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환은 요청을 승인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검토 대상으로 올렸다’고 말했다. 많은 조직에서 그런 표현은 편리하다. 누가 일을 시작했는지도, 누가 끝냈는지도 모호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모호한 말을 쓴 사람을 곧바로 범죄자로 볼 수는 없다.
2027년 3월 21일 일요일, 백이준이 공식 답변서를 전달했다. 화진모빌리티는 2025년 8월 21일 오후 6시 12분에 등록된 월말 조회 일정 조정 요청의 작성자를 확인했다고 했다.
요청서를 최초 작성한 사람은 정산관리실의 임시 지원 직원이었다. 이름은 신서아. 오래전에 근무를 마쳤고, 정규직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양식을 입력했다고 설명했다.
나는 백이준에게 물었다.
“지시자 이름은 확인됐습니까?”
“자료에서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운영 회의에서 결정된 일정이라고 합니다.”
“회의록이 있습니까?”
“일정 변경 자체는 남아 있습니다. 다만 참석자의 개별 발언까지 적힌 문서는 없습니다.”
그는 별도의 설명을 덧붙였다. 최명환은 해당 요청서의 검토 담당자로 기재돼 있었다. 그러나 요청 작성 시각에 실제로 문서를 열어봤는지는 독립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변경된 작업 규칙을 승인했다는 기록과도 같지 않았다.
“그럼 누군가 그의 이름을 빌려 쓴 걸 수도 있습니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그 반대도 아직 배제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답을 들으며 생각했다. 법무팀의 신중한 말투는 때로 책임을 피하기 위한 장벽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는 나 역시 같은 원칙이 필요했다. 최명환을 의심하는 마음만으로 그의 지시를 만들어내서는 안 된다.
오후에 임소율이 연락했다.
“그때는 누구나 마감 얘기만 했어요. 저만 신고를 취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같아요.”
“신고를 취소하지 않으셨다는 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월간 보고서에는 철회가 됐던 걸까요?”
“여러 처리 상태를 한 줄로 묶는 과정에서 잘못됐다는 경로가 일부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 오류를 알면서도 유지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저는 그때 잘못 적힌 한 줄 때문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아요.”
그녀의 말이 무거웠다. 회사에서 나왔고, 자기가 신고한 내용이 없던 일이 된 것처럼 취급됐고, 누군가 자신의 이름으로 빚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회계 자료에는 3억 8천만 원이라는 숫자가 떠돌았다. 그중 일부는 대체 처리와 시차 때문에 설명이 가능했고, 설명되지 않은 금액 역시 곧장 횡령액은 아니었다. 그 불확실한 숫자가 사람에게 붙으면 생계가 무너졌다.
나는 임소율에게 이번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돈의 실제 이동과 책임 귀속은 따로 검토해야 한다고. 그녀가 지겹다는 듯 웃었다.
“서 조사관님은 늘 따로 보시네요.”
“다른 걸 하나로 묶으면 가장 약한 사람 이름부터 남습니다.”
한유리는 그날 익명 계정이 올린 새 글을 보존했다. 제목은 ‘최명환, 월말 사태 최종 승인’. 그런데 원본 요청서에는 ‘검토 담당’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두 단어의 차이는 커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 사이에 ‘승인’이라는 말을 얹으면, 기사 제목 하나로 결론이 정해졌다.
한유리는 글을 공개적으로 반박하는 대신 해당 게시물의 출처와 원본 여부를 취재했다. 이전에는 급한 질문지를 잘못 보낸 실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질문하기 전에 받을 사람부터 확인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내게 자랑하지 않았다. 조용히 취재 노트를 건넸을 뿐이다.
오후 늦게 신서아가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연락을 받고 정식 회신을 보냈다는 소식이 왔다. 그녀는 업무 요청을 입력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입력한 문서가 어느 날부터 승인 지시처럼 해석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았다. 요청 작성자의 구체적인 진술은 담당 수사관이 정해진 절차로 확인해야 했다. 대신 공개적으로 퍼진 화면을 살폈다. 원본 요청서의 ‘작성자’ 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일정 등록’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유통된 이미지에는 그 부분이 잘려 있었다.
