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명란에는 사람의 이름보다 많은 이야기가 남았다.
2027년 3월 26일 금요일, 나는 밤새 받은 자료를 다시 읽었다. ‘대리 보관’ 도장이 찍힌 접수대 사진. 배정우가 남긴 빈 봉투. 02-A와 02-B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생성됐을 가능성. 그리고 내 이름으로 새로 만들어졌다는 신청 번호.
이 네 가지를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하면 멋진 이야기가 나온다. 배정우는 위험한 문서를 받았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맡겼고, 결국 살해됐다. 그다음 내가 같은 문서를 받으며 다음 차례가 됐다. 독자가 원하는 순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여전히 달랐다.
나는 배정우가 문서를 직접 받았는지 모른다. 빈 봉투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02-A가 실제 사건기록인지, 단순한 출력 양식인지 최종 확인되지 않았다. 내 이름의 신청 번호 역시 진본인지 확인 중이다. 이런 빈칸 위에 살인을 올려놓을 수는 없었다.
오전 열 시, 오선영에게 연락이 왔다.
“어제 보낸 접수대 사진, 현장에 있던 물건의 배치가 구형 안내 자료와 맞아. 그렇지만 정확한 촬영 시점은 못 잡았어.”
“수령 칸이 빈 것도 원본일까요?”
“그건 알 수 없지. 사진에서 비어 있다는 사실과 원래부터 비어 있었다는 건 다른 얘기야.”
그녀는 이어서 배정우의 빈 봉투가 수사 자료로 공식 보존됐다고 설명했다. 유족이 임의로 보낸 사진이 아니라 실물을 제출했고, 봉투 표면의 필기와 보관 이력을 확인하고 있었다. 단순한 종이보다 한 단계 믿을 만한 자료가 됐지만,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알려주지 않았다.
“선배. 익명 발신자가 우리를 일부러 배정우 쪽으로 끌고 가는 것 같습니까?”
“그렇게 보이기도 해. 하지만 정작 배정우의 죽음에 관해 확실한 정보가 부족하잖아. 그래서 수사를 분리하고 있어.”
“문서 조작 사건하고 사망 사건을요.”
“응. 어느 지점에서 실제 증거가 만나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서로 관련 있을 것 같은 사건을 분리하는 일은 무능해 보이기 쉽다. 하지만 사람을 붙잡는 데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연결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한 행동의 증거였다.
정오 무렵 한유리에게서 급한 메시지가 왔다. 익명 계정이 이번에는 틀린 자료를 올렸다. 3월 23일 잘못 발송됐던 참고인 질의서의 정정본처럼 보이는 이미지였다. 그런데 문서 번호가 실제 배포된 것과 달랐다. 표의 빈칸에는 원본에는 없는 기관 이름까지 들어 있었다.
“이건 상대가 우리가 가진 걸 전부 알지는 못한다는 뜻일까요?”
“적어도 특정 판본을 모르거나, 일부러 다른 판본을 썼다는 뜻이죠.”
“왜 일부러요?”
“우리가 가짜라고 알아보고 뛰어들게 하려고요. 아니면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한유리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 사람도 실수하네요.”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죠.”
나는 그 말이 조심스러웠다. 우리가 상대를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순간, 그가 보낸 모든 이메일은 예언이 된다. 반대로 상대가 실수했다고 생각해서 방심하면, 그 작은 틈을 이용해 더 큰 일을 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실수를 확인하는 순간에도 증거를 놓치지 않는 일이었다.
오후 두 시, 정민규가 찾아왔다. 그는 참고인 명단이 잘못 전달된 경로를 검토한 결과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유출된 파일과 익명 게시물의 문서 번호가 달랐다. 그리고 익명 게시물은 우리 쪽이 정정한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 자료를 얻는 과정에 지연이 있었을 가능성이 생겼다.
“그럼 경찰 내부에 실시간으로 보는 사람은 없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적어도 이번 이미지로 그걸 증명하진 못합니다.”
