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 화요일 오전 아홉 시, 나는 한 장짜리 표를 완성했다.
왼쪽에는 2025년 8월 25일의 작업 시각이 있었다. 9시 29분 요청서 생성. 9시 36분 조건 검토. 9시 41분 마감표 출력. 9시 42분 재인쇄 취소. 9시 43분 경고 하향. 오른쪽에는 확인된 사실과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따로 적었다.
단 하나의 빨간 선으로 이어놓았던 시간을 다섯 개의 점으로 나누는 데 백이십 화가 걸린 셈이었다. 아니, 아직도 완전히 나눈 것은 아니었다.
오선영은 표를 보더니 말했다.
“이제야 취소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네.”
“9시 42분 재인쇄입니다.”
“그걸 이번에야 확인한 이유는?”
“업무 요청번호와 출력 작업번호가 일부 겹쳤습니다. 우리가 이름만 보고 같은 작업으로 생각했고요.”
“익명 발신자가 그 차이를 알고 있었을까?”
“모릅니다. 알고 이용했을 수도, 자기도 헷갈렸을 수도 있습니다.”
정식 확인 자료가 도착했다. `보류_수정_최종_재정정` 파일에 나온 ‘취소 완료’ 도장은 9시 42분 출력 작업의 상태 표시를 잘라낸 이미지와 같은 형태였다. 회사 보존 자료의 요청 상태에는 취소 이력이 없었다. 익명 파일이 전체 요청이 취소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결론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 파일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비슷한 화면을 본 사람이 한 명뿐이라는 증거도 없었다.
점심 무렵 권다정의 진술과 접수 일지가 다시 확인됐다. 그녀가 만든 것은 검토 공백이 있는 요청의 접수번호였다. 조건 검토와 경고 하향은 각각 다른 곳에서 이뤄졌다. 그녀의 이름이 게시물에 노출된 뒤 회사 재취업 면접 제의 하나가 취소됐다는 말도 들었다. 실제 이유가 그 게시물 때문인지는 확인이 필요했지만, 그녀가 겪는 불안은 이미 현실이었다.
“새로운 이름을 찾으면 뭔가 끝날 거라 생각했어요.” 내가 선영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문제가 새로 시작됐습니다.”
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수사관은 이름을 말하기 전에 두 번 확인해야 하지.”
오후 한 시, 김주하가 9시 41분 마감표의 뒷장이 복구됐는지 물었다. 종이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출력 데이터가 두 장이었고 실제 한 장이 미배출됐다는 장치 기록은 확보됐다. 누가 그 뒷장 내용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가 숨긴 게 아니라는 건 확인된 거죠?”
“주하 씨가 숨겼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기계 오류 기록이 그 주장과 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이랑 제가 그 일을 안 했다는 말이 얼마나 달라요?”
“수사에서는 다릅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주하 씨의 고통을 줄여주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후 세 시, 새로운 자료가 들어왔다. 2025년 경고 하향 때 사용된 일괄 실행 프로그램의 관리 기록이었다. 일반 사용자 화면에 나타나지 않던 ‘예외 처리 창’이 9시 43분 직전에 열렸다는 것이다. 예외 창은 자동 절차가 멈출 때 관리자에게 이유를 입력하도록 만들어진 기능이었다. 그 자체는 합법적이고 흔한 유지보수 절차다.
“그럼 관리자가 직접 조작한 겁니까?”
“아직 몰라.” 선영이 말했다. “예외 창이 열렸다는 로그는 있어. 누가 열었고 실제로 어떤 값을 바꿨는지는 추가 자료가 필요해.”
나는 흥분을 눌렀다. 이번에야말로 실제 버튼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예외 창이 열렸다는 것과 경고를 낮춘 사람이 그 화면을 사용했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오후 네 시, 정민규가 새로운 사실을 가져왔다. 예외 처리 창이 열린 직후 일괄 실행 프로그램에는 ‘첨부자료 2매 중 1매 확인’이라는 안내가 남아 있었다. 시스템은 뒷장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누락을 감지한 뒤에도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게 해주는 예외 절차가 있었던 것이다.
“그걸 이용한 사람이 있습니까?”
민규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 기능이 열렸다는 기록만 확인됐습니다. 직접 선택한 사람은 확인 중입니다.”
이제 연결이 달라졌다. 고태원이 종이를 끝까지 확인하지 않은 건 실수였다. 프린터가 한 장을 내보내지 않은 건 기계 오류였다. 김주하가 앞장만 받은 건 실제 전달 결과였다. 그 다음 누군가가 누락 경고를 보고도 승인 절차를 계속했다면, 앞선 실수와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오후 다섯 시, 오선영은 작업 요청서 사진을 받았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우리가 그 파일을 즉시 믿고 누구를 찾아갈지 지켜보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유인하려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실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위험한 사람을 특정하기 전에 새로운 피해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가 이거 처음 받았을 때 떠오른 이름이 있어요.” 내가 말했다.
