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수요일, 처음으로 익명 발신자의 계획이 실제 손실을 입었다는 말을 들었다.
오선영은 누군가 붙여놓은 ‘책임 이관 확정’ 화면 때문에 생긴 외부 문의를 정리하고 있었다. 공용 프로그램의 예약 작업과 정식 법적 책임 판정이 다르다는 설명이 공식 경로로 전달됐고, 그 화면을 근거로 한 내부 징계 요청은 더 진행되지 않았다. 징계 요청이 처음부터 적법했는지는 별도 문제였지만, 적어도 익명 게시물이 의도한 압박은 한 갈래에서 막혔다.
“선배 이름이 적힌 예고는 실패한 겁니까?”
“우리가 위험을 줄인 건 맞아. 그렇다고 누가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안다는 뜻은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의 계획을 전지전능하게 생각할 필요도, 우리를 승리자로 그려낼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막아낸 피해와 아직 남은 의혹을 따로 적으면 됐다.
오전 열 시, 정민규가 새로운 대조표를 보냈다. 경찰 내부 자료가 아니라 경찰이 적법하게 확인한 업무 처리 구조의 개요였다. 2025년 8월 25일 9시 29분 요청서 생성, 9시 41분 마감 현황표 출력, 9시 43분 경고 수준 변경. 세 시각이 같은 일처럼 취급되면서 고태원의 이름이 인터넷에 돌았지만, 시스템상 단계는 서로 달랐다.
그리고 새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요청서 생성 화면의 담당 구역은 정산관리실이 아니라 업무지원 공동 접수 구역이었다. 최명환이 해당 업무의 최종 책임자라는 사실은 여전히 중요했지만, 직접 요청서를 만들었다는 증거는 되지 않았다.
“그 구역에서 작업한 사람을 특정했습니까?”
“지금 확인 가능한 범위에서는 한 명이 기록으로 좁혀졌습니다.” 민규가 말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누굽니까?”
“그날 업무지원 공동 접수 근무자로 배치돼 있던 사람입니다. 실명은 수사상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배치 기록만으로 작업자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민규는 예전과 달리 이름을 먼저 내밀지 않았다. 그가 알아낸 것은 ‘누가 작성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그때 그곳에 있어야 했는가’였다. 실제 사람이 작업했다는 증거는 다른 기록에서 찾아야 했다.
점심에 김주하가 경찰에 제출한 진술에서 새 종이 한 장의 흔적이 나왔다. 2025년 8월 25일 9시 41분 고태원이 전달한 마감표에는 두 장이 있어야 했는데, 자신이 받은 것은 앞장뿐이었다는 내용이었다. 뒷장은 검토 담당 병가와 공백을 적은 부분이었다. 김주하는 그때 업무가 몰려 앞장만 보고 정리함에 넣었다고 인정했다.
“김주하가 문서를 숨겼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렇게 말할 증거는 없어. 뒷장이 어디서 빠졌는지 확인 중이야.”
“그럼 앞장만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군요.”
“그렇지. 그리고 누가 그 앞장만 승인 요청에 붙였는지가 중요해.”
나는 누군가가 서류를 일부러 빼돌린 장면을 떠올렸지만 그 상상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대신 ‘전달 전 누락’, ‘전달 후 분실’, ‘제3자의 선별 첨부’라는 세 가능성을 나눴다.
오후 한 시, 임소율에게 기쁜 소식이 왔다. 비용 귀속 재검토 담당자가 ‘신고자 본인이 비용 책임을 승인했다’는 기존 표현을 근거 불충분으로 보류했다는 것이다. 실제 귀속 금액과 최종 처리까지는 갈 길이 멀었지만, 적어도 아무 근거 없이 임소율에게 승인 책임을 돌리는 일은 잠시 멈췄다.
“이제 진짜 끝나는 건가요?”
“아직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이 달라졌습니다.”
임소율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울고 있지 않은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서 조사관님, 처음 그 이메일 왔을 때 저한테 도망가라고 했잖아요.”
“그랬습니다.”
