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첫 번째 퇴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참으로 반가웠다. 적어도 이 회사가 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주장할 근거 하나가 줄어들었다. 문제는 진짜 첫 번째가 어디에 있느냐였다. 벽 너머에서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존재가 세 번씩 두드리고 있었다.
“벽을 허물면 안 돼요?” 강민재가 물었다.
“그 벽 뒤에 병원 복도가 연결됐을지, 은행 금고가 연결됐을지 아무도 몰라.” 내가 답했다. “어젯밤에도 화장실 문 열었다가 집하장 냉동실 나왔잖아.”
배만식 소장은 시설 관리 도면을 펼쳤다. 서버실 B의 벽은 방화 구획이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실물 콘크리트지만, 벽을 두드리는 소리의 반사 방향은 도면에 없는 빈 공간이었다. 정라희는 소형 감지기를 안전 점검구에 끼워 온도와 공기 흐름을 측정했다. 사람을 찾는 건 급했지만 장비가 연결되는 선까지 곧장 출입 권한으로 등록하는 함정을 피해야 했다.
“바깥에서 먼저 정보를 찾죠.” 문서윤이 말했다. “예전 시험 당시 입실·퇴실 장부가 있으면...”
“그게 바로 문제예요.” 내가 말을 이었다. “출퇴실 장부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회사 장부 말고 경비 일지 원본을 봐야죠.”
그녀는 내가 모르는 사이 이미 경비실, 설비실, 외부 납품업체에 확인 요청을 해 두었다. 유능한 안전관리자란 위험을 미리 막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유능한 사람을 보며 내가 얼마나 회의만 열고 살았는지 반성한다.
도원솔루션 지하의 오래된 서류 보관실로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벽면에 붙은 사내 표어를 지나갔다. [사람이 자산입니다]. 어제부터 그 문장이 무섭게 느껴졌다. 정말로 사람을 자산 칸에 넣으려 드니까.
서류실에는 황규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일회용 컵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하나는 따뜻한 커피였고 다른 하나는 맹물이었다.
“뭘 마실지 몰라서요.”
“팀장님은 우리가 커피라도 마시면 해결될 줄 알았어요?”
“아뇨. 지금까지 제가 문제를 알면서도 회의로 넘긴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회의실 대신 여기 왔어요.”
나는 맹물을 받았다. 이 회사가 내게 준 것 중 가장 쓸모 있는 혜택일지도 몰랐다.
황 팀장이 가져온 것은 2018년 구형 설비 인수대장이었다. 그해 옛 교통안전 시험장에 설치됐던 기계식 기록 장치 B가 도원 건물의 전신 부지로 이전됐다는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표지에는 '근태용'이 아니라 '야간 무인 대피 기록 보존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첫 번째 퇴사자가 2018년 퇴직한 직원이란 뜻은 아니었다. 그 명부는 아직 제대로 보지 못했다.
원본 장부에서 가장 중요한 칸은 사람이름이 아니었다. [상태 코드 LEAVE-01].
“이걸 퇴사자 일 번으로 읽었군요.” 서윤이 말했다.
“LEAVE면 나간다는 뜻이잖아요.” 민재가 말했다.
“나가다, 떠나다, 휴가, 퇴사. 다 맞아.” 나는 손으로 코드를 짚었다. “이 시스템에는 상황마다 의미가 달랐겠지. 나중에 인사팀으로 넘기며 퇴사로 고정했을 수도 있어.”
명부 아래에 동봉된 기계 설명서를 펼치자, 뜻밖의 그림이 나타났다. 네모난 방 안에 사람 그림이 하나 있었고 밖에는 두 개의 화살표가 표시됐다. 왼쪽은 [피난 유도], 오른쪽은 [퇴출 확인]. 둘은 분명 다른 기능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보라색 펜으로 그 둘을 묶고 [출근 여부]라고 적어 놓았다.
“누가 그렇게 표시했죠?” 서윤이 물었다.
황 팀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펜 끝의 필체가 자기 것과 비슷하다고 인정했지만 언제 그렸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확인되지 않은 필체를 자백처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종이의 제작 일자와 잉크 층을 비교하기로 했다.
