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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내일의 살인사건이 오늘 접수됐다 · 121화
PAYLUA ORIGINAL · 제121화

121화. 서명이 없는 사람

내일의 살인사건이 오늘 접수됐다 · 3,864자

오프라인 책장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나는 그 빈칸을 세 번째로 확대했다. 2025년 8월 25일 오전 9시 43분. ‘예외 승인, 첨부 2매 중 1매 미확인.’ 그 아래 ‘결재자 서명 없음. 대리 승인 처리.’ 빨간 글씨가 문서의 가운데보다 크게 찍혀 있었다. “빨간색이니까 진실 같죠?” 오선영은 내 사무실 창가에 서서 말했다. 날짜는 2027년 2월 24일. 그녀는 전날 익명 메일에 붙은 사진을 경찰 절차에 따라 보존해뒀다. 내게 보여준 것은 내가 원래 받은 사본이었다. “진실처럼 보이도록 만든 색일 수도 있죠.” “그러니까 색은 빼고 보자.” 우리는 색을 없앤 사본을 나란히 놓았다. 인쇄된 부분과 손글씨 부분은 종이의 각도가 조금 달랐다. 사진을 찍을 때 생긴 왜곡인지, 서로 다른 이미지가 합쳐진 것인지는 전문가의 감정 없이는 알 수 없었다. “서명을 안 한 사람을 찾아달라는 거네.” 내가 말했다. “서명이 없으면 애초에 서명할 사람이 있었는지도 불확실해.” 그녀가 펜으로 표를 세 칸으로 나눴다. 승인 요청. 승인의 실행. 책임을 누구에게 남겼는지. 똑같은 문서 한 장이 세 가지 질문을 뒤섞고 있었다. 나는 사진 오른쪽 가장자리를 보았다. 회색 세로줄 뒤로 글자 한 획이 보였다. ‘중’일 수도 있고 ‘종’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잘랐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카메라 화면의 자동 잘라내기일 수도 있었다. “원본 사진을 보내달라고 해보면 어떨까요?” “그 사람에게 직접 연락해서?” “아니요. 익명 메일에는 답하지 않습니다. 정식 보관된 2025년 작업 요청서를 찾을 겁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새문서지원의 법무 담당에게서 이날 오후 자료 보존에 협조하겠다는 공문이 왔다. 보존 범위에는 유지보수 접수대장, 업무 처리표, 작업자에게 배포한 구형 양식이 들어 있었다. 단, 개별 담당자의 화면에 무엇이 표시됐는지는 원격 시스템 기록만으로 재구성할 수 없다는 단서도 붙어 있었다. 그 한 줄이 중요했다. 화면에 경고가 나타났다는 사실과 특정 사람이 그것을 봤다는 사실은 다르다. 하지만 그 경고를 일부러 못 본 척했다는 책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두 사실 사이의 다리가 필요했다. 나는 지난해 회사 지하 창고에서 본 수많은 인계표를 떠올렸다. 잘못 적힌 날짜 한 글자가 돈을 바꿨고, 읽지 않은 문서의 확인 도장이 누군가의 직장을 바꿨다. 이번에는 비어 있는 서명이 사람의 이름을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오후 두 시, 화진모빌리티의 법무 담당 백이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온새문서지원의 자료 제출 담당자가 아니라고 먼저 정정했다. 화진모빌리티 법무 쪽에 있는 자신이 업체에 무슨 지시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소개된다는 소문 때문이라고 했다. “그 소문은 처음 듣습니다.” “회사 사람들 중 누군가는 듣고 있겠죠. 제 이름은 이 사진 어디에도 없는데 왜 제가 승인자입니까?” “그렇게 단정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단정합니다. 사진이 먼저 돌고, 정정은 나중에 도착하니까.” 나는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박혜림이 겪은 일이 그에게도 일어나고 있었다. 한 사람을 의심한다고 그 사람이 받는 모든 공격을 당연한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 점심 무렵 나는 일부러 사무실 문을 열어두었다. 옆 사무실에서 택배 기사와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직원은 분명히 물건을 받지 못했다고 했고, 기사는 수령인의 이름이 전산에 찍혀 있다고 우겼다.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해졌다. “그때 누가 서명했는데요?” 직원이 물었다. 기사는 단말기를 돌려 보여줬다. 화면에는 반듯한 필체가 아니라 길고 가는 선 하나만 있었다. 출입문 앞에 놓아두고 사진을 찍는 배송이라 서명은 시스템에서 자동 생성된 표시였다고 했다. 직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서 있었다. 그 사소한 소동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서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종류의 행위인지 새삼 느꼈다. 물건이 도착했다고 알려주는 표시와 내용을 검토했다는 의사 표시, 누군가에게 법적 책임을 넘겨주겠다는 결정은 같은 모양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꾸어 쓸 수는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예전 보험사기 조사 수첩을 펼쳤다. 