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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87화
PAYLUA ORIGINAL · 제87화

000은 사원번호가 아니다

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3,748자

오프라인 책장
사람이 둘이 되는 회사에서는 이름이 하나인 사람도 위험했다. 도윤의 얼굴을 한 경로 보조가 나타난 뒤부터 모든 시스템이 '누가 원본인지 확인하라'고 외쳤다. 정작 당사자는 창가에서 햇빛이 드는 방향을 찾고 있었다. 바깥을 보고 싶다는 말은 흔한 소원이었다. 이상한 건 그 소원을 업무 오류로 취급하는 건물이었다. 그날 오전 아이 000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서림이 함께 있었고, 아이가 직접 내게 작은 질문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0층 안쪽의 위험이 없을 때만 보호자와 연결하겠다고 답했다. 영상 화면에 회색 후드티가 나타났다. 아이는 여전히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그 선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아저씨, 000은 누구예요?" 그 물음은 조금 난감했다. 팔찌에 써 있던 숫자였으니까. "지금까지 찾은 기록으로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바깥 신고 장치의 번호일 수 있어. 그걸 네 이름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그럼 엄마도 000이야?" "그건 모른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아이는 잠시 화면 바깥을 보았다. 한서림이 아이에게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스스로 말을 이었다. "엄마가 초록 불이 켜지면 기다리래요. 빨간 불이 켜지면 바깥 어른한테 말하래요. 그런데 아무도 없으면?" "그때는 네가 어른 대신 책임질 필요는 없어. 대피하는 쪽으로 가거나 가까운 안전한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면 돼." 아이는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엄마는 퇴근하고 싶어 했어요. 아직도 못 왔어요." 나의 목구멍이 막혔다. 나는 아이에게 어머니의 이름을 물어보려다 멈췄다. 지금 필요한 건 추궁이 아니라 아이가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서림이 옆에서 아이의 물컵을 채워 주었다. "그 파란 선을 그린 사람이 엄마라고 했지?" 나는 조심히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길은 네 게 아니야'라고 했어요. 다 같이 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요." 나는 서윤을 바라봤다. 아이가 직접 보고 들은 말인지, 오래된 설명을 떠올린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실제로 제0 경계를 설계했든, 그 원칙이 아이에게까지 전달됐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었다. 아이의 말을 기술 사양서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적었다. 아이의 그림을 확인하던 한서림이 내게 따로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가 자꾸 출근 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출근해야 하는지, 누가 데리러 오는지 아이는 답하지 못했다. 나는 한서림에게 정확히 알려 달라고 했다. 아이는 이 회사의 직원이 아니고, 지금은 어디에도 출근할 필요가 없다고. 하루 동안 쉬고 음식을 먹고 잠드는 일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설명해 주면 좋겠다고. 한서림은 '이미 그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아이가 믿기 어려워하네요'라고 답했다. 나는 잠시 손을 멈췄다. 어른이 되어서도 퇴사 승인을 못 믿는 사람이 여기 하나 더 있었다. 대화를 마치고 김하린에게 팔찌의 000 표식을 문의했다. 그녀는 1758 외부 신고함의 옛 단말 대장 사본을 보여 주었다. 000부터 017까지의 번호는 사람을 구별하는 대신 신고 장치와 미배정 외부 대기 지점을 표시했다. 000은 '신원 미확인 신고 가능, 응답자 기록 비요구'라는 칸에 들어 있었다. 현장 사용자의 신원은 기록하지 않는 것이 원래 설계였다. "그럼 아이의 팔찌가 왜 이 번호를 갖고 있는 거죠?" "그걸 확인해야 해요. 대장에 없다고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니까." 김하린이 말했다. "이건 공공 장치의 번호이지, 사람의 출생 기록이 아닙니다." 나는 아이를 000 장치의 책임자로 자동 등록하려던 구형 회의 출석부를 다시 살폈다. 어린아이에게 안전 경고의 최종 책임을 주도록 만들어진 잘못된 규칙이었다. 