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우가 죽은 집에서 나온 상자는 노란색이 아니었다.
2027년 4월 9일 금요일, 오선영은 현장 자료를 재검토한 결과를 설명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추측부터 부정했다. 사진 속 작은 택배 상자는 평범한 갈색 골판지였다. 익명 메일의 C-12 노란 조각과 같은 계통이라는 근거는 없었다. 상자에는 배송사 표준 규격 표시가 있었을 뿐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같은 물건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랬겠지. 그래서 실제 포장재를 비교한 거야.”
“안에 든 물건은요?”
“수사자료 중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별도의 소형 물품이 들어 있었고 그 상태를 감정 중이라는 정도야. 서류가 들어 있었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지난 며칠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02-A라는 종이와 배정우의 상자가 이미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하지만 가상의 연결을 실물보다 먼저 만들어버리면, 다른 방향의 단서를 놓치게 된다.
선영은 원본 현장 기록과 이후 정리된 보고서를 서로 다른 화면에 띄웠다. 원본에는 '상자, 책상 아래쪽'이라고 적혀 있었다. 후속 요약에는 '피해자 곁에서 상자 발견'이라고 돼 있었다. 둘 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두 번째 문장은 상자가 시신과 직접 연결된 물건처럼 느껴지게 했다.
“누가 요약한 겁니까?” 내가 물었다.
“현장 자료를 받아 보고서로 옮긴 수사 지원 직원. 고의로 바꿨다는 자료는 없어.”
“하지만 독자는 다르게 읽겠군요.”
“그래서 위치를 정확히 정정했어.”
내가 바랐던 것은 상자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물건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사의 실제 진전은 그보다 작았다. 이제 상자를 잘못된 위치에 놓고 추론할 수 없게 됐다. 보통 그런 작은 진전 때문에 큰 오류를 막는다.
점심 무렵 정민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당시 인천 공동현관 고장 신고와 배정우 자택의 물품 배달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2026년 11월 3일 오후 여섯 시부터 아홉 시 사이에 같은 건물에 들어오려 했던 사람이 여러 명이었다. 그러나 기록마다 확인 수준이 달랐다. 건물 전체 배달 예정자, 현관에 도착한 것으로 표시된 기사, 실제 공동현관에서 호출한 사람은 같은 범주가 아니었다.
“누가 들어왔습니까?” 나는 물었다.
“정확히 확인된 사람부터 구분해야 합니다. 배송 완료 기록이 있다고 현관을 통과한 것은 아니니까요.”
정민규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내 말투를 배운 것 같기도 했고, 내가 그에게 배워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오후에는 배은정이 경찰을 통해 유품 추가 확인 절차에 참석했다. 나는 동행하지 않았다. 가족이 자신의 동생에 관한 자료를 보는 자리에 개인 조사사가 있을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녀가 요청한 서류의 종류를 이해하도록 설명했다. 감정 결과와 현장 목록, 반환된 유품 목록은 서로 다른 것이며, 확인 가능한 범위도 다르다고 했다.
배은정은 전화 끝에 물었다. “동생이 받은 봉투가 결국 없었다면, 처음에 보낸 문서는 누가 받았던 거죠?”
“없었다고 확인된 건 아닙니다. 지금은 상자가 그 봉투라는 증거가 없다는 뜻입니다.”
“말이 정말 어렵네요.”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세요.”
나는 전화를 끊고 책상 앞에 앉았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남은 가족은 이야기라도 완성하고 싶어 한다. 반면 수사를 하는 사람은 빈 부분을 빈 부분으로 남겨야 할 때가 많다. 그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다.
한유리가 들고 온 것은 상자 사진이 아니라 과거 보험 사고 현장의 부품 영수증이었다. 화진모빌리티가 사고 관련 비용을 처리하던 2025년 자료에 배정우의 승인 이름이 있었다. 그녀는 상자와 관계있냐고 묻지 않았다. 단지 그날 회사가 어떤 비용을 무슨 명목으로 옮겼는지 추적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자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액이 있다고 해서 돈이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계정 간 이체가 실제 지급으로 이어졌는지도 확인해야 해요.”
