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이 받았다는 문서에는 서명이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서명이 없어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스템을 알고 있었다. 2027년 3월 27일 토요일 오전, 나는 150화 끝에 적은 세 문장을 다시 읽었다. 02-A는 외부 문서보관소 공동 접수 대기열에 도착했다. 배정우가 직접 열람했다는 증거는 없다. 2026년 11월 2일 오후 9시 49분의 대리 인수 이미지는 진본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첫 살인 예고를 받은 오후 10시 16분과 스물일곱 분 차이가 계속 맴돌았다. 누가 미래의 사건을 스물일곱 분 먼저 알고 있었을까. 나는 수첩에 그 문장을 쓰려다가 줄을 그었다. 9시 49분은 아직 사건 발생 시각이 아니라 누군가 내민 화면의 숫자일 뿐이었다.
“계산이 맞으면 안심이 되죠.” 한유리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스물일곱 분이라는 차이가 정확하니까.”
“정확한 숫자가 정확한 사건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대체 뭘 기다리는 거예요?”
“시각의 원본 정의요. 서버에서 일어난 때인지, 대기열에 들어온 때인지, 사람이 화면을 새로고침한 때인지부터요.”
한유리는 노트에 굵게 세 개의 시계를 그렸다. 접수대의 벽시계, 직원 컴퓨터, 중앙 서버. “같은 사진 속에 있어도 각기 다르게 갈 수 있겠네요.”
“맞아요. 그리고 날짜를 보는 곳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일 수도 있죠.”
점심 무렵 오선영에게서 회신이 왔다. 보관업체가 구형 프로그램의 화면 매뉴얼을 제출했다는 내용이었다. 매뉴얼에는 ‘대리 인수 처리’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현물 수령 확인이 아니라 보관 대기열에 도착한 작업을 임시 담당함으로 옮길 때 쓰는 상태였다고 했다. 사람이 파일을 읽지 않아도 생성될 수 있었다.
나는 안도하기보다 긴장했다. 익명 발신자가 완전히 허위인 화면을 만든 게 아니라면, 진짜 항목을 가지고 뜻만 바꾼 것이다. 가장 위험한 거짓말은 사실의 절반을 나눠 주는 방식이었다.
“그럼 21시 49분의 의미가 달라지네요.”
“그럴 수 있어.” 오선영이 말했다. “화면의 숫자는 일단 업체 접수단말 표시 시각으로 적혀 있어. 원본 로그가 같은 날짜 같은 시각을 가리키는지는 아직 대조 중이고.”
“대리 인수라는 단어를 보낸 사람이 매뉴얼도 봤을까요?”
“보냈다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런 질문부터 하면 결론을 정해놓고 찾는 거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선영의 말에는 이런 종류의 친절이 없었다. 다만 틀린 지점이 정확했다.
오후에는 배은정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배정우가 살인 예고를 미리 받고 은폐했다’는 글이 다시 올라왔다는 것이다. 첨부된 화면에는 똑같이 21:49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대리 인수’의 ‘대리’가 지워져 있었다.
“그 사람이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아직 받지 않았다는 것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받았다는 증거로 내놓은 화면이 직접 수신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안 보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화를 내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지칠 만큼 설명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에게 공개 반박을 서두르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허위 글의 원본을 보존하고 정정 신청 경로를 안내했으며, 오선영이 확인한 사항 중 공개 가능한 부분만 전달했다.
“저는 동생이 뭘 했는지 알고 싶어요.” 배은정이 말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지지도 않은 일까지 변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우리가 수사라고 부르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매일 한 번씩 무죄를 설명해야 하는 삶일 수 있다는 걸 그녀가 내게 가르쳤다.
저녁 여섯 시, 한유리가 제보를 하나 가져왔다. 공유된 21:49 이미지에서 숫자 오른쪽 테두리에 작은 물결무늬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합성 흔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회사의 화면 캡처 도구가 축소 저장할 때 남기는 압축 흔적과 비슷하다고 했다. 나는 이미지 자체로는 원본을 특정하지 말자고 했다.
