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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내일의 살인사건이 오늘 접수됐다 · 173화
PAYLUA ORIGINAL · 제173화

173화. 같은 보류, 다른 이유

내일의 살인사건이 오늘 접수됐다 · 3,960자

오프라인 책장
2027년 4월 18일 일요일, 이경섭이 오선영에게 제출한 규칙판에는 ‘보류’라는 글자가 일곱 번 등장했다. 하나의 상태가 일곱 가지 이유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서류 원본 훼손, 중복된 수신자, 잘못 연결된 첨부, 담당자 부재, 승인 보류, 수신자 확인 대기, 그리고 외부 발송 제한. 어느 경우든 접수화면에는 똑같이 ‘개별 수신자에게 넘기지 말 것’이 나타났다. 나는 규칙판을 들여다보며 작은 허탈감을 느꼈다. 가장 강렬해 보였던 단서가 가장 흔한 안내문이었다. “모든 보류가 같은 문장이라면 왜 이유를 기록합니까?” 내가 물었다. 이경섭은 화면의 오른쪽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 별도 사유 코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동함 화면을 캡처할 때 왼쪽만 찍는 경우가 많았죠.” “사유 코드가 남아 있습니까?” “시스템 백업에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짜의 원본이 얼마나 보존됐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오선영은 보관 담당자에게 백업의 보존 범위와 수집 절차를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나는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되는 범위에서만 설명을 들었다. 기록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의 권한을 흉내 낼 생각은 없었다. 이경섭은 오래된 직원 교육자료도 설명했다. 누구도 봉투를 직접 열어 확인할 수 없는 단계에서 담당자가 상대를 안심시키려고 ‘인수 완료’라고 표현하는 관행이 있었고, 그걸 고치려는 교육이 반복됐다고 했다. 경고문이 여러 번 바뀐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교육을 반복했다는 건 문제가 계속 있었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다만 그때마다 모든 직원이 규정을 어겼다는 뜻은 아니에요. 시스템 용어 자체가 잘못된 경우도 있었죠.” 나는 2025년 8월 25일의 열한 번째 경고를 떠올렸다. ‘미교부 책임 이관 금지.’ 너무 당연한 말을 누군가 굳이 한 칸 만들어 넣었다. 이유는 그 당연한 일이 실제로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후에는 배은정이 보내온 공식 질문지가 도착했다. 수사팀에 제출할 질문은 세 가지였다. 동생의 정확한 사망 원인이 무엇인가. 현관 고장 신고와 사망 사이에 확인된 연결이 있는가. 인터넷에 유포된 음성이 동생의 목소리로 확인됐는가. 그녀는 ‘누가 죽였습니까’라는 질문을 지우지 않았다. 다만 그 답을 증거 없는 추측으로 받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질문지를 읽고 선영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는 자료인지 확인했다. 정식 진술 창구를 안내한 뒤에는 더 손대지 않았다. 유족에게 계속 사무실로 찾아오게 만드는 일도 편리한 취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한유리는 배은정의 질문지를 기사에 인용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유족의 명확한 동의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미 같은 결론이었다고 했다. “대신 제가 할 수 있는 건 있겠네요.” “뭡니까?” “그 질문에 아직 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쓰는 거요. 답이 없다는 걸 범인을 알고 있다는 뜻처럼 꾸미지 않고요.” 그녀는 기자였다. 나는 그녀의 일을 통제할 권한이 없었다. 다만 그동안 함께 확인한 기록이 서로를 덜 다치게 하는 데 쓰인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저녁 무렵 김동식의 이름으로 또 다른 글이 올라왔다. ‘경비원 15만 원 수령, 사건 관련 공모 인정.’ 나는 자료를 확인했다. 김동식이 15만 원을 받았다는 진술은 있었지만 살인 공모를 인정했다는 공식 사실은 없었다. 누군가는 실제 잘못 하나에 확인되지 않은 범죄를 덧붙여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김동식은 돈을 받은 행위를 인정했고 관련 조사도 받았다. 그가 피해자인 척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잘못의 크기를 임의로 키워 타인의 범죄를 덮어씌우는 것도 정의가 아니었다. 나는 한유리에게 확인 가능한 선을 표시해줬다. “왜 하필 지금 김동식을 다시 꺼낼까요?” 그녀가 물었다. “우리가 공동함 사유 코드를 찾으려는 시점이니까 관심을 돌리려는 걸 수도 있죠.” “그게 사실이면 이 글을 올린 사람이 수사 흐름을 알고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공개 기사만 읽어도 그 정도는 추측할 수 있어요.” 