“그때는 왜 제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 실제 장소와 시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요?”
나는 잠깐 생각했다.
“지금은 그 사람이 우리가 무엇을 믿을지 알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오후 세 시, 한유리가 정정 기사를 송고했다. 이번에는 오선영 이름을 미리 사건에 얹어놓은 화면이 어떤 방식으로 책임 판정처럼 유통됐는지, 그리고 그 근거가 실제로 어떤 확인 절차에서 나오지 않았는지를 설명했다. 일부 독자는 시시하다고 했다. 그러나 실명을 지목한 허위 게시물은 추가 공유가 줄었다. 그 감소를 상대의 패배라고 계산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적어도 독자 일부가 다른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오후 다섯 시, 배은정에게서 경찰을 통해 전달된 소식이 있었다. 배정우 차량 열쇠와 관련된 익명 사진은 실제 유족 물건 사진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확인됐다. 열쇠고리의 흠집 위치가 달랐던 것이다. 누군가 일부러 다른 물건을 찍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제3자의 사진을 잘못 가져왔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 사진만으로 배정우 사망 당일 운전자를 특정할 수 없었다.
“그럼 배정우가 죽은 이유는 여전히 모르는 거군요.”
“맞아.” 오선영이 말했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게 수사를 멈추는 건 아니야.”
저녁 일곱 시, 마침내 경찰이 요청서 생성 구역의 별도 업무 승인 기록과 해당일 근무 교대 메모를 연결했다. 그 기록은 당시 요청서 작성 화면에 접근해 문서 번호를 생성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좁혀주는 단서였다. 실사용자 특정에는 추가 확인이 필요했고, 설령 확인돼도 경고 하향의 의도나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이제 한 사람을 찾아갈 수 있게 된 겁니까?”
“확인할 사람을 특정할 근거가 생겼다는 뜻이지.”
오선영은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
“그 사람이 사실대로 말하면 다음 사람을 찾아갈 수 있을 거야. 거짓말을 하면 또 확인해야 하고.”
나는 수첩 한쪽에 2025년 8월 25일 9시 29분이라는 시간을 동그라미 쳤다. 그동안 9시 43분만 바라보다가 이전에 시작된 요청을 놓쳤다. 누군가 최종 버튼을 누르기 전에 이미 서류는 움직이고 있었다.
밤 아홉 시, 새로운 이메일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오선영 이름이 없었다. 대신 짧은 문장과 정정 파일 하나가 첨부돼 있었다.
‘당신이 찾는 9시 29분 요청서는 이미 취소됐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손을 멈췄다. 확인된 업무 기록에는 같은 번호의 요청이 취소된 흔적이 없었다. 발신자가 사실을 알려주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문서를 끼워 넣으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파일을 열어 내용을 믿는 것이 아니라, 원본 접수 기록과 그 파일의 생성 경로를 확인해야 했다.
나는 선영에게 원문 수신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잠시 뒤 답했다.
‘파일 이름은 뭐야?’
나는 그대로 읽어주었다.
‘보류_수정_최종_재정정.’
선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래전 ‘보류_수정_최종’이라는 파일이 공용 접수함에 들어왔고, 누군가 그것을 ‘처리 완료 참고’로 이동시켰다. 이제 누군가 같은 이름에 ‘재정정’이라는 단어를 덧붙여 보내왔다.
“선배. 이걸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해.”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상대는 우리가 9시 29분을 보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또는 우리에게 그 시간을 보라고 처음부터 만들었을 수도 있고.”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처음 받은 살인사건 보고서는 미래를 보여주는 것처럼 생겼다. 이번 파일은 과거를 고쳐주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래의 사건이든 과거의 정정이든, 누군가 서류에 적은 문장을 곧장 사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만든 길로 들어간다.
나는 파일을 원본 그대로 보존했다. 이번에는 서둘러 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수첩에 새 질문을 적었다.
‘누가 취소했는가’가 아니다.
‘취소됐다는 사실을 누가 우리에게 믿게 하려 하는가.’
제11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