교육자료를 자른 거네요.”
“그렇게 볼 이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파일을 만든 사람과 그걸 익명으로 유포한 사람이 같은지는 따로 봐야 합니다.”
“왜요? 누가 만들었든 거짓으로 유언이라고 올렸잖아요.”
“유언이라고 올린 사람은 책임을 져야겠죠. 그런데 메일 발신자는 단지 파일명만 붙였고, 다른 게시자가 유언이라고 꾸몄을 수도 있어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문서를 넘겨받아 거짓말이 점점 커지는 구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검토 후 배포'였다. 다음에는 '사망 전 마지막 경고'가 됐다. 마지막에는 '배정우의 유언'이 됐다. 세 단계의 작성자가 모두 같다고 믿으면 조작의 실제 경로를 놓친다.
오후 한 시, 백이준이 내부 교육자료 목록을 확인해줬다. 놀랍게도 그 음성은 직원 전용 비밀 영상이 아니었다. 납품업체가 고객사용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공개했던 샘플에 포함된 문장이었다. 누구든 일정 기간 내려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럼 내부 직원만 아는 자료가 아니네요.”
“적어도 문장 자체는 아닙니다. 다만 파일이 어디서 내려받아졌는지, 이후 어떻게 편집됐는지는 모릅니다.”
익명 발신자에게 높은 내부 권한이 있을 거라는 내 짐작 하나가 약해졌다. 이것은 수사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내부자라는 편견 때문에 보지 못했던 외부 유포자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오후 두 시, 예상하지 못한 피해가 드러났다. 음성이 교육자료일 가능성이 알려지자 인터넷에서는 배은정이 진짜 유언을 숨겼다는 글이 퍼졌다. 거짓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자 그 반박마저 유족의 음모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분노했지만 그들을 찾아가 논쟁하지 않았다. 오선영이 신속하게 게시물 원본과 유포 계정을 확인하는 절차를 안내했고, 한유리는 교육자료와 유언의 차이를 설명한 짧은 정정 기사를 올렸다. 배은정에게는 필요 이상의 확인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나는 첫날의 사건기록을 다시 열었다. 보고서 형식, 경찰서 이름, 피해자와 용의자, 발생 예정 시각. 그 문서는 나를 행동하게 만들었다. 누가 봐도 미래에서 온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살인 예고라는 문장 하나가 경찰에 연락하게 만들리라는 사실은 그리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경찰에 전화하자 연락이 회사에 전달됐다. 회사의 여러 사람이 알게 됐다. 그리고 누군가는 내가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시간을 맞힌 것처럼 보이는 정보는 사실 이미 만들어 놓은 경로에서 되돌아온 정보일지 모른다.
“그럼 모든 사건이 연극이었다고 생각하세요?” 한유리가 물었다.
“아니요. 배정우는 실제로 죽었고 임소율은 실제로 협박을 받았어요. 그 부분은 연극이 아니죠. 문서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려 만든 장치였을 가능성과 실제 범죄는 분리해야 해요.”
“그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는 증거는 아니어도, 사람이 죽을 때 이용한 증거일 수 있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 한유리는 실제 교육영상의 낡은 자막을 확인했다. 익명 파일에는 ‘미확인 사본을 개별 수신자에게 전송하지 마십시오’라는 문장이 나오지만, 영상 화면의 자막에는 한 문장이 더 있었다. ‘관리자 승인 없이 외부 발송 금지.’
“상대가 마지막 문장을 일부러 잘랐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파일 길이가 짧으니 가능하겠죠. 하지만 일반적인 음성 추출 과정에서 빠졌을 수도 있어요.”
“그럼 어떤 걸 먼저 확인하죠?”
“영상의 음성과 익명 파일의 파형이 이어지는지, 자막이 원본 음성과 일치하는지, 마지막 잘린 소리에 다른 원천이 섞였는지요.”
그녀는 영상 속 보안 안내 문구를 기사로 옮기려다 멈췄다. “이걸 그대로 올리면 누가 다시 악용할 수도 있겠네요.”
나는 그녀와 상의해 원본 파일을 배포하지 않고 검증 결과만 설명할 방법을 정했다. 일반 독자가 확인할 수 있어야 하지만 누군가 새 조작 파일을 만드는 데 편리한 재료를 더 줄 필요는 없었다.
“정보를 감추는 것과 위험한 복제를 줄이는 건 다르군요.”
“그렇죠. 어떤 문장을 왜 생략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면요.”
한유리는 오래전 자신의 기사 정정 기록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동안 저는 공개하면 자동으로 진실해지는 줄 알았어요.”
“공개한 자료에도 출처가 있어야죠. 그리고 공개로 피해를 입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살펴야 합니다.”
저녁 여덟 시, 정민규는 공개 교육자료의 배포 중단 날짜를 찾아냈다고 했다. 내가 받았던 익명 파일과 소리가 일치한다면 그 자료는 2025년부터 외부에 있었을 수 있었다. 다만 정확한 다운로드 날짜는 기록이 남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다.
“이 파일의 제작자는 범인처럼 보이지 않겠네요.” 내가 말했다.
“제작 자체가 일반적인 교육 업무일 수 있으니까요. 재사용한 사람을 찾아야겠죠.”
그는 실수에서 배운 사람답게 원본의 링크와 수정 이력을 확보해뒀다고 했다. 나는 한때 그를 믿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가 이렇게 확인한 작은 기록들이 내가 가진 어떤 직감보다 힘이 있다는 걸 안다.
밤 열 시, 오선영이 마지막 전화를 걸었다. 영상 분석 담당자는 음성 마지막에 교육자료에는 없는 짧은 잘림 구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 중이라고 했다. 그것이 편집 과정의 정상적인 흔적인지, 다른 소리가 뒤섞인 흔적인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이제 누구 음성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겠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게 빨리 정리하지 마. 마지막 부분은 다른 원본에서 왔을 수도 있어.”
나는 멈췄다. 그녀가 옳았다. 한 가지 설명이 많은 부분을 해결한다고 해서 모든 부분을 해결하는 건 아니다.
통화를 끊고 화면을 보니 익명 메일의 첨부는 여전히 같은 이름이었다. REVIEW_BEFORE_RELEASE_0216.wav. 그 파일명이 왜 0216인지 여전히 모른다. 21시 16분의 수신시각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고, 단지 누군가 우리를 그 시각으로 끌고 가려고 붙인 숫자일 수도 있다.
나는 노트에 ‘음성 출처 후보: 2025년 교육자료’라고 적었다. 뒤에 ‘편집 경위 미확정’도 붙였다.
그 순간 새 메일이 도착했다.
‘목소리는 맞혔네요. 그럼 잘린 마지막 일 초는 누구 것인지 맞혀보세요.’
나는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상대는 우리가 교육자료를 찾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공개 기사에서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메일의 그 한 줄은 더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누가 잘린 부분을 붙였는가. 그리고 그걸 왜 하필 수정본의 수신 시각과 묶었는가.
이번에는 그 질문을 내일 확인할 항목에 올렸다. 답을 보내주는 사람이 아니라 증거를 찾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제17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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