“누구?”
“고태원. 뒷장을 못 챙긴 사람이니까요.”
“그게 바로 조심해야 할 이유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서에 ‘대리 승인’이라고 쓰였다고 해서 그 대리자가 고태원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고태원이 출력한 종이와 예외 창의 경고가 같은 누락을 가리킨다는 것조차 추가 검증이 필요했다.
선영은 필요한 자료를 항목별로 나눴다. 예외 처리 화면이 실제로 사용됐는지 확인할 서버 기록, 당시 관리 권한을 가진 사람의 범위, 손글씨가 붙은 원본 종이의 보관 경로, 해당 서식이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하나라도 빠지면 서명 없음이라는 문장이 누군가의 범죄를 확정한 것처럼 변할 수 있었다.
정민규는 그 목록을 보고 말했다. “이번엔 네 줄이네요.”
“한 줄로 합치지 마.” 선영이 대답했다.
그는 웃었다. “안 합칩니다. 한 줄로 합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니까요.”
나는 그 대화가 반가웠다. 한 사람이 실수해서 무너진 수사도, 다른 사람의 성실함 때문에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모든 불완전함이 악인에게만 유리한 건 아니다.
밤이 깊어갈 무렵 임소율에게서 마지막 메시지가 왔다. 그녀는 내일 정정된 신고 상태가 반영됐는지 다시 확인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일이 배정우 사망 사건의 범인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생각하다가 그 질문을 거뒀다. 임소율에게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중요한 목적이었다.
나는 익명 발신자의 문장을 다시 읽었다. 왜 취소 기록을 보내줬는지 아느냐고. 내가 이제 아는 것은 그것이 신청 취소가 아니라 출력 취소와 닮았다는 점뿐이었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섞었는지, 다른 사람의 오류를 다시 이용했는지는 여전히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다음으로 확인해야 할 것은 비어 있는 서명란이 아니라, 그 빈칸 때문에 누가 실질적인 책임을 넘겨받았는지였다.
저녁 일곱 시, 임소율은 법률대리인과 함께 과거 문서 귀속 처리에 관한 의견서를 냈다. 그녀의 주장은 간단했다. ‘나는 신고를 철회하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책임을 승인한 적도 없다.’ 한때 두 문장 때문에 살인 예고의 피해자로 지목됐고 회사 기록에선 이상한 비용 책임자가 됐던 사람이었다.
박혜림은 다음 주 면접 결과를 기다렸고, 김주하는 계약 갱신 여부를 아직 듣지 못했다. 배은정은 남동생의 사망 경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건의 해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시계를 보지 않았다.
밤 아홉 시, 한유리가 전화를 걸었다.
“그 예외 창 말이야. 당시 시스템 관리 권한이 있었던 쪽에서 공식적으로 답변할 준비를 한다고 해.”
“누군지 아십니까?”
“사람 이름은 아직 모르겠어. 운영 계정이 외주 업체에서 관리됐다는 말만 확인했어.”
나는 생각했다. 문서의 맨 위에 적힌 책임자는 화진모빌리티였다. 요청번호를 만든 사람은 권다정이었다. 조건 검토에는 윤세한 계정이 남았다. 실행 기록에는 공용 계정이 찍혔다. 그리고 마지막 예외 화면의 운영 권한은 또 다른 업체가 맡았다.
각 단계가 나뉘어 있는 것은 책임을 명확히 하려는 설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서로 확인하지 않은 순간, 그 분리는 악인에게 숨을 곳이 됐다.
전화를 끊고 이메일을 확인했다. 익명 발신자의 새 메시지가 있었다.
‘이제 왜 취소됐다는 기록을 보내드렸는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 밑에 첨부파일이 하나 더 있었다. 이번에는 사건기록도 정정 파일도 아니었다. 2025년 당시 유지보수 업체가 발행한 것으로 보이는 작업 요청서 사진이었다.
맨 아래에 손글씨가 있었다.
‘9:43 예외 승인, 첨부 2매 중 1매 미확인.’
그 아래에는 서명을 할 수 있는 작은 빈칸이 있었다.
빈칸 옆에는 빨간 글씨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결재자 서명 없음. 대리 승인 처리.’
나는 화면을 닫지 않았다. 서명이 없다는 것은 누군가 서명을 피했다는 뜻이 아닐 수도 있다. 대리 승인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뜻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 한 장은 적어도 우리가 다음에 확인할 질문을 바꿔놓았다.
누가 경고를 낮췄는가, 에서.
누가 서명하지 않은 사람의 책임으로 그 결정을 남길 수 있었는가, 로.
제12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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