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서명에는 서진혁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서명은 내가 업무를 확인한 증거가 아니었다. 배송 기사가 건넨 단말에서 물건을 받으며 그린 몇 획이 다른 서류의 ‘내용 검토 완료’ 칸으로 옮겨졌을 뿐이었다. 2027년 3월 31일 수요일, 나는 오선영의 연락을 받고 정식 참고인 진술을 위한 준비를 했다.
“원본 배송 기록과 가짜 검토서를 비교했어.” 그녀가 말했다. “같은 모양이라는 것 외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어.”
“어떤 차이입니까?”
“배송기록에선 동의한 대상이 택배 수령이고, 검토서에선 회사 문서 내용 확인이야. 서명 이미지가 같아도 행위가 같아지는 건 아니지.”
나는 전화를 든 채 웃지 못했다. 그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서명이라는 모양만 떼어내 전혀 다른 법적 의미를 붙였다. 그 결과 박혜림의 이의신청이 다시 처리 중지될 뻔했고, 누군가 나를 공범처럼 부르기 시작했다.
“이미지를 어떻게 가져갔는지 확인됐습니까?”
“배송업체 내부 보관시스템과 재사용된 서류의 파일 이력을 대조하고 있어. 외부에서 훔친 건지, 누가 정당한 경로로 받았다가 악용한 건지 아직 몰라.”
나는 시계를 봤다. 오전 아홉 시였다. 내게는 낡은 택배 수령 하나였지만 박혜림에게는 다시 취업의 문이 닫힐 수 있는 문제였다.
박혜림은 그날 회사에 첫 출근 절차를 밟았다. 그녀는 내게 직접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짧은 문자를 보냈다. ‘신분증을 보여드려야 한다고 해서 보여드렸고, 복사본을 남길 필요가 있는지는 먼저 물었습니다.’ 나는 그 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인수 확인 문장에 자기 삶을 맡기지 않으려 했다.
오후에는 회사의 인사 담당자가 박혜림을 불렀다. 이전 사업장과 관련한 소문이 인사팀 문의함에 다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박혜림은 이번엔 혼자 설명하지 않았다. 회사가 공식 문서로 정정한 내용을 제출하고, 허위 게시물과 자기 업무능력 평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인사 담당자는 이를 별도 사건으로 처리하겠다고 답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저녁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매일의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한편 한유리는 사칭 검토서의 배포 시점을 추적했다. 이전에 익명 게시물에 올라온 파일은 글자 간격이 어색했고, 이번에 박혜림 회사로 들어간 자료는 배치가 조금 달랐다. 같은 작성자가 여러 번 저장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받은 파일을 다시 편집했을 수도 있었다.
“같은 범인일까요?” 그녀가 물었다.
“같은 흔적만으로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공용 양식은 다른 사람이 쓰기 쉽습니다.”
“그럼 우리가 겨우 찾아낸 오타는 쓸모없나요?”
“아니요. 생성과 편집의 순서를 좁힐 수 있죠. 사람이 같은지는 그다음에 봐야 합니다.”
정민규가 오후 다섯 시쯤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과거 2027년 1월 12일 내 이름으로 발송됐던 ‘인수 완료’ 알림을 다시 확인했다. 그 알림은 예약 접수를 알리는 구형 문구였다는 점이 이미 밝혀졌지만, 이번 서명 도용 사건을 엮어 ‘서진혁은 모든 서류를 실제 인수했다’는 주장이 생겼다.
“서류가 둘이라는 걸 말하려고 왔습니다.” 정민규가 말했다.
“둘요?”
“1월 12일 알림은 시스템 예약 상태. 3월에 온 검토서는 이미지가 붙은 별개 문서. 같은 이름과 같은 단어를 쓴다고 하나의 행위가 아니에요.”
“그걸 공식으로 정리했습니까?”
“네. 오선영 경위 검토도 받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왜 굳이 사무실에 왔냐고 물었다. 그는 종이를 펼치며 대답했다. “이전에 제가 한 번은 비슷한 이름을 보고 같은 자료인 줄 알고 하나로 묶었습니다. 이번엔 그러지 않으려고요.”
그의 진술서에는 자신이 했던 잘못도 빠지지 않았다. 최초 연락 과정에서 임소율 이름을 회사 쪽으로 넓게 확인했던 일, 개인정보 가림 누락을 겪었던 일. 그 때문에 누구에게 연락이 전달됐는지 지금도 수사팀이 확인해야 했다.
