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 금요일 오전, 고태원이 내 사무실에 찾아왔다.
약속은 하지 않았다. 문밖에서 오래 서성인 끝에 초인종을 눌렀다고 했다. 나는 먼저 경찰에 제출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면 정식 경로를 이용하라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들어와도 되냐고 물었다.
“제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요.”
나는 상담 목적과 기록 방식부터 설명했다. 그가 자발적으로 내게 말한 것과 경찰에서 진술해야 할 것을 혼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태원은 낡은 업무 수첩을 꺼냈다. 표지에는 2025년이라는 숫자만 적혀 있었다. 8월 25일 페이지에는 세 줄이 있었다. ‘병가, 확인자 부재.’ ‘마감표 재출력.’ ‘김주하에게 용지 전달.’
“이걸 경찰에 냈습니까?”
“사본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방에 들어가서 뭘 했는지는 이거에도 없어요.”
“기억나는 대로만 말씀하세요.”
그가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종이를 찾다가 출력실로 갔어요. 공용 컴퓨터 앞에는 누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고요. 그날 제가 직접 누른 건 마감 현황표를 다시 인쇄하는 버튼이었어요.”
나는 그의 표현을 되물었다.
“어느 컴퓨터에서요?”
“출력실 단말입니다. 승인 요청 컴퓨터가 아니라.”
“두 단말이 붙어 있었습니까?”
“같은 구역이지만 달랐어요.”
그 차이는 중요했다. 기존 기록은 고태원이 공용 업무 구역에 출입했다는 사실만 알려주었다. 지금 그의 설명이 맞다면 출력실에서 종이를 인쇄한 것이고, 9시 43분 승인 하향 실행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반대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인쇄 작업만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는 걸 뒷받침할 수 있습니까?”
“출력 기록이 남았다던데요.”
“그건 수사팀이 확인할 일입니다.”
그는 내 얼굴을 살폈다. 내가 자신을 믿는지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제 말을 안 믿는 거죠?”
“검증할 수 있는 부분과 기억에 의존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그럼 저도 누가 저를 범인이라고 적어놓으면 끝인가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
“박혜림 씨도 그랬습니다. 서류에 적힌 말이 사람을 설명한다고 믿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고태원은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병가 공백을 안 적은 건 맞아요. 겁나서. 그런데 그게 누군가 죽을 일과 연결됐다고 하면, 전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죠?”
“그때 실제로 하신 일을 정확히 말하셔야 합니다. 책임을 피하려고 사실을 덜 말하면 다른 사람이 그 빈칸을 이용합니다.”
그는 돌아갈 때 수첩 원본을 그대로 가져갔다. 나는 사본도 받지 않았다. 이미 경찰에 사본을 냈다는 확인만 했다.
오후 한 시, 오선영이 공식 대조 결과의 일부를 설명했다. 고태원이 말한 ‘마감표 재출력’ 작업은 실제 출력 대기열에 있었다. 시간은 9시 41분. 기기별 기록의 오차를 고려해도 9시 43분의 경고 하향 실행과는 다른 작업이었다.
“그럼 고태원은 결백합니까?”
“그건 아니지.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니니까. 다만 그가 실제로 한 작업 하나는 확인된 거야.”
“이제 그 사람을 범인이라고 쓴 게시물은 근거가 더 약해졌네요.”
“처음부터 약했지.”
잠시 뒤 민규가 나를 찾았다. 고태원이 출력한 마감표에는 ‘검토 진행 중’이라고 표시돼 있었지만, 실제 담당자가 병가로 빠진 칸은 비어 있었다. 그 표가 승인을 재개해도 된다는 자료로 첨부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고태원이 그런 목적으로 출력했는지, 나중에 누가 첨부했는지는 불분명했다.
나는 질문을 바꿨다.
“출력한 종이를 누가 받았습니까?”
“고태원은 김주하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김주하는 받은 건 맞지만 전부가 같은 종이였는지 기억이 흐릿하다고 했어요.”
“그럼 둘의 진술이 겹치는 부분만 남네요.”