그녀는 별도로 자료를 복사해 놓았다. 이제 익명 발신자가 3억 8천이라는 숫자만 던져도, 우리는 그 숫자가 곧 횡령액이라는 이야기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날 저녁 익명 계정은 배정우 집의 상자 사진과 노란 C-12 조각 사진을 붙여 올렸다. 둘 사이에는 굵은 붉은 화살표가 그어져 있었다. 설명은 간단했다. '사건기록이 담긴 상자, 이제야 발견.'
“증거가 없네요.” 한유리가 말했다.
“화살표가 있죠.” 내가 답했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우리는 그 화살표가 사람을 얼마나 쉽게 속일 수 있는지 이미 여러 번 봤다. 나는 두 사진의 원본을 대조할 수 있는 자료만 정리해 선영에게 전달했다. 사진이 비슷하게 보이는 이유를 감정 없이 설명하고, 동일 물품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오선영은 답장을 보냈다. '실물 포장재 비교 결과를 법적 절차에 맞춰 정리할 예정. 피해자 가족을 먼저 보호할 것.'
나는 그 답을 읽고 조금 안심했다. 문제는 게시물을 지워버리는 것만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그런 게시물을 믿었을 때 그것이 틀렸다고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했다.
밤 열 시가 넘어서 새로운 사진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상자의 다른 면이었다. 거기에 작은 흰색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숫자는 잘려 있었고, 끝자리처럼 보이는 글자는 A였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02-A의 A일까.
하지만 나는 사진을 확대하지 않았다. 먼저 파일 이름과 수신 시각을 보존하고, 본문에 적힌 주장을 읽었다. '당신은 또 놓칠 겁니다.'
나는 오선영에게 파일을 전달했다. 그리고 한유리에게 말했다. “이 사진을 우리 결론의 시작으로 쓰지 맙시다.”
“그럼 뭘 먼저 할까요?”
“상자가 증언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눠야죠.”
그날 수첩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었다. '상자가 있었다.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감정 중이다. 누가 그곳에 가져왔는지 아직 모른다.'
상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상자에게 말을 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배정우의 상자 사진을 본 날 밤, 나는 보험사기 조사관으로 일하던 첫해의 사건 자료를 꺼냈다. 그때 한 운전자는 손상된 차량 옆에서 발견된 부품 때문에 고의 사고를 낸 사람으로 의심받았다. 나 역시 사진만 보고 그 부품이 그의 차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수리업체가 다른 차에서 분리한 부품을 같은 작업대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 사건은 무혐의 처분으로 끝났지만, 그 사람이 잃은 계약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때 느꼈던 수치심 때문에 자료를 오래 보관했다. 기술적으로는 같은 종류의 부품이었고, 사진에서는 같은 장소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차에서 떨어졌는지에 대한 연결은 없었다.
이번 사건의 상자도 그랬다. 상자가 있었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우리가 증명해야 할 질문이지 사진이 대답해주는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수첩에 '상자=02-A'라고 적어둔 흔적을 지웠다. 누군가 날카로운 추리라고 칭찬할지도 모르는 연결이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근거 없이 멋진 결론은 사람을 쉽게 움직인다. 나는 그 결론을 버리는 데 오늘 하루를 썼다.
그날 밤 한유리는 물었다. “상자를 둘러싼 자료가 정말 아무 의미 없는 건가요?”
“의미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이 누구인지, 파일이 원본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확인하면 유포 경로를 찾을 수도 있죠. 다만 상자 안에 사건기록이 있었다는 주장은 아직 다른 이야기예요.”
한유리는 노트를 다시 펼쳤다. “그럼 제가 질문을 잘못했네요. 무엇이 들어 있었느냐보다 누가 왜 이 사진을 보내고 싶은지부터 확인해야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의심하는 것과 사진이 움직인 경로를 추적하는 일은 달랐다. 상대가 우리에게 보낸 물음의 모양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제16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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