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남은 흔적이 전자파일보다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종이에도 사람의 거짓말이 묻는다. 그러나 어떤 거짓말은 종이를 만들 때 남긴 작은 오차 때문에 들통난다. 그날 나는 그런 오차를 처음 보았다.
2027년 3월 25일 목요일, 오선영은 원효로 사건기록과 관련해 확보한 출력물의 일반적인 특징을 설명했다. 수사 자료의 원본은 내게 보여줄 수 없었지만, 과거 무인 출력점에서 사용한 종이 종류와 결제 방식은 공개 자료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영수증 사진, 결제 금액이 1,800원이었지?” 그녀가 물었다.
“네. 문서 두 부라고 돼 있습니다.”
“그걸로 사건기록을 출력했다고 단정할 순 없어. 그래도 그 시기 업체들이 쓰던 소액 결제 규칙과는 비교할 수 있어.”
나는 한유리와 무인 출력점의 공개 요금표를 확인했다. 흑백 출력, 컬러 출력, 양면 인쇄마다 금액이 달랐다. 1,800원으로 두 부를 출력했는지, 종이 몇 장이 나왔는지 계산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행사 할인과 기본 결제 금액까지 있었다.
“무의미한 사진이네요.” 한유리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이번에는 사진 말고 영수증의 글자 배치가 이상합니다.”
당시 한 체인점은 결제 영수증에 ‘문서 2부’라고 쓰지 않고 ‘작업 2건’이라고 표시했다. 익명 사진은 익숙한 표현을 써서 실제 시스템을 흉내 낸 것일 수 있었다. 다만 가맹점마다 포맷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조작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오후 한 시, 정민규가 지난번 잘못 발송된 질의서의 수신처 확인 결과를 정리해 왔다. 어떤 업체는 문제의 첨부를 삭제했다고 답했고, 다른 업체는 원본을 보존하되 외부 공유를 금지했다고 답했다. 한 곳은 회신하지 않았다. 그곳의 침묵만으로 유출을 확정할 수는 없었다.
“제가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아요.” 정민규가 말했다.
“반복해서 확인하는 게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래도 기록 하나를 잘못 보내면 그때부터는 제가 통제할 수 없잖아요.”
“맞습니다. 그래서 먼저 보내기 전에 확인해야죠. 하지만 이미 보낸 뒤에는 수습을 포기하는 게 더 나쁩니다.”
그는 한참 침묵하다가 물었다.
“선배들은 왜 그런 실수를 그냥 개인 잘못이라고만 하죠?”
“조직의 책임을 따지려면 더 많은 일이 필요하니까요. 교육과 승인 절차, 시스템 설계까지 봐야 하죠. 그렇다고 개인의 실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정민규는 그 말을 메모했다. 그는 이전에 가림 누락을 숨겼다가 여러 사람이 피해를 입는 걸 봤다. 이번에는 후배의 실수를 은폐하지 않았다. 오선영도 보고서에 그 사실을 그대로 올렸다. 조직은 실수를 드러낸 사람을 불편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다음 실수를 막는 자료가 되기도 했다.
오후 네 시, 온새문서지원의 공식 자료에서 02-A라는 표기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수신자 명단이 아니었다. 문서 작업 형식의 번호였다. 구형 전자 인쇄 모듈에서 원본과 안내용 사본을 구분하는 값이었다.
“그럼 배정우에게 간 02-A가 원본일까요?” 한유리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 파일에 같은 정의가 적용됐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또 확인인가요?”
“서로 다른 시스템이 같은 코드를 쓰는 경우가 많아요. 그 점을 이용하면 누구나 근사한 음모론을 만들 수 있죠.”
하지만 이번에는 실제로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 오선영이 02-A의 생성 이력 가운데 일부를 공식 보관자료와 일치시켰다는 것이다. 파일 이름과 생성 단말의 버전 정보가 맞았다. 수신자별 목록의 모든 행이 진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적어도 누군가 무에서 모든 숫자를 만든 것만은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
“생성은 확인됐습니까?”
“일부 작업 객체는 확인했어. 그런데 원본과 사본이 혼재돼 있고, 배정우에게 실제 전달됐다는 기록은 아직 없어.”