‘작성’과 ‘승인’의 차이는 이제 거의 모든 피해자의 이름 옆에 있었다. 권다정은 접수만 했다고 했고, 박혜림은 문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김주하는 출력물 앞장만 받았다고 했으며, 배정우는 무엇을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채 죽었다. 그 사이에서 서류에는 완료라는 말만 남았다.
한유리가 물었다.
“누가 잘랐는지 알 수 있나요?”
“원본 이미지와 첫 유통본의 생성 시각을 추적해야 합니다. 제가 자른 사람 이름부터 쓰면 바로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겁니다.”
그녀는 노트북을 닫고 의자를 내 쪽으로 돌렸다.
“그러면 이 사건은 서류의 말뜻을 고치는 이야기로 끝날까요?”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건 따로 밝혀야죠. 다만 잘못된 서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먼저 범인으로 몰리지 않게 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나는 배정우가 처음 용의자로 적힌 사건기록을 떠올렸다. 그 문서가 없었다면 경찰은 어떤 순서로 움직였을까. 임소율을 보호하는 일은 늦어졌을 수도 있다. 반대로 배정우의 행적을 다른 시선으로 봤을 수도 있었다. 둘 중 무엇이 실제로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
문서 하나가 사람을 보호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 모순을 이용한 상대를 찾으려면 문서가 옳았는지, 틀렸는지만으로는 부족했다. 누가 언제 그것을 읽고 행동했는지, 그 행동이 누구에게 전달됐는지까지 이어서 봐야 했다.
그날 오후 마지막 연락은 권다정에게서 왔다. 정정 심사 결과가 아직 없다는 짧은 메시지였다. 그녀는 기다리는 동안 다른 회사에 지원했다고 했다. 나는 결과를 물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 응원한다는 한 문장만 보냈다. 타인의 생계가 내 수사의 다음 단서가 되어서는 안 됐다.
밤이 됐을 때 오선영이 전화했다.
“운영 요청과 실제 경고 하향의 사이에 승인 토큰 발급 기록이 남아 있어.”
“누구 이름입니까?”
“사람 이름이 아니라 임시 역할 코드야. 업무 지원 계정에 잠깐 부여되는 권한이야.”
“언제 발급됐습니까?”
“8월 25일 오전 9시 37분 전후.”
나는 펜을 멈췄다. 9시 38분 자동 분류 질의보다 먼저였다. 하지만 자동 질의와 권한 발급이 직접 연결됐는지 알 수는 없었다. 일반 마감 작업을 위한 임시 권한일 가능성도 있었다.
“발급한 사람은요?”
“역할 관리 시스템이야. 요청 등록자와 승인자는 별도 기록을 찾아야 해.”
“그 임시 역할로 경고를 낮출 수 있었습니까?”
“당시 설정상 가능했을 수 있어. 하지만 토큰이 발급됐다고 실제로 썼다는 뜻은 아니야.”
나는 시간을 적었다. 09:29 업무 요청. 09:37 임시 역할 발급. 09:38 자동 분류 질의. 09:40:52 두 번째 페이지 호출. 09:41 인쇄 오류. 09:42 재인쇄 취소. 09:43 경고 하향.
시간이 이렇게 정렬되자 모든 사건이 하나의 사람 손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바로 그 착각을 경계했다. 일곱 개의 행위는 일곱 개의 주체일 수도 있었다.
오선영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토큰이 발급된 이유가 적힌 원본 신청서가 하나 더 있어. 업체가 보존 기간이 지난 자료를 백업에서 찾았대.”
“내용은요?”
“‘검토 공백 시 긴급 일괄 처리 예외’. 하지만 사유란이 비어 있어.”
“사유가 비었는데 발급됐습니까?”
“그걸 확인하고 있어.”
나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이유를 적지 않은 긴급 예외. 그것은 실수일 수도 있었고, 업무를 서두른 사람의 게으름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했던 빈칸일 수 있었다.
제14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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