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를 낮춘 사람을 찾으려면 누가 그 시간에 기계 앞에 서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 문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2027년 4월 20일 화요일, 오선영이 보여준 것은 기계 앞의 사람이 아니라 그때 기계 앞에 없어야 했던 사람의 근무표였다.
“2025년 8월 25일 오전 9시 43분 8초. T-07 단말.” 선영이 말했다. “우리가 확인한 화면 로그는 여기까지야. 그런데 누군가 고태원이 그 단말을 썼다는 글을 올렸어.”
“고태원은 당시 업무 구역에 있었잖습니까?”
“있었다는 사실하고 T-07을 썼다는 건 다른 얘기야.”
그녀는 근무표 위에 다른 자료를 놓았다. 같은 시간에 고태원이 내부 행정창구와 통화한 기록이었다. 그 통화가 그의 휴대전화로 이뤄졌는지,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았는지는 아직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한 사람이 화면 앞에 있었을 거라는 단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 고태원에게 의심을 품었다. 그가 9시 41분 출력한 마감표의 두 번째 장이 빠졌고, 9시 43분 직전에 업무 구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퍼즐 조각이 맞아 보였다. 이제 선영은 퍼즐의 틀부터 다시 보라고 했다.
“그럼 T-07은 누가 사용했습니까?”
“단말에 꽂은 임시 권한 토큰의 식별 번호가 복구됐어. 토큰이 누구에게 발급됐는지 조회 중이야.”
나는 곧바로 이름을 묻지 않았다. 토큰 수령자가 곧 사용자라는 뜻이 아니었다. 2025년의 업무 관행에는 로그인된 화면을 교대자에게 넘기는 일이 있었다. 권한을 받은 사람과 버튼을 누른 사람이 다를 수 있었다.
오전 열한 시, 오승재에게서 정식 회신이 왔다. 그는 2025년 8월 25일 9시 31분에 ‘사유 미입력 상태에서도 임시 권한을 받을 수 있다’는 운영 옵션을 변경한 것은 인정했다. 다만 자신은 경고를 참고로 바꾸는 기능을 직접 실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 말이 진짜일까요?” 한유리가 물었다.
“로그상 서로 다른 단말이라는 점은 확인됐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지시했는지 여부까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죠.”
“결국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어요?”
“옵션 변경 경위는 그 자체로 검토할 일입니다. 경고 하향의 실행 책임, 후속 업무 승인 책임, 살인 사건 책임은 따로 봐야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기사의 제목으로는 길지만, 사람 인생을 분류하는 데는 필요한 길이였다.
점심에는 김주하가 회의실 복도에 남겨둔 손메모를 보여줬다. ‘09:40 종이 걸림. 고태원 두 장 요청. 마감 먼저.’ 나는 그 문장이 누가 재촉했는지를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모에는 주어가 없었다.
“누가 마감 먼저라고 했나요?”
“전화였던 것 같아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그 말을 최명환이 했다는 글이 돌고 있습니다.”
“그 사람 목소리라고 기억하지는 못해요.”
나는 그의 대답을 적었다. 기억이 빈 사람에게 정답을 제시하면, 그 빈자리는 곧 정답처럼 채워질 수 있다. 우리는 그를 돕는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얼굴을 그의 기억에 넣어서는 안 됐다.
오후 세 시, T-07이 설치된 장소의 배치도가 나왔다. 정산관리실 내부가 아니라 공용 검토실 구석이었다. 누군가 문을 잠그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곳. 그 공간은 출입카드로 층만 기록했고, 방 안에서 단말을 만진 사람은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럼 또 특정 못 하겠군요.” 내가 말했다.
선영은 뜻밖에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특정이 어렵다는 것과 못 한다는 건 다르지. 남은 기록을 겹쳐보면 돼.”