“예. 지금은 그게 전부예요.”
민규의 말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 느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오후 다섯 시, 회사가 제출한 또 다른 기록에서 ‘마감 재개 요청서’에 파일 하나가 첨부된 흔적이 발견됐다. 첨부파일 이름에는 마감 현황표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고태원이 출력한 문서와 같은 파일인지 확인하려면 파일 자체의 원본이 필요했다. 제목이 같다는 이유로 같은 문서라고 말할 수 없었다.
오선영은 그 점을 분명하게 했다.
“일단 9시 41분 출력, 9시 43분 경고 하향. 그 두 사건 사이에 연결이 있었는지는 아직 미확정.”
나는 수첩에 줄을 그었다. 눈앞에 나란히 놓인 사실을 곧장 화살표로 연결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날 밤, 익명 메일이 도착했다.
‘고태원 씨가 버튼을 눌렀다고 인정하셨죠?’
오전 열한 시, 오선영은 고태원이 제출한 수첩과 출력 장비 기록의 관계를 별도로 검증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9시 37분과 9시 49분의 두 인쇄 작업을 떠올렸다. 아직 어느 쪽이 취소됐고 어느 쪽이 실제 출력됐는지 완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9시 41분이라는 세 번째 작업이 나온 만큼, 장비별 대기열과 서버 기록을 같은 시간 축에 얹는 일부터 해야 했다.
“고태원 씨 말이 맞다면 김주하가 종이를 받았겠네요.”
“김주하는 받은 기억이 있다고 했지. 그런데 종이 전체가 똑같았는지는 모른다고 했어.”
“서로의 말이 맞는 부분이 조금씩 생기는군요.”
“그렇다고 모르는 부분을 알아서 채워주면 안 돼.”
나는 그 말을 적었다. 사람들의 진술은 서로를 보완할 수도 있지만, 뒤늦게 알려진 말이 기억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가 정보를 먼저 흘릴수록 나중에 맞아떨어지는 진술의 가치는 오히려 줄어들 수 있었다.
오후 두 시, 박혜림의 예전 회사에서 보낸 정정 문서가 다른 수신처에도 제대로 도착했다는 확인이 왔다. 그러나 그녀가 받은 채용 탈락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고태원과 연결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문서 때문에 피해를 봤지만, 그 피해의 원인과 책임자는 별도로 확인해야 했다.
고태원이 보낸 마지막 문자가 다시 떠올랐다. ‘그때는 종이만 가져왔습니다.’
나는 그 문장 옆에 세 가지를 적었다. 종이를 실제로 가져왔는지. 그 종이가 무엇인지. 그 종이가 이후 요청서에 사용됐는지. 같은 문장 속에서도 세 개의 증명이 필요했다.
저녁에 한유리가 전화를 걸었다. 익명 제보자가 자신의 이름을 계속 확인하려 한다고 했다. “제가 고태원을 범인으로 적으면 더 많은 자료를 주겠다는데요.”
“자료를 조건으로 사람을 먼저 지목하라는 겁니까?”
“그렇죠. 그래서 거절했어요.”
그녀는 증거를 더 받는 것보다 증거에 맞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적어도 오늘 그녀는 누군가 마련한 거래를 거절했다.
밤이 되어 선영은 조용히 말했다. “상대가 우리 중 누가 조급해지는지 보는 것 같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고 그 사람을 천재라고 생각하지는 마. 제대로 하지 않은 일을 누군가 알아서 해줄 거라 믿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오래전에 받은 사건기록의 첫 줄을 떠올렸다. 범인은 미래를 안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달려갈 방향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향을 안다고 모든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처음으로 어색함을 느꼈다. 고태원이 인정한 버튼은 출력 버튼이었다. 익명 발신자는 두 버튼을 일부러 같은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또는 정말로 차이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원문을 보존하고 선영에게 전달했다.
고태원이 무슨 버튼을 눌렀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그 버튼의 이름을 바꿔 사람에게 죄를 붙이려 했는지였다.
제10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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