그때 서류실 문이 짧게 두드려졌다. 우리가 사용하던 수동 확성기는 여기에 없었다. 그런데 소리는 서버실 앞에서 들렸던 것과 같았다. 똑, 똑, 똑.
민재가 입술을 깨물었다. “따라온 거예요?”
“우릴 따라오는 건지, 같은 장치가 여러 곳에 있는 건지 아직 모르지.”
나는 문을 열지 않고 밖의 실물 인터폰으로 질문했다. “누구세요?”
“배송입니다.”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배송이면 물건 이름 말해 주세요.”
“첫 번째 퇴사자의 마지막 월급.”
나는 서윤을 보았다. 그녀도 처음 듣는 말이라는 표정이었다. 황 팀장은 접수 장부를 확인했지만 오늘 예정된 배송은 없었다. 우리는 시설팀에 현장 출입 기록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고, 서류실 안쪽 안전 공간으로 물러났다.
문 아래로 봉투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바깥쪽에 있는 누구도 실제 인도자로 확인되지 않았다. 더구나 문 아래로 물건을 밀어 넣을 틈은 원래 손가락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구조였다.
[정산 대상: LEAVE-01]
[미지급 품목: 바깥에서 보낸 일 분]
[수령인: 차도윤]
“내가 또 받으라는 건가.” 나는 봉투를 건드리지 않았다.
민재가 장갑을 껴 끼워 넣으려 하자 서윤이 막았다. “먼저 오염이나 위험물이 아닌지 확인해야 해요.”
소장은 전문 장비로 봉투 표면을 확인하고 현장 증거로 봉인했다. 나는 손도 대지 않았다. 우리가 이 봉투를 받아들이는 순간 '첫 퇴사자'의 미지급 월급을 내게 정산했다는 기록이 만들어질지 몰랐다.
문 바깥의 배송원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CCTV에는 서류실 문 앞에 아무도 없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 허공이던 복도 바닥 위에 장화 자국이 세 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발 크기는 어른 것. 방향은 서류실 쪽이 아니라 서버실 B 쪽이었다.
“실제 사람일까요?” 민재가 물었다.
“발자국이 있다고 사람이라고 단정하면 안 돼. 그렇다고 사람이 없다고 단정해도 안 되고.”
나는 말을 끝내고 스스로 답답해졌다. 회사생활 7년 동안 보고서에 '추가 확인 필요'라고 쓰는 사람을 싫어했는데, 어느새 내가 그 문장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서윤은 종이 기록기의 바늘과 서류실 바닥의 자국을 비교했다. 세 장화 자국 사이의 간격은 누군가 걸은 것치곤 지나치게 일정했다. 마치 장화 모양 스탬프를 찍어 놓은 듯했다. 소장은 바닥을 격리하고 실제 발자국이 남기는 압력 흔적을 살폈다. 무늬는 있었지만 신발의 무게가 바닥에 눌린 흔적이 없었다.
황 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옛 시험에는 화재 때 건물에서 못 나간 사람을 표시하려고 사람이 없는 상황도 입력했습니다. 시험용 부재자를 만들어 본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그 부재자 이름이 LEAVE-01입니까?”
“문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실제로 사라졌는지는 모릅니다.”
그가 가져온 마지막 사진에는 퇴실 표시 옆에 빨간 도장이 찍혀 있었다. [대피 완료]. 그런데 사진 뒷면에는 전혀 다른 문장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완료라고 찍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누가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세 장의 발자국 사진을 작은 창에 나란히 띄웠다. 서로 간격이 정확히 같았지만, 종이 기록기가 장치 상태를 바꾸는 순간에만 생겼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발자국이 사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부재자가 기록 속의 사람인지도 아직 말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기록지 맨 위에 적어 두었다.
그때 서류실의 시계가 멈췄다. 정확히 17시 57분을 가리키며.
나는 시계를 뒤집었다. 건전지는 없었다.
“전시용 시계까지 야근하네.”
그 순간 벽 너머에서 다시 세 번 두드렸다. 이번에는 소리 뒤에 아주 작은 말이 따라왔다.
“나간 사람 말고, 남아 있는 사람을 세어.”
제6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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