그는 수첩에서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제가 예전에는 이름이 빠진 칸을 보고 대충 아는 사람을 써넣었습니다. 나중에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지금은요?”
“확인 중이라고 씁니다. 상사가 싫어해도.”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미 피해를 겪은 사람들이 그의 개선을 감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틀린 이름을 넣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저녁 무렵 오선영이 전화를 했다. 온새문서지원이 제출한 생성표에서 놀라운 점을 찾았다고 했다.
02-A 작업 객체는 실제로 있었다. 그런데 배정우 이름으로 되어 있던 행의 발송 대상 주소가 수신자 개인 주소 형식이 아니었다. 외부 문서 보관소의 공동 접수 대기열을 가리키는 주소였다. 파일이 그 대기열에 들어간 기록까지는 있었다.
“그럼 배정우가 받은 게 아니네요.”
“적어도 본인에게 직접 전송됐다고 볼 기록은 없어. 다만 이후에 누가 대기열에서 꺼냈는지는 확인 중이야.”
“02-B는요?”
“네가 실제로 받은 이메일과 시간 일부가 겹쳐. 동일 객체인지 추가 확인이 필요해.”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배정우가 살인 예고를 받았을 가능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기록은 개인 메일함이 아니라 공동 보관 대기열로 이어졌다. 누군가가 배정우 이름을 표에 넣어놓고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문서를 보이려 했을 수도 있었다.
“그 대기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요?”
“확인된 역할군이 있어. 특정 개인으로 좁히는 건 다음 단계야.”
“여러 사람입니까?”
“여러 계정이야. 계정이 곧 사람은 아니라는 것, 너도 이제 알잖아.”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2025년 8월 25일의 공용 계정 때문에 오랫동안 같은 문제를 겪었다. 작업자의 이름이 없다는 것은 누군가 책임을 피할 구멍이기도 했다.
밤 9시 14분, 또다시 익명 메일이 도착했다.
‘02-A를 읽은 사람을 찾으셨나요?’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뒤이어 짧은 파일이 하나 더 첨부돼 있었다. 그것은 2026년 11월 2일의 공동 접수 대기열에서 출력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었다. 항목에는 ‘대리 인수 처리’라고 적혀 있었다. 수신자 이름은 가려졌고, 처리자는 공용 역할 코드였다.
하지만 사진 오른쪽 아래의 작고 흐린 숫자 하나는 보였다.
21:49.
내가 첫 메일을 받은 밤 10시 16분보다 스물일곱 분 전이었다.
누군가는 내가 메일을 받기 전부터 배정우 명의의 문서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 기록이 진짜라면 사건은 우리가 생각한 순서와 다를 수 있었다.
나는 오선영에게 파일을 전달했다. 그녀는 답장을 보냈다.
‘시각은 서버 기준인지, 표시 시각인지부터 확인하자.’
나는 그 짧은 답을 보고 웃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또 다른 이름을 범인으로 적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수첩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02-A: 공동 접수 대기열 도달 기록. 개인 열람 미확정.’
‘02-B: 실제 수신 메일과 생성 목록의 동일성 추가 확인.’
‘21:49 대리 인수: 진본·기준 시각·실제 처리자 미확정.’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누군가 미래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그러나 누군가 다른 사람의 확인을 대신 눌러 미래처럼 보이는 기록을 만들 수 있었다는 증거는 점점 늘고 있다.’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다음 살인을 예고하는 문장이 오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가 이미 죽은 남자의 이름으로 무엇을 받았다고 처리했는지, 그 작고 오래된 빈칸이 남았다.
범인이 그 빈칸에 숨어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이름을 찾을 것이다. 아니라면 그 빈칸을 이용해 누군가에게 거짓 책임을 넘긴 사람부터 찾아야 했다.
나는 첫날보다 조금 덜 두려웠다. 상대의 모든 말을 믿지 않아도 다음 수를 둘 수 있다는 걸 이제 알고 있었으니까.
제15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