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78화
PAYLUA ORIGINAL · 제78화

아이의 그림에 없는 계단

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3,589자

오프라인 책장
아이의 그림에는 열일곱 개의 문과 검은 점, 그리고 파란 선이 있었다. 내가 그 그림을 처음 봤을 때는 숨겨진 비상구 지도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에게 회사 0층의 지도 작성을 기대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한서림은 이름 없는 아이가 쉬고 있는 대기소에서 연락해 왔다. 아이가 다시 그림을 그렸는데 이전 그림과 조금 다르다고 했다. 아이는 우리와 전화로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뜻도 전했다. 나는 먼저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다고 확인했다. "도윤 아저씨." 아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밥 먹었어?" "응. 근데 그 문은 계단이 아니야."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어떤 문?" "내가 파란 선으로 그린 거. 엄마가 거긴 내려가면 안 된댔어. 기다리는 데라고." "기다리는 데?" "누가 와서 전화 받는 데. 길이 무서워지면 불을 켜는 데." 나는 서윤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말한 기다리는 곳은 지금 B 응답자가 묘사한 바깥 수신 자리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그곳을 직접 본 것인지, 엄마에게 들은 설명을 자기 식으로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그림의 검은 점은 뭘 뜻하니?" 내가 물었다. "밤에 불이 꺼졌을 때도 남는 점. 그건 내가 칠했어." "알려 줘서 고마워. 네 엄마 얘기는 말하고 싶을 때만 해도 돼."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전화 너머에서 종이가 사각거렸다. 잠시 뒤 한서림이 통화를 넘겨받아 아이가 쉬고 싶다고 전했다. 우리는 더 묻지 않았다. 아이의 대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서윤은 파란 선의 모양을 외부 신고 장치의 배선도와 비교했다. 둘 사이에 닮은 점이 있었지만 위치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 아이가 그린 그림은 측량도가 아니라 경험의 기억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그림 때문에 아이를 현장으로 데려가지 않는 것이었다. 도원솔루션 B 아래쪽 지도에서 계단처럼 표시됐던 선을 지우고, 대신 '확인되지 않은 외부 신고 경계'라고 수정했다. 우리는 우선 실제 통로를 현장 설비팀과 함께 확인했다. 점검 로봇이 내려간 곳에는 계단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피트 옆 좁은 배관층이 있었다. 사람이 걷기에는 위험했다. 누군가 파란 화살표를 믿고 따라갔다면 끔찍한 사고가 날 수 있었다. "저 그림 덕분에 위험한 길을 막은 셈이네요." 민재가 말했다. "그림이 모든 걸 알아낸 게 아니야." 내가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실제 길을 확인한 사람들이 위험을 막은 거지." 서윤은 현장 점검 사진을 아이에게 보내지 않기로 했다. 아이가 바깥세상을 위험한 복도의 연속으로만 떠올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한서림에게 '파란 선을 따라 이동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안전을 점검 중이다'라는 간단한 설명을 부탁했다.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먼저 물어보라고 했다. 한서림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이는 수학 문제를 풀고 싶어 했다. 숫자 000이 적힌 팔찌를 싫어하느냐는 질문에는 '그건 내 이름 아니잖아'라고 답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거대한 수수께끼인 숫자가 그 아이에게는 그저 귀찮은 꼬리표일 수 있었다. "뭘 좋아한대요?" 민재가 물었다. "색칠이요. 그리고 국수." 내가 대답했다. "회사 조정실이 아니라 진짜 집에서 하면 좋을 텐데." 나는 말을 아꼈다. 아이의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엄마가 정말 돌아오지 못한 상태인지도 아직 몰랐다. 