나는 적어두었다. 진짜 기록의 일부를 가져와 거짓 주장을 붙이면, 전부 거짓인 것보다 훨씬 구별하기 어렵다. 상대가 이런 방식을 쓴다면 가장 위험한 순간은 우리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나머지도 믿어버릴 때다.
오후에는 무인 출력점 영수증에 관한 제보가 하나 더 도착했다. 누군가 ‘1,800원’이라는 숫자가 사건의 열쇠라고 주장하며 카드 거래 내역이 찍힌 사진을 보낸 것이었다. 나는 보낸 사람에게 추가 자료를 요청하지 않았다. 카드번호 일부라도 실제 개인의 금융 정보를 포함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결제 기록을 확보할 권한이 내게 없었다.
대신 오선영에게 원본 제보를 전달하고 사적 추적은 하지 않았다.
“왜 안 알아봅니까?” 한유리가 물었다.
“결제자를 찾아내도 그 사람이 어떤 문서를 출력했는지는 별개입니다. 정보를 받는 과정이 위법해지면 진짜 단서도 쓸 수 없게 됩니다.”
“그럼 누가 익명으로 보냈는지는요?”
“그건 수사기관이 정식으로 확인해야죠.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숫자의 의미를 과대평가하지 않는 겁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전 취재 노트를 뒤적였다. 2026년 11월 당시 원효로 건물의 경비원 김동식은 15만 원을 받았고, 2025년 출력실 임시 정산에도 15만 원이 있었다. 숫자만 같다는 이유로 두 사건이 연결된다는 글이 한때 퍼졌었다.
“사람들은 같은 숫자를 좋아하네요.” 그녀가 말했다.
“같은 숫자로 이야기를 만들기 편하니까요.”
우리는 1,800원 옆에 적었다. ‘거래와 사건기록의 연결 미확인.’ 그리고 15만 원을 받은 경비원의 실제 부정행위는 따로 기록했다. 부정이 사실인 사람에게는 그 부정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다른 범죄까지 얹는 것은 진실을 흐리는 일이다.
한유리는 새로운 기사 초안에서 액수를 앞세운 제목을 지웠다. 그리고 자료가 언제, 누구에게서, 어떤 과정으로 확인됐는지를 먼저 썼다. 그 기사는 금방 많은 사람에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잘못된 숫자가 다른 사람의 이름에 붙는 일을 한 번쯤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날 오후 정민규는 02-A라는 코드가 두 종류의 문서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나는 2025년 회계 검토 분류표, 다른 하나는 구형 출력 모듈. 숫자가 같다는 사실은 출처를 증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 내용을 새로운 복선 목록에 따로 표시했다. 범인을 찾아가기 전에 잘못된 길부터 지우는 일. 이제는 그게 내 수사의 절반이었다.
저녁에 배은정이 오선영에게 오래된 봉투 한 장을 제출했다는 소식이 왔다. 배정우가 사망하기 전에 서랍에 넣어두었던 것이라고 했다. 겉면에는 수신자 이름이 없었고, 옆에는 ‘보관용’이라는 글씨만 있었다. 봉투 안에는 종이 한 장도 없었다. 내부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봉투를 범행 단서로 단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종이로 전달됐다고 주장하는 02-A와 빈 봉투 사이에 연결이 있는지는 확인할 가치가 있었다.
밤 9시 14분, 익명 이메일이 왔다.
‘서 조사관님은 파일이 전송됐는지만 묻습니다. 누군가 가져가도록 맡겨졌는지는 묻지 않으시네요.’
그 아래에는 오래된 서류 접수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접수대 위에 두 개의 빈 서명란이 보였다. 하나는 ‘작성’, 다른 하나는 ‘수령’이었다.
수령 칸은 비어 있었다. 대신 그 위에 아주 작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대리 보관.’
나는 파일을 확대하다가 멈췄다. 이전에 나온 ‘대리 처리자’와 단어가 닮았지만 같은 개념은 아닐 수 있었다. 상대는 또다시 비슷한 두 단어를 이어 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래쪽에 메모가 하나 있었다.
‘원본은 열람 없이 반환될 수 있음.’
나는 오선영에게 보냈다.
그리고 수첩에 한 줄을 남겼다.
‘02-A는 생성됐을 수 있다. 배정우가 읽었다는 증거는 여전히 없다. 누군가는 우리가 그 빈칸을 급히 채우길 바란다.’
제14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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