그녀가 주목한 것은 장비 점검 기록이었다. T-07은 당시 화면 꺼짐 현상 때문에 오전 9시 35분 재부팅됐고, 재부팅 후 누군가 임시 권한 토큰으로 접속했다. 장비 담당자는 화면이 다시 켜졌다는 확인을 남겼다. 그는 그때 방 안에서 누구를 봤는지 확실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왜 이 기록을 이제야 찾았죠?”
“그동안은 결재 자료를 중심으로 찾았어. 장비장애 기록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렸지.”
“사소한 수리 내역이군요.”
“맞아. 그런데 어떤 기록은 사건의 핵심이 되기도 해.”
나는 그녀가 '핵심'이라고 말하면서도 곧바로 범인을 지목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오후 다섯 시쯤 선영은 공용 검토실의 보안 규정도 확인했다. 당시 T-07은 자동 잠금이 불안정했고, 장비 점검 뒤 일정 시간 동안 인증 화면이 유지될 수 있었다. 사용자가 바뀌어도 프로그램에는 먼저 로그인한 계정만 남는 문제였다.
“그걸 알면서 운영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한 차례 개선 요청은 있었어. 우선순위가 낮다고 미뤄졌고.”
나는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컴퓨터 화면의 잠금 문제를 수리하지 않는 결정은 평범한 사무실에서는 예산의 문제로 처리된다. 그런데 그 화면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넘기는 경고를 낮출 수 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럼 유지보수를 미룬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겠군요.”
“시스템 관리 책임은 따져야지. 하지만 특정 날의 조작을 지시했다는 증거는 별개야.”
선영은 또다시 선을 그었다. 나는 수첩에 적었다. ‘고장 방치’와 ‘고의 조작’은 다르다. 두 가지가 동시에 있었다면 둘 다 확인해야 한다.
그때 문자 한 통이 왔다. 최명환 측이 회사의 내부 감사와 별개로, 자신이 담당했던 월말 마감 지침이 어떠한 권한 위임을 뜻했는지 소명하겠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침묵하는 대신 자료를 낸다고 했다. 그렇다고 곧바로 선의의 협조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자료를 내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부분만 내놓을 수도 있으니까.
저녁에는 고태원 측에서 자신에 대한 허위 게시물을 삭제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는 2026년 약속 취소 기록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한 문제도 있었고, 2025년 문서 출력 상황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9시 43분 버튼을 눌렀다고 적힌 글은 확인된 사실이 아니었다. 한유리는 기사에서 두 항목을 분리했다.
“사람들은 왜 잘못 하나를 인정한 사람에게 다른 잘못도 전부 인정하라고 할까요?” 그녀가 물었다.
“설명하기 편하니까요.”
나는 말하고 나서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그 편의를 좋아했다. 하나의 범인이 모든 나쁜 일을 계획했다고 믿으면 이야기는 단순해진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단순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사실을 찾는 일을 하고 있었다.
밤에 새 이메일이 왔다. 이번에는 고태원의 이름도, 최명환의 이름도 없었다.
‘T-07을 켠 사람이 경고를 낮춘 사람은 아닙니다.’
한 줄뿐이었다. 나는 자동으로 반박하려다 멈췄다.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었다. 다만 이 문장이 적어도 우리 손에 없는 정보를 지닌 사람의 말이라는 근거는 없었다. 공용실에서 작업자가 교대할 수 있다는 상식만으로도 쓸 수 있다.
나는 이메일을 보존했다. 그리고 따로 적었다. ‘T-07 재부팅 09:35. 토큰 접속 이후 실행 09:43:08. 서로 다른 행위.’
정민규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 조사관님, 토큰 발급 창구에서 접수 인수자가 확인됐습니다.”
“누굽니까?”
“이름을 공개하기 전에 실제 사용 여부를 먼저 확인할 겁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토큰 발급대장에는 받았다는 서명이 없습니다.”
나는 이 사건의 오래된 문장을 떠올렸다. 받았다는 표시와 실제 수령. 또 같은 틈이었다. 누군가 그 틈에 이름을 집어넣으려 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멈출 수 있을까.
제17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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