아이가 스스로 말한 것 이상을 우리가 정해서는 안 됐다. 우리끼리 작은 약속도 하나 정했다. 아이가 다음에 그림을 보여 줘도 그걸 회사 자료실로 곧바로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생각은 아이의 것이었다. 위험 신고에 필요한 정보는 별도 안전 기록으로 확인하면 됐다. 민재는 그 말을 듣고 그림에 붙일 제목을 고민하다가, 결국 제목 칸을 비워 두었다. "이름 없다고 잘못된 그림은 아니잖아요." 그 말에 나는 짧게 웃었다. 이곳에서는 빈칸을 남기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 대신 현장에서는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했다. 배관층의 난간이 낮아 위험했으므로 시설팀이 임시 차단대를 설치했고, 안내 화살표가 그곳을 향하지 않도록 독립 표지를 세웠다. 사람 한 명을 빼돌려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사람이 가지 않아야 할 위험을 없앤 것이다. 같은 시간 도원 11층의 비상 호출 보조가 민재와 통화를 원했다. 얼굴이 같은 존재를 만나는 일은 누구에게나 불편할 수 있었다. 민재는 한참 생각하다가 '오늘은 문자만'이라고 말했다. 보조는 그 선택을 받아들였다. 우리 사이에 이름이나 생김새보다 중요한, 새로운 거리가 생기고 있었다. 그러자 B 서버의 안내가 갑자기 바뀌었다. [외부 관찰자 000: 경로 관리자 후보] [일치도 87%] [보호자 대리 지정 요청] 나는 그 창을 보자마자 기록을 격리했다. 아이가 그린 선을 시스템이 인식하고, 아이를 경로 관리자로 지정하려고 한 것이다. 동의도 없고 신원도 확인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어린아이에게 그런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었다. "또 사람이 아니라 그림을 뽑아 놨네." 나는 중얼거렸다. 서윤은 아이에 관한 공개 자료가 인사 서버로 전송되지 않도록 점검했다. 한서림은 아이에게 새로운 조사를 요청하지 않았고, 평소처럼 쉴 수 있게 했다. 우리는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을 아이의 그림에 떠맡기지 않기로 했다. 배만식 소장이 전화로 들어왔다. "배관층 바깥에서 옛 장비 하나를 찾았다. 사람 통로가 아니라고 적혀 있어. 위험 신호 수신용이라고." 그 장비에는 [대피자 이동 불가 / 긴급 호출 수신 유지]라는 표지가 있었다. 0층 시스템이 사람을 엉뚱한 계단으로 보내는 동안, 정작 그 장비는 사람이 이동할 수 없을 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는 장비를 전원에서 뽑지 않았다. 안전 담당자가 기능을 확인한 뒤 독립 회선에 연결해 시험 신호를 보냈다. 대기소에 있던 김하린이 즉시 응답했다. 회신은 회사 인사 명부에 한 글자도 남지 않았다. [경보 전달 확인 / 발신 위치 18-0 인근] "이거면 안쪽 사람도 구조 요청을 할 수 있겠어요." 민재가 말했다. "그렇지만 실제 출구는 아직 찾아야지." 서윤이 답했다. B 내부 응답자에게 새로운 외부 호출 수단을 설명했다. 그는 잠시 조용하더니 물었다. "저도 그 전화로 말해도 됩니까?" "네.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위험을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럼 남아 있는 사람도 밖에 있는 사람한테 말할 수 있네요." 나는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했다. 회사가 사람을 출근시키려던 장소는 원래 연락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남겨 둔 빈자리였다. 누군가가 어떤 출입증을 가지고 있는지보다 지금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가 중요했다. 그때 독립 신고 장치에서 두 개의 호출 신호가 동시에 들어왔다. 하나는 B 안쪽에서 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18번 경계 바깥의 아직 검증되지 않은 단말에서 왔다. 두 번째 신호의 짧은 음성에는 여자의 목소리가 있었다. "안쪽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 그런데 제 출입증은 회사에 없어요." 아이의 어머니일까, 17:58 신고자일까, 전혀 다른 사람일까. 그 어느 것도 아직 말할 수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진짜 사람이 바깥에서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78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7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