6시 1분 강제 참석은 막았지만, 그 후에도 남아 있던 대기표가 자정마다 재생될 가능성이 있었다. 서윤과 나는 그 자동 연동선을 분리했다. 단말 000의 무기명 신고 기능은 유지했다. 기록을 없애거나 아이의 이름으로 바꾸지 않고, 고용·출석 칸만 비워 두었다. '공석'을 오류로 보는 컴퓨터에게는 공석이 정상일 수 있다는 걸 가르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정하경이라는 글자가 처음 발견되자 김하린은 원본 대장에도 같은 이름이 있는지 확인했다. 대장에는 그 이름과 비슷한 약자가 두 번 나오지만 정확한 필적은 달랐다. 한 번은 음향 장비 검수 칸, 한 번은 외부 배선 인계 칸이었다. 설계자일 수도 있고 시연자가 대신 적은 이름일 수도 있었다. 나는 이름을 억지로 확정하면 아이의 어머니에게 불리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가 얼굴만 같은 두 대표를 한 사람으로 처리하려 했듯, 우리는 이름이 비슷한 두 기록을 한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칸을 별도의 사건으로 남겼다. 그때 옛 18-0 영상 파일에서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여긴 사람 없는 지점이 아닙니다. 이름을 묻지 않아도 신고를 받을 수 있는 지점이에요." 목소리는 0층 회의실 테이프의 화자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인지 자동 음성 생성인지 구별할 원본은 없었다. 민재가 파일 하단의 수정 이력을 가리켰다. [녹음자: 정하경 / 장비 검수 음성 예시].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또 '하림'이라는 호출명과 글자가 겹쳤다. 나는 억지로 가족관계를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가 정하경이라는 이름으로 음성을 등록한 사실 외에는 아직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았다. "혹시 아이 어머니가…" 민재가 말을 꺼냈다. "그 가능성은 열어 두되 아이한테 확인 시험을 하진 말자." 내가 대답했다. "위험 신고 음성을 들려 주면서 엄마 맞냐고 재촉하는 건 폭력일 수도 있어." 한서림은 아이가 비디오 통화를 끊은 뒤 색연필을 꺼내 다시 그림을 그린다고 알려 왔다. 새 그림에는 문이 열여덟 개가 아닌 세 개뿐이었다. 하나는 집, 하나는 쉼터, 마지막은 그냥 빈 공간이었다. 아이가 마지막 문 아래에 적은 말은 간단했다. [사람이 와도 되고 안 와도 돼.] 그 문장이 회의록의 원칙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에게 설계자의 자리를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그 아이가 오늘은 어떤 간식을 먹고 싶어 하는지 물었다. 한서림이 사진을 보내 왔다. 초콜릿 우유였다. 내가 회사에서 일곱 해 동안 배운 모든 자격증보다 지금 그 답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 무렵 경로 보조는 아이가 그렸다는 빈 문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자신이 처음 나왔던 복도가 실제로는 문이 아니라 벽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누가 들어오지 않기로 선택했다면 벽도 길의 일부일까요?" 그의 물음에 나는 한참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빠져나와야 하는 사람의 길을 벽으로 막으면 안 되겠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그림과 자신의 기억을 함부로 연결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말투가 나보다 차분하다고 느꼈다. 역시 대역이라면 내 좋은 점만 복사했나 보다. 아니면 내가 원본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부터 의심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후 세 시, 안전 단말 000에서 새로운 무기명 신고가 들어왔다. [현재 장치 위치: B-0 외부 / 전달 대상: 정하경 / 본인 확인: 미완료.] 동시에 보존 코일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수신함의 메시지는 과거 기록을 재생하고 있었지만 타임스탬프는 현재였다. "이 신고는 지금 누가 보냈죠?" 서윤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장비 위치 확인부터 해야 합니다." 김하린이 답했다. 그리고 메시지 마지막에는 한 줄이 더 있었다. [퇴근길을 찾는 사람은 출근부에 없습니다.] 아이가 그린 마지막 빈 문이 떠올랐다. 그건 던전의 보스방이 아니라, 누군가 출근하지 않고 돌아갈 수 있어야 하는 장소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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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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