내가 첫 직장에서 실수한 기록이 있었다. 고객이 사고 경위를 확인하려고 체크한 칸을 손해액을 인정한 서명으로 이해해, 보고서에 잘못 적은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객이 이의신청을 한 뒤였다. 선배 조사관은 그때 나를 혼내면서도 보고서를 직접 고쳐 쓰게 했다. 그 기록의 맨 마지막 줄에는 내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확인한 행위의 범위를 넘겨 쓰지 말 것.’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같은 문제 앞에 앉아 있었다. 당시 고객이 잃은 시간을 완전히 돌려준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일을 잊었다면 지금 남의 실수를 비난할 자격도 없을 것이다. 나는 사진의 서명 칸 옆에 ‘확인할 대상: 행위의 종류’라고 적었다. 빈칸의 주인이 누군지를 찾기 전에 그 칸이 원래 어떤 책임을 뜻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선영에게도 그렇게 설명했다. 그녀는 내 옛 실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물었다. “그때 고쳤어?” “공식 정정했습니다. 고객에게도 통보했고요.” “고친 다음에도 고객이 화났겠네.” “네. 화낼 만했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그 부분을 빼먹지 마. 인정하는 것만으로 없어지지 않은 손해가 있잖아.” 그녀는 수사팀 안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고 했다. 담당자가 실제 확인한 범위를 넘어 ‘조치 완료’라고 적으면 다음 사람이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늦더라도 ‘접수’, ‘검토’, ‘전달’, ‘수령’을 각각 쓰도록 했다고 한다. 나는 그 설명에서 대단한 기술보다 더 어려운 것을 보았다. 모두가 바쁜 날에도 구분을 지키는 일이다. 오후 다섯 시, 선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구형 작업 요청서 양식 대조 결과가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익명 사진에 찍힌 양식 번호는 2025년 당시 쓰인 번호와 같았다. 그러나 사진 속 하단의 빨간 글씨는 당시 기본 양식에 없었다. “그럼 조작이네요.” 내가 말하자 선영이 바로 막았다. “기본 양식에 없다고 실무자가 쓰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야. 수기로 적었을 수도 있어.” “반대로 나중에 누군가 얹었을 수도 있고요.” “그래.” 우리는 다시 빈칸으로 돌아왔다.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성급하게 가득 채우지 않기로 했다. 퇴근 무렵 임소율이 전화했다. 자신이 지난해 경고문을 봤다면 왜 서명을 거부한 게 아니라 신고를 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다른 사람의 책임에 대한 증언처럼 사용하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제 신고가 누구를 벌하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확인하지 않은 걸 확인했다고 쓰지 말아달라는 뜻이었죠.”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말이 뒤집히지 않게 해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일을 설명했다. 직접 수사 권한이 없는 내 위치, 이미 제출한 증빙의 출처, 정정된 신고 상태.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알겠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사진을 다시 열었다. 크기를 줄이자 빨간 글씨가 더 도드라졌다. 맨 위의 접수번호와 날짜는 오히려 읽기 어려워졌다. 왜 누군가는 숫자보다 비어 있는 서명을 더 크게 보여주려 할까. 나는 사진의 왼쪽 윗부분을 별도 파일로 떼어 확대했다. ‘작업 결과’ 칸 바로 위에 아주 작게 찍힌 글씨가 보였다. ‘원격지원 종료 09:42.’ 이 문구가 맞다면 적어도 한 가지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지원이 끝난 뒤 9시 43분에 열린 예외 처리 창을 누가, 어떤 단말에서 보고 있었는가. 선영에게 사진 부분을 보냈다. 답장은 짧았다. ‘그것부터 확인하자. 서명할 사람보다 먼저.’ 나는 책상 위의 빈칸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오늘은 사람 이름을 한 명도 찾아내지 못했다. 대신 그 이름을 함부로 써넣지 않아야 할 이유를 하나 더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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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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