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아홉 시에 17시 57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불쾌했다. 퇴사한 회사에서는 시간이 멈추는 것조차 근태 관리의 일부로 느껴졌다. 서류실 벽에서 들린 목소리는 '나간 사람 말고 남아 있는 사람을 세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세라는 건지 설명하지 않았다. 역시 우리 회사 사람다운 말투였다.
“목소리 녹음됐습니까?” 문서윤이 물었다.
정라희가 기기를 확인했다. 파일에는 세 번의 타격음만 남아 있었다. 문장 부분은 파형이 고르지 않았다. 실제 공기 진동이 아니라 각자 귀에 다르게 들린 듯했다. 민재는 '남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남아 있는 문'이라고 들었다고 주장했다. 황 팀장은 아무 말도 못 들었다. 나는 그 차이가 무서웠다. 기록과 기억 중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모를 때 회사는 언제나 원하는 쪽만 골랐다.
“입술 움직이는 영상도 없으니까, 일단 들었다는 사실까지만 적죠.” 서윤이 말했다.
우리는 서류실에서 가져온 기계식 명부를 임시 조사대 위에 펼쳤다. 비슷해 보이는 LEAVE-01 기록이 두 개였다. 하나는 옛 피난 설비의 [퇴출 확인] 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도원솔루션 인사 장부의 [최초 퇴사자]. 같은 코드가 다른 용도로 쓰인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런데 두 장의 날짜는 열한 달이나 차이가 났다. 누군가 처음부터 과거 기록을 회사 장부에 붙여 놓았다.
“실제 17:57은 어느 날짜죠?” 민재가 물었다.
“어제 2026년 10월 31일.” 나는 손가락으로 외부 기계 기록을 짚었다. “하지만 그 시각으로 최초 생성됐다는 것과 그 사건이 그때 시작됐다는 건 별도야.”
우리는 1758 경고 수신기의 시계와 서버실 B의 시계를 대조했다. 둘 사이에는 약 34초의 오차가 있었다. 공공시설 담당 김하린이 종이에 직접 확인한 보정 값을 기록했다. 17:57 첫 기록은 경고 이전인 것이 맞았다. 다만 '어떤 사건이 있었느냐'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때 서버실 밖의 비상등이 켜졌다. [정전 예정]. 도원 11층은 아직 화재 설비를 수리 중이었다. 전산 화면에는 전 층 자동 퇴실 3분이 표시됐다. 배만식 소장이 즉시 실제 분전반 상태를 확인했다. 전원 차단이 아니라 B의 부하 시험 명령이 전 층으로 번지는 중이었다.
“이건 위험해요.” 소장이 말했다. “11층 환기 전원도 같은 묶음에 걸립니다.”
나는 익숙한 인터페이스를 보며 욕이 나올 뻔했다. 7년 전 우리 팀이 만들었던 공통 배치 스크립트와 버튼 배치가 비슷했다. 누군가 오래된 시험 명령을 최신 운영 도구에 억지로 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누가 붙였는지, 언제 붙였는지 지금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수동 분리 가능합니까?”
소장은 배선 지도에 빨간 펜을 그었다. “B 부하만 독립 차단할 수 있어요. 다만 접근 통로에서 다른 출입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서윤이 인근 층에 사람을 보내 실물 문을 확보했고, 나는 소장의 지시에 따라 전산 쪽 자동 재시도 큐를 잠시 멈췄다. 그동안 민재는 11층 작업자들에게 회선 전환을 알렸다. 여럿이 동시에 뛰어다녔지만 무전에서는 서로의 이름을 확인하며 짧게 말하는 규칙을 지켰다.
카운트다운이 0이 되기 직전, 외부 환기 지시등이 꺼졌다 다시 켜졌다. 11층의 실물 공기 흐름이 유지되는 걸 소장이 확인했다. 뒤늦게 화면에는 [정전 완료]라고 떴다. 현장은 멀쩡했다.
“거짓말을 참 당당하게 하네요.” 민재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화면보다 현장 계기를 우선한다.” 내가 대답했다.