나는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 사소한 상관관계에 비밀정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 했다. 오후 다섯 시에는 창고 업체의 전산 담당자가 전화를 걸었다. 장애보고서가 있다는 사실만 전달받은 그는 사유 코드가 바뀌면 사용자가 어떤 화면을 보는지 설명했다. 예를 들어 ‘외부 발송 제한’과 ‘대기’는 업무상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지만 화면에서는 모두 노란색 표시로 보일 수 있었다. 오래 일한 직원은 옆의 작은 코드까지 확인했고, 익숙하지 않은 직원은 색만 보고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누가 잘못한 겁니까?” 나는 물었다. “화면을 그렇게 만든 사람도 책임이 있겠죠. 설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고요. 하지만 상태를 틀리게 보이게 만든 것 자체가 고의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당시 프로그램 제작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나는 그의 설명을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 확인할 질문으로만 사용하기로 했다. 통화 뒤 한유리는 말했다. “노란색 한 칸이 사람 인생을 바꾸는군요.” “색깔 자체보다 그걸 근거로 내린 다음 행동이 문제였겠죠.” 나는 화면을 확대했다. 원본에는 언제나 작게 사유 코드가 있었다. 잘린 사진에는 그 칸이 없었다. 사고일까, 의도적 편집일까. 그 둘을 가르는 자료를 찾으면 적어도 누군가가 우리를 속이려 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밤 아홉 시, 이경섭이 짧게 전화했다. 그는 사유 코드가 잘못 이관됐던 사고를 기억한다고 했다. 2026년 가을 시스템 교체 당시 ‘외부 발송 제한’ 코드와 ‘수신자 확인 대기’ 코드의 표시 순서가 바뀐 적이 있었다. 직원들이 화면을 보면 원래 사유와 달라 보일 수 있었고, 이전 화면 이미지와 새 화면 이미지를 단순 비교하면 누군가 상태를 조작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 사고가 11월 2일에도 적용됐습니까?” “확인해봐야 합니다. 저는 당시 이미 퇴사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지금 기억났습니까?” “당시 장애보고서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같은 보류, 다른 이유.’” 제목은 묘했다. 사건의 핵심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누군가가 만든 불확실성을 드러냈다. 나는 그에게 보고서 원본을 경찰에 안내해달라고 부탁했다. 회사 내부 자료를 개인 이메일로 보내지 말아달라고도 했다. 그는 짧게 웃었다. “서 조사관님은 이상하게 자료를 받기 싫어하는 조사관이군요.” “자료를 받기 싫은 게 아니라, 나중에 사용하지 못할 자료를 함부로 늘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동의했다. 전화가 끊긴 뒤 나는 임소율의 2025년 신고서 상태와 2026년 공동함 상태를 한 종이에 나란히 적었다. R-04 ‘이관 후 종결’이 누군가의 요약에서 ‘철회 포함 종결’로 바뀌었다. 공동함 ‘보류’ 역시 화면에서는 같은 문장으로 여러 이유를 감췄다. 정확한 상태값은 사람이 읽기 쉽게 만든 설명문 속에서 변형됐다. 악인은 그 변형을 이용해 자신에게 필요한 문장을 선택하면 됐다. 하지만 그때마다 기계가 범인인 것은 아니다. 사람이 일부러 잘못된 설명을 골라서 널리 퍼뜨렸다면, 그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우리가 찾는 사람은 잘못된 시스템을 만든 사람인가, 잘못된 시스템의 틈을 알아보고 악용한 사람인가. 답은 둘 다일 수 있고, 서로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일요일 밤 끝에 선영의 메시지가 왔다. ‘2026년 시스템 교체 장애보고서 존재 확인. 배정우 사건과의 관련성 조사 중. 문서 이름만으로 확정하지 마.’ 나는 그 문자를 보며 웃었다. 선영은 이제 내가 가장 먼저 무엇을 추측할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나는 방금 그 추측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첫 메일에 죽을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해서 누군가 미래를 보는 게 아니듯, 장애보고서에 보류라는 말이 적혀 있다고 해서 살인 사건의 답이 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처음으로 ‘같은 보류, 다른 이유’라는 말 아래 질문 하나를 적을 생각이었다. 실제로 보류를 요청한 사람보다 먼저, 보류의 이유를 바꿔 보여준 사람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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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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