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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55화
PAYLUA ORIGINAL · 제55화

아이가 그리지 않은 선

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3,543자

오프라인 책장
조정실로 들어갈 때 나는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대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결정하자, 평소에는 그냥 열던 문이 낯설었다. 칠 년 동안 서버실 문을 두드린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대부분 카드 리더기에 출입증을 댔을 뿐이었다. “들어와도 돼요.” 아이는 책상에 색연필 세 개를 줄 세워 놓았다. 파란색, 노란색, 회색. 담요는 무릎 위에 반듯하게 접어 두었다. 옆에는 보호 담당자 한서림이 앉아 있었다. 아이는 한서림에게도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림을 보여 주는 데는 동의했다고 했다. “나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고 들었어.” “아저씨가 길 잃을까 봐요.” “이미 길을 잃었어. 퇴사했는데 회의실로 돌아왔거든.” 아이는 농담을 이해하는 대신 내 뒤에 서 있는 문서윤을 봤다. “그 아줌마는 웃었어요.” 서윤이 기침을 했다. “저 아줌마 아니고, 안전관리팀 문서윤입니다.” “안전관리팀은 길 잃어도 안 돼요?” “길을 잃지 않게 확인하는 사람이죠. 가끔 길을 잃기도 하지만요.” 아이는 작은 도화지를 펼쳤다. 열일곱 개의 네모와 바깥의 동그라미. 처음 본 그림과 닮아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 위로 파란 실처럼 가느다란 선을 덧그리지 않았다. 대신 종이에 투명한 비닐을 한 장 얹었다. 비닐에는 이미 파란 선이 인쇄되어 있었다. “이 선은 내가 그린 게 아니에요.” 나는 손을 뻗다 말았다. “그럼 누가 준 거니?” “엄마가 보여 줬어요. 이걸 보고 다니라고 말한 건 아니에요. 이렇게 생긴 선이 있으면 꼭 사람이 걷는 길은 아니라고 했어요.” 비닐 위의 선은 세 군데에서 건물 네모를 가로질렀다. 도면의 통로라기보다 전선이나 통신선처럼 꺾였다. 제0 경계 바깥을 크게 돌아 다시 17개 건물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한 데가 있니?” “위험하면 어른 부르랬어요. 그리고 그림을 보여 주고 싶으면 내가 골라도 된댔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안내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그림 한 장과 아이가 직접 말한 제한된 기억이었다. 그 밖의 답을 강요할 이유는 없었다. 서윤은 아이가 허락한 비닐의 앞면만 사진으로 남겼다. 뒷면의 메모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비닐을 다시 가방에 넣고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눈이 졸린 듯 반쯤 감겼다. 한서림은 아이의 물과 간식을 챙겼다. 우리는 조정실을 나와 비닐의 선을 제0 경계 설계도와 비교했다. 곧 이상한 점이 보였다. 시설 도면에서 1758 신고 케이블은 건물 외부를 따라가야 했다. 그런데 후대 전산 지도는 선을 열일곱 개 사업장의 중앙 결재선으로 돌려 놓았다. “아이가 그린 게 아니라면 누군가 옛 시설 배선도를 비닐에 복사해 줬겠죠.” 민재가 말했다. “가능성은 있지만 그 비닐의 출처부터 확인해야지.” 배 소장이 현장 시설 기록을 가져왔다. 제0 경계 외부 배선과 색깔이 같았다. 그러나 같은 파란색 선이 다른 설비에도 쓰일 수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가 전기 기술자였다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선이 뜻하는 기능이야.” 나는 말했다. “사람이 걸어야 하는 복도인지, 위험 신고가 지나가는 경로인지.” 비닐의 오른쪽 끝에는 아주 작은 숫자가 있었다. 18-0. 정라희가 집하장에서 구조할 때 들고 있던 시험 상자의 표기와 같았다. 바깥 회선 하나가 중앙 건물 기록의 잘못된 출근 규칙을 피해 움직이도록 설계되었을 가능성이 커졌다. 우리는 남기석과 함께 도원 외벽의 안내판을 살폈다. 오래된 금속 틀 안에 비어 있는 배관이 있었다. 안전 담당자의 허가를 받아 표면만 검사하자 파란 통신선의 흔적이 보였다. 