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으로 된 확인서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등기가 아니었다. 화진모빌리티의 법무 대응 창구에서 발송한 공식 질의서에 첨부돼 있었다. 2027년 3월 9일 오전, 백이준이 내게 전화해 자신이 서명을 진짜라고 인정한 것이 아니라고 먼저 설명했다.
“그럼 왜 보내셨습니까?”
“회사가 받은 자료 안에 그게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삭제하면 누군가 나중에 원본을 숨겼다고 하겠죠. 그래서 별도 표기를 해 제출했습니다.”
“무슨 표기요?”
“서진혁의 서명 진위 미확인. 실물 문서 인수 증명 아님.”
나는 잠시 침묵했다. 백이준은 늘 법률 문장 뒤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차가운 태도는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이번에는 그 문장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보내신 파일에 그 문구가 남아 있습니까?”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외부 업체가 받은 사본에는 그 문장이 없다는 겁니다.”
그가 전달한 자료를 보자마자 이해했다. 원본의 오른쪽 아래에 있던 주석이 한 페이지를 출력하는 과정에서 잘렸다. 회사 내부 제출본에는 ‘진위 미확인’이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외부 하청업체로 간 출력물에서는 그 문장만 사라졌다. 누군가 고의로 잘랐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인쇄 여백 설정만 바뀌어도 그런 일이 생긴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종이 한 줄이었고, 남은 것은 내 이름과 서명이었다.
“이미 받은 곳이 있습니까?”
“두 곳입니다. 한 곳은 추가 확인을 요청했고요.”
나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 지난번 가짜 확인서는 온라인 이미지로만 퍼진 줄 알았다. 이제 정상적인 업무 회신 안에 들어가고 있었다. 상대는 경찰이 아니라 업무 시스템을 통해 내 이름을 움직이고 있었다.
오선영은 전화로 내 말을 듣고 물었다.
“네가 그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자료를 확보했지?”
“배송 서명은 있습니다. 검토 확인서에는 없습니다.”
“그 두 가지를 같은 자료로 묶지 말고 각각 전달해. 그리고 네 서명이 도용됐다는 판단은 감정 결과에 따라 처리할 거야.”
“외부 업체엔 어떻게 합니까?”
“그건 법무 대응을 통해 정정 문서를 보내게 해. 네가 직접 항의하면 또 목소리 녹음이 돌 수 있어.”
나는 그녀 말대로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자꾸 다른 목소리가 올라왔다. 내가 한 번 더 서명하지 않았다고 말해야만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면, 이미 상대는 조금 이긴 셈이다.
점심에 한유리가 자료를 보여줬다. 배포된 이미지 한 장에는 배송 직원의 수령 확인 화면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 화면은 문서를 발송한 쪽에서도 볼 수 있는 배송 완료 정보의 일부였다. 그것만으로 누가 조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 몰래 내 사무실에 들어와 서명을 훔쳐야만 가능한 범행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택배를 받은 사실을 서류 내용에 동의한 사실로 바꿨어요.” 한유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게 다시 회사의 공식 답변 안에 들어갔죠.”
“기사가 되겠네요.”
“제 이름으로 된 기사보다 시스템이 어떤 문장을 누락했는지를 써주세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떤 걸 쓸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그래도 중요한 차이라는 건 알겠어요.”
그 말에 고맙다는 대답을 했다. 한유리는 내 편이어서 기사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때로는 나를 더 잘 보호했다.
오후 세 시, 정민규의 정정 요청이 한 군데에서 반려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신처에서 원본과 정정본의 서명란이 다르다는 이유로 추가 확인을 요구한 것이다. 그는 급하게 전화를 걸어 직접 설명하려 했다가 멈췄다고 했다.
“예전엔 제가 전화 한 통만 하면 빨리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왜 멈췄습니까?”
“제가 말하면 이번엔 또 기록이 안 남으니까요.”