대신 그녀는 보관업체가 공개한 구형 매뉴얼에서 같은 위치의 글자 모양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화면 판본이 바뀌었거나, 이미지 일부만 교체됐거나, 매뉴얼 자체가 다른 버전일 수 있었다. 선택지는 세 개였다. 그녀가 세 개를 그대로 기사 초안에 적는 모습을 보고 나는 조금 웃었다.
오후 일곱 시, 정민규가 보내온 참고자료에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었다. 회사 밖으로 나간 정정 공문에는 ‘전달’이라는 표시가 있었지만, 수신처가 확인했는지 여부는 기관마다 달랐다. 그는 이번에 ‘담당자에게 통화로 안내함’과 ‘공식 문서 열람 확인’을 따로 표시했다. 첫날 임소율의 신상 확인을 회사에 의뢰했던 사람의 손으로 쓰인 문장이라 나는 더 오래 들여다봤다.
“그러면 그때 잘못 전달한 사실도 지워지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아닙니다. 그때 연락한 곳의 목록을 보존해서 추가 유포 경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제 연락 이후였지만 다른 경로일 수도 있다는 점도 써뒀습니다.”
나는 그의 대답에서 미숙한 변명이 아니라 책임을 감수하려는 사람의 느린 성장을 봤다. 그는 조직이 만든 구멍을 막으려면 먼저 자기 이름을 빼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밤이 되기 전에 나는 21시 49분 사진을 출력해 세 칸으로 잘랐다. ‘대리 인수’, ‘처리 시각’, ‘서류번호’. 각각의 의미가 원본에서 증명될 때까지 서로 붙이지 않기로 했다. 세 조각을 떼어 놓으니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예언처럼 보였던 문서가 단지 출처 불명 이미지 세 장이 됐다. 기분이 묘했다. 상대가 무서워서 못 하던 일을 이제는 할 수 있었다.
한유리는 그런 나를 보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단서가 줄어들잖아요.” 나는 종이들을 투명 파일에 하나씩 넣었다. “줄어드는 건 추측입니다. 단서는 원래 있었던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밤 9시 14분. 또 익명 이메일이 도착했다.
‘21:49를 지우면 22:16이 없어집니까?’
나는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받은 이메일의 원본을 다시 열었다. 이메일은 실제로 10시 16분에 내 계정에 들어왔다.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누군가 먼저 어떤 작업을 해놓았다고 해서 그 작업이 살인 예언이 되는 건 아니다.
이어 두 번째 문장이 나타났다.
‘경찰이 시계를 고치는 동안, 누군가는 서류를 가져갔습니다.’
나는 몸을 굳혔다. 보관함의 실제 인출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조급해지길 바라는 말일까.
오선영에게 원본을 전송하고 전화했다. 그녀는 사건 파일을 열기도 전에 말했다.
“이번에는 숫자에 화내지 말고, 보관함이 실제로 비었는지부터 확인하자.”
나는 수첩에 네 번째 문장을 추가했다.
‘21:49는 사람의 수령 시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02-A가 대기열에 도착했다면 그다음 이동 이력은 존재할 수 있다.’
누군가 미래를 훔친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일의 순서를 훔쳐 쓰고 있었다. 그 차이를 알아내기까지 우리는 너무 오래 걸렸다. 나는 그 사실이 분했다. 하지만 분노를 증거로 제출할 수는 없었다.
잠들기 전 박혜림에게서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첫 출근에 필요한 서류를 회사에 직접 확인했다는 평범한 소식이었다. 가짜 면접 안내에 끌려다니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 이름으로 필요한 걸 묻고 있었다. 나는 축하한다고 답했다.
하루 동안 남은 건 새로운 범인 이름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오해를 바로잡았다는 사실, 또 다른 사람이 자기 삶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악역이 그 둘을 계산했다면 오늘은 계산을 틀린 셈이었다.
제15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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