단선된 지점은 누군가 급히 끊은 것처럼 거칠었고, 덧댄 결재용 케이블은 새것이었다. 남기석이 말했다. “저는 이 일을 처음 맡았을 때부터 이 배관을 비워 두라고 배웠어요. 이유는 못 들었습니다.” “비워 둔다고 진짜 아무것도 없진 않겠죠.” “네. 벽 안쪽엔 소방 통신선이 살아 있습니다.” 배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을 함부로 만지면 소방 호출도 끊길 수 있소. 우선 확인만 합시다.” 그때 외벽 전광판에 글자가 나타났다. [외부 관찰자 000이 제0 회의에 참석 동의했습니다.] “거짓말이네요.” 서윤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아이에게는 그런 요청을 한 적도 없었고, 아이가 대답한 적도 없었다. 자동 장부는 아이가 그림의 앞면을 공개하는 것과 회의 참석에 동의하는 것을 같은 일로 처리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 자료를 보여 준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시간까지 빼앗는 구조였다. “비닐 사진을 삭제하면 동의 취소가 될까요?” 민재가 물었다. “그렇게 하면 아이가 준 자료도 잃을 수 있어. 공개 동의와 회의 동의를 다른 칸으로 다시 기록해야 해.” 서윤은 보호 담당자 입회 아래 아이의 실제 발언을 정정 문서로 작성했다. 아이는 앞면의 그림만 보여 주기로 했지 참석이나 이동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동 시스템에서 아이의 신원 추정을 막기 위해 이름도 넣지 않았다. 회의실 전광판이 잠시 흔들렸다. [출석 유효]라는 글자가 꺼졌지만 다른 건물 쪽에서는 동시에 벽면 화살표가 켜졌다. 잘못된 출석 처리 하나가 외부 시설에 실제로 영향을 주고 있었다. 우리는 소방대와 외벽 시설 담당자에게 위험을 전달했다. 전광판을 보는 시민들이 파란 화살표를 진짜 대피 안내로 착각하지 않도록 임시 실물 표지판을 세웠다. 화살표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대피는 밖으로 나와야 했다. “엄마 퇴근길이 왜 회사로 돌아오는 선처럼 그려졌을까요?” 민재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그렇게 해석했을 뿐이야. 아이는 그게 통신선인지 길인지도 확정하지 않았어.” 그 말에 민재는 머쓱하게 웃었다. “형, 퇴사하더니 문서 검토에 더 엄격해졌네요.” “일할 때는 잘못된 요구사항도 일단 구현했으니까. 퇴사하고 나서야 '왜요?'라는 버튼이 생겼지.” 새벽 다섯 시 삼십이 분. 06:01까지 이십구 분이었다. 외벽 통신선의 안쪽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누군가 선을 통해 말하려는 듯했지만 실제 음성인지 장비 진동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문서윤의 무전기에 도원 관리실의 경보가 울렸다. [제0 회의 대리 참석 확정 절차 1차 실패] [2차 대체 규칙: 외부 신고 원본을 참석자로 변경] 이번에는 사람 대신 위험 신고 자체를 직원으로 등록하겠다는 소리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회사는 사람을 직원으로 만드는 데 실패하면 이제 기계까지 채용하려 했다. “그건 됐고.” 내가 말했다. “회의 전에 경고 회로부터 살립시다.” 그때 남기석이 벽 안쪽 도면에서 뜻밖의 문장을 발견했다. [외부 신호 원본 우회로 — 최종 연결점: 제0 회의실 안쪽이 아님] “어디죠?” 그가 도면의 마지막 점을 가리켰다. 도원솔루션 건너편, 한 번도 안전 점검 대상에 넣지 않았던 작은 공공 시설이었다. [구 도원 버스 정류소 지하 환기실] 정류소는 이미 철거돼 버스가 서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바깥 사람의 안전을 지키려는 가장 오래된 장치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묘하게 위로가 됐다. 직장이 끝나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는 뜻처럼 보였으니까. 밖에 있어야 할 신고는 정말 밖의 설비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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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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