나는 종이를 덮었다. “책임을 적었다고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건 남겨야 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무렵 백이준에게서 서명 도용 관련 회사의 공식 조치가 전달됐다. 서명 이미지가 들어간 검토 확인서는 실제 승인 문서로 쓰일 수 없다는 안내와 함께, 해당 서류를 받았던 협력업체에 재검토 요청이 발송됐다는 내용이었다. 박혜림의 이의신청에 그 문서가 근거로 쓰이는 일도 중단됐다.
“그러면 끝난 겁니까?” 한유리가 물었다.
“끝난 건 아닙니다. 이미 그걸 보고 판단한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실제로 오후 여덟 시, 아직 정정문을 읽지 못한 거래처 담당자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내가 검토에 동의했는데 왜 이제 와서 부인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감정적으로 반박하는 대신 문서 번호와 발급 주체, 검토 당시 내가 실제로 접촉한 사실이 없다는 자료를 담당 수사관을 통해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원칙만 말하면 책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상대가 물었다.
“제가 책임진 행위는 확인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지 않은 확인까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전화를 끊고 손을 내려다봤다. 배송용 단말에서 한 번 그은 이름은 내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로 복제된 이름은 누군가의 파일 속을 떠돌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무슨 서류에 서명할 때마다 이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그날 오후에는 택배기사의 당시 접수기록도 다시 확인됐다. 수령자가 누구인지보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행위에 동의했는지였다. 단말 화면에 표시된 문구는 ‘물품 수령’이었고, 그 아래에는 발송한 회사의 계약 조건이나 회계 검토에 관한 조항이 없었다. 나는 그 자료를 보고도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반박하려 다시 한 번 서명해야 한다는 현실에 씁쓸하게 웃었다.
“그 서명을 새로 만들면 또 가져다 쓰는 것 아닙니까?” 한유리가 물었다.
“그래서 서명만으로 끝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실 확인 절차와 문서 번호, 제출 목적을 같이 남겨야죠.”
그녀는 나를 바라보다가 자기 휴대전화의 사진 앨범을 열었다. 회사 취재 중 신분 확인을 위해 보낸 이미지가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처음으로 불안한 표정이 됐다. 나는 무조건 지우라고 하지 않았다. 어떤 자료는 보존해야 부정 사용을 입증할 수 있었으니까. 대신 이미 제출한 곳과 목적을 정리하고, 불필요하게 복사본을 더 보내지 않도록 하자고 말했다.
오선영은 오후 여섯 시에 사칭 서명이 들어간 문서가 실제 결재 시스템을 통과한 적은 없다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했다. 다만 이를 첨부해 거래처의 판단을 흔든 일은 별개의 피해로 남았다. ‘공식 승인이 아니니 아무 문제 없다’는 회사의 첫 반응은 그래서 틀렸다. 사람이 틀린 문서를 믿고 채용과 계약을 미루었다면 실제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을 공식 진술에 포함했다. 내 명예만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방식으로 서명 이미지가 도용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했다. 한 번의 서명을 통해 사람의 말과 행동을 대신 결정하려는 자에게, 그 사실을 쉽게 인정하는 시스템은 가장 값싼 도구일 것이다.
밤 9시 14분. 익명 발신자가 메일을 보냈다.
‘서명을 확인하셨군요. 그런데 누가 첨부했는지는 아직 모르시겠죠.’
나는 처음으로 그 문장을 읽으며 화가 나지 않았다. 상대가 알고 있는 사실 하나를 말할수록,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경로도 하나 더 생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선영은 이미 배송업체의 원본 수령 로그와 검토서의 생성 기록을 비교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바로 그때 두 번째 메일이 도착했다.
‘이름은 한 번만 써도 됩니다. 나머지는 남이 대신 써주니까요.’
나는 화면을 캡처하지 않고 원본을 저장했다. 메시지에 숨은 것이 무엇이든 내 이름을 더 많이 퍼뜨려서는 안 됐다. 그리고 수첩에 적었다.
‘유사 서명 ≠ 동일 행위. 수신 알림 ≠ 인수. 인수 ≠ 내용 승인.’
세 문장을 적고 나니 조금 우스웠다. 평생의 진실이 간단한 부등식 세 개로 설명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 이 세 개를 무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면, 그 무지가 사람이 다칠 만큼 큰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제155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