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없는 서명칸 옆에 '수령 완료'라는 글씨가 찍혀 있었다.
2027년 4월 21일 수요일, 정민규가 들고 온 자료는 2025년의 임시 권한 토큰 발급대장이었다. 개인에게 배정된 물건을 누가 가져갔는지 확인하도록 만든 장부였지만, 당시에는 퇴근 무렵 여러 토큰을 한꺼번에 회수하고 다음 날 오전 다시 내주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보안 담당자가 일일이 서명을 받지 못한 날에는 시스템상 완료만 눌렀다.
“누가 그걸 허용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규정상 허용된 적은 없습니다. 당시 책임자가 감사 지적을 받았다는 자료는 있어요. 다만 사건 당일 장비를 누가 썼는지는 별개입니다.”
나는 장부를 다시 봤다. 수령자의 이름을 쓰는 칸은 비어 있고, 상태는 완료. 누군가를 범인으로 만들기 좋은 모습이었다.
그때 한유리가 인터넷 게시물을 보여줬다. 권다정이 토큰을 받은 사람이라는 캡처가 퍼지고 있었다. 게시글에는 '명부에 이름이 없는 이유는 일부러 지웠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
“원본에 아예 이름이 없는데 어떻게 권다정이라고 하죠?”
“댓글에서는 당시 파견직이었으니까 그랬을 거라고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빈칸을 싫어했다. 누군가 답을 써 넣으면 그게 얼마나 나쁜 증거인지 확인하기 전에 안도한다.
권다정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게시물을 이미 봤다고 했다.
“또 면접을 취소하라는 연락이 왔어요. 제가 승인자라는 이유래요.”
“그 내용은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명하면 오히려 제가 변명한다네요.”
나는 즉시 좋은 해결책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정정 요청과 피해구제는 진행 중이지만 오늘 취소된 면접을 되돌릴 수 있을지는 몰랐다. 대신 게시물의 원본 보존과 관련 기관의 공식 확인 창구를 다시 정리했다.
“서 조사관님, 저 그날 오전에 정말 일했어요. 못 한 일도 있고요. 그런데 하지 않은 일까지 제 이름으로 채워지는 게 무서워요.”
“그 부분은 구분하겠습니다.”
“그 말을 다른 사람들도 해주면 좋겠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화보다 피로가 많았다. 범인의 정교한 계략보다 작은 무책임이 사람을 오래 지치게 한다는 걸 나는 안다.
오후 한 시, 선영은 T-07 주변의 장비 장애 기록에서 새로운 점을 찾았다고 했다. 점검 담당자가 9시 35분에 화면을 재부팅하고 9시 39분까지 그 자리에서 테스트한 사실은 맞았다. 하지만 9시 43분 화면 작업이 있었다고 해서 그가 실행자라는 뜻은 아니었다. 점검 후 다른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그럼 그 담당자 진술은요?”
“당일 누구를 봤는지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해. 교대자들의 얼굴은 비슷한 제복을 입고 있었고, 시간이 오래 지났잖아.”
나는 기억이 불분명한 사람을 압박하지 않기를 바랐다. 선영도 같은 생각이었다.
오후 두 시, 임소율의 재심사 회의 결과가 나왔다. 회사는 3억 8천만 원이라는 전체 검토액을 그녀 개인의 확정 채무로 적는 것을 중지하고, 항목별 근거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그녀는 일단 안도했지만, 이미 밀린 임대료와 가족 치료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는 여전히 문제였다.
“이제 끝난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아직 아닙니다. 다만 가장 큰 오해 하나는 공식적으로 멈췄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제가 3억 8천을 빼돌렸다고 말해요.”
“그 금액은 검토액이지 횡령 확정액이 아닙니다. 그 표현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 대신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남이 만든 실수를 정정받았다고 기뻐해야 할 의무가 없다.
오후 네 시, 사건이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토큰 발급 당시 전산 담당자가 보관했던 작은 종이 쪽지가 나왔다. ‘대체 접속: 검토실 / 교대 완료 확인 후 반납.’ 구체적인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쪽지에 적힌 날짜가 달랐다. 8월 26일. 누군가 8월 25일의 빈칸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 날 쪽지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증거 조작입니까?” 한유리가 물었다.