그가 별도 회신서를 만들었다. 정정 내용이 접수됐는지 확인할 수 있는 번호를 남겼고, 수신자 이름은 최소한으로 적었다. 한나절이 더 걸렸다. 하지만 그 답변은 나중에 누군가 문서를 다른 뜻으로 사용하려 해도 반박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저녁 무렵 백이준이 다시 연락했다. 그는 회사 내부에서 ‘수령 확인’을 ‘검토 동의’로 읽을 수 없다는 법적 검토를 올렸다고 했다. 다만 내부 인력이 그 구분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당신들은 왜 매번 같은 실수를 합니까?” 내가 물었다.
“매번 같은 사람이 한 건 아닙니다.”
“그게 문제를 더 크게 만듭니다.”
그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한 사람에게 교육해도 다른 사람이 똑같은 표를 받는다면 다시 벌어질 수 있죠.”
그 대답이 뜻밖이었다. 백이준에게도 자신이 방어하는 회사의 취약점이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책임과 그가 지금 하는 일을 별도로 기록했다.
한 가지를 더 확인했다. 회사 내부 시스템에는 첨부파일을 다른 분쟁으로 복사할 때 ‘원문 주석 포함’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기본값은 포함이 아니었다. 담당자가 내용을 검토하지 않고 복사했다면 위험한 문장은 그대로 남고 그것을 경고하던 주석만 사라질 수 있었다.
백이준은 이 기능이 원래 보고서를 짧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그에게 기능을 만든 사람이 범죄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주석을 지우는 행동이 현재도 반복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지금은 보완 안내를 보내고 있습니다.”
“보완 안내를 실제로 읽었는지 확인하는 기능은 있습니까?”
그는 잠깐 말이 없었다.
“발송 기록은 있습니다.”
“읽었다는 기록은요?”
“그건… 확인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잠시 같은 문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록을 남기는 시스템이 자기 기록의 의미조차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외부 수신처에서는 주석 없는 사본을 이미 보고 있었다. 나는 바뀐 안내가 모든 사람에게 도착하기 전에 또 다른 사본이 유통될 가능성을 기록했다.
임소율은 문자로 물었다. “제 비용 귀속도 그런 주석 하나 때문에 바뀌었을까요?” 나는 근거 없이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왜 여러 시스템이 별도인지 설명했다. 그녀는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가, “그러면 각각 고쳐야 하겠네요”라고 보냈다.
밤에 또 다른 게시물이 퍼졌다. ‘서진혁 서명 진짜’라는 짧은 제목 아래 내가 배송 확인에 서명하는 장면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영상을 촬영한 것처럼 보였지만 정지 이미지들을 이어놓은 것이었다. 누군가 내 모습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바로 반박문을 올리고 싶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 올라갔다.
그때 박혜림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 조사관님, 그거 올리지 마세요.”
“뭘 말입니까?”
“화가 나서 하나하나 답하면, 상대가 앞으로 어떤 말을 쓰면 되는지 배우더라고요. 제가 그랬거든요.”
그녀가 겪은 시간을 나는 자세히 듣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 해명문도 썼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해명문이 오히려 회사의 거절 사유가 됐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겁니까?”
“아니요. 공식으로 정정하고, 기록을 남기세요. 저도 그렇게 했어요.”
나는 전화를 끊고 반박문을 삭제했다. 법적 대응과 자료 보존, 발송처 정정은 계속했다. 다만 인터넷에서 상대가 정한 질문을 하나하나 받아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한 시간 뒤, 오선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회사 두 곳에 정정 통보 접수. 서명 진위 별도 확인 중.’
그날 처음으로 내 이름이 적힌 종이가 아닌, 내 행동이 기록된 문장을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끝에는 새 문장이 있었다. 외부 수신처 중 한 곳이 이미 내 ‘수령 동의’를 근거로 박혜림의 이의신청 자료를 처리 완료로 묶으려 했다는 것이다. 내 가짜 서명이 다른 사람의 권리까지 접수 종료시키는 데 사용될 뻔했다.
나는 전화기를 오래 들여다봤다. 누군가 내 이름을 훔친 이유가 단순한 조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생겼다.
나는 서명이 왜 위조됐는지 묻는 대신, 그 서명으로 무엇이 다음 단계에 넘어갔는지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제13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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