그 순간 내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는 이명주였다. 병원 무전실에 머물고 있는 그 이명주인지, 명주 둘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화면에는 둘의 연락처를 혼합한 번호가 떴다.
“어느 명주 씨십니까?” 내가 물었다.
“저도 그걸 묻고 싶었어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말했다. “병원 전송망에 제 예전 목소리로 만든 시험 신호가 반복되거든요. 저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명주 둘도 아니고요.”
그녀가 보내 준 공개 가능한 오류 번호는 LEAVE-01-A였다. 옛 무인 대피 시험의 첫 복사 코드였다. 문제는 B의 원본 기록에서 그 코드가 어떤 사람 이름 바로 아래 적혀 있었다는 점이었다.
[시험 진행 확인자: 성명 비공개]
[대피 대체 표식: LEAVE-01-A]
[시험 결과: 귀환 확인되지 않음]
“원본 기록을 열면 이름이 보이지 않을까요?” 민재가 말했다.
“열 수 있는 권한과 열어도 되는 이유는 다르지.” 서윤이 답했다. “일단 원본을 안전하게 복제 보존하고, 실종 가능성은 실제 수색 절차로 연결해야 해요.”
우리는 B의 봉인을 유지한 채 독립 읽기 장치로 기록 제목과 생성 순서만 확인했다. 장치의 바깥쪽 광학창에는 복사본 파일이 세 장 겹쳐 있었다. 하나는 17:57, 하나는 17:58, 마지막은 18:01. 인사 전산에서는 그 순서가 거꾸로 정렬돼 있었다. 퇴사 완료가 사고 기록보다 먼저였던 것이다.
“역순으로 저장하면 최초 퇴사자가 나갔다고 보이겠네요.” 민재가 말했다.
“그럼 남은 사람이 없는 걸로 처리할 수 있고.”
내가 말하는 동안 복도에 세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났다. 서윤, 민재, 나. 그런데 그림자는 네 개였다. 네 번째 그림자는 우리보다 반 박자 늦게 움직였다. 전등 아래에서 멈춰 서니 그 그림자도 멈췄다. 나는 바닥의 반사 필름이나 가상 투사를 의심했지만, 장갑 끝에서 실제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그림자를 따라갈까요?” 민재가 소곤거렸다.
“영화였으면 당연히 따라가겠지.” 내가 말했다. “그래서 영화 주인공들이 자주 다치는 거야.”
우리는 실물 통로의 안전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대신 시설팀이 그림자 아래 바닥을 조사했다. 보통 콘크리트여야 할 곳에 얇은 금속 격자가 있었다. 실제로는 배수구 덮개였다. 격자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평소엔 하부 설비 점검 통로로 연결되는 자리였다.
카메라를 내려 보내자 작은 패널이 찍혔다. 그 위에는 [B-0 무인 대피 유지구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기계의 일부분이었다. 옛 피난 시험 장치가 도원솔루션 0층 안에 물리적으로 남아 있다는 증거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그 안쪽에서 누군가 적은 연필 글씨도 보였다.
'사람이 없다고 판단하면 문을 닫는다. 그러니 사람이 있는지 모를 때는 문을 열어 둔다.'
문장 아래에는 구형 인터폰 버튼이 있었다. 외부와 전선이 끊겨 있었지만 버튼 위의 빨간 램프는 일정하게 깜빡였다. 우리 모두 같은 것을 보았다. 장비가 살아 있었고 전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배 소장은 위험한 지점의 접근을 통제하고 독립 전원 여부를 조사했다. 그때 반짝이던 네 번째 그림자가 격자 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림자에는 손이 없었는데, 덮개 아래 인터폰에서 사람의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 서윤이 말했다. “스피커가 원래 여기 있었나요?”
배 소장이 고개를 저었다.
스피커에서 뒤섞인 두 목소리가 흘렀다. 하나는 오래된 시험 음성. 다른 하나는 막 잠에서 깬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열일곱 시 오십칠 분. 첫 번째 사람 확인 실패.”
그리고 잠시 뒤, 작은 목소리가 말했다.
“저는 아직 여기 있어요. 그런데 제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나갔어요.”
제6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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