“아직 아닙니다. 옛 장부를 분류하다 잘못 묶었을 수도 있어요.”
“모든 게 그럴 수도 있다고 하면 결론은 언제 내리죠?”
“반대로 결정적인 날을 하루 틀려서 죄 없는 사람을 지목하면 결론을 내린 게 아니라 사건을 하나 더 만든 거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하면서도 조급했다. 200화라는 끝이 정해진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오래 이 기록을 확인해야 할까. 실제 수사는 시간표대로 범인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끝까지 현실의 속도를 존중하고 싶었다.
오후 늦게 박혜림이 전화했다. 새 직장의 인사 담당자가 ‘허위 열람 신청’ 사건을 확인하겠다며 그녀의 개인 휴대전화에서 로그인 기록을 직접 보여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박혜림은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면 해고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 기록에는 다른 사람들의 연락처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회사에서 확인할 정당한 범위가 무엇인지 먼저 물어보세요.”
“그럼 제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잖아요.”
“접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사생활을 넘길 필요는 없습니다. 공식 접속 기록과 본인 진술을 우선 확인할 수 있는지 문의해보세요.”
박혜림은 오래 침묵했다. “전 새 직장에서는 조용히 일하고 싶었어요. 왜 옛 회사 일이 아직도 따라오죠?”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 사람에게 근무 경력이란 밥벌이를 위한 기록이지, 평생 해명해야 하는 죄목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인사 담당자에게 절차를 물었고, 보안팀이 원본 로그를 확인할 때까지 조치를 보류하겠다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즉시 모든 의혹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겁에 질려 다른 사람의 개인정보까지 넘기는 일은 막았다.
나는 메모에 그 결과를 적었다. 불안한 피해자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누군가 대신 모든 일을 결정해주는 일이 아니다. 자기 정보에 관해 질문할 시간을 보장받는 일일 수 있다.
해 질 무렵 오선영은 사무실로 와서 자료 몇 장을 검토했다. “진혁아, 너는 왜 아직도 이 사건을 놓지 못해?”
“처음에 제가 받은 문서가 사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네가 문서를 만들진 않았잖아.”
“그렇죠. 하지만 제가 사람들에게 확신한 척 말했으면 더 많은 사람이 다쳤을 겁니다.”
선영은 한참 나를 보더니 말했다. “그럼 네가 할 수 있는 건 확신을 줄이는 거야. 불안까지 없앨 순 없어.”
나는 그 말을 기억했다.
그날 밤 익명 계정은 '권다정이 수령했다'는 글 아래 새로운 증거라고 사진을 올렸다. 종이 쪽지에 적힌 '교대 완료'가 확대돼 있었다. 아래의 날짜는 잘려 있었다. 이번에도 누군가는 날짜 하나를 빼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민규가 먼저 잘린 부분을 확인해 공식 정정 자료를 수신 기관에 전달했다. 게시물이 크게 퍼지기 전에 몇몇 창구는 허위 자료임을 표시했다.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권다정의 이름으로 신청된 한 건의 거래 제한이 취소됐다.
“이제 제 말을 들은 사람이 한 명은 있네요.” 권다정이 말했다.
나는 답했다. “한 명이라고 해도 실제 기록을 고친 사람입니다.”
나는 권다정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했다. 정정된 기관의 이름과 담당자의 확인 날짜를 자신의 수첩에도 남겨두라는 것이었다. 내 사무실이 문을 닫거나 경찰의 담당자가 바뀌어도,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누군가 다시 옛 자료를 보내올 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럼 이번엔 제가 제 이름을 보관하는 거네요.”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서명과 확인 버튼을 빼앗는 범인을 쫓고 있었다. 그에 맞서는 첫 행동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확인 권한을 주는 일이 아니라, 원래 그 사람 것이었던 판단권을 되돌려주는 일이었다.
그날은 그 정도의 승리로 충분했다.
제17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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