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완은 처음부터 내게 묻지 않았다. 제 손에 든 내일 날짜의 출근부를 책상 위에 놓더니 문서윤을 바라봤다.
“제가 이 서류를 찢어도 되나요?”
“당신 것이라면요.” 서윤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회사 기록의 원본이 섞여 있다면 다른 증거가 없어질 수 있어요.”
“그럼 복사본을 만들어 주세요. 제가 찢고 싶은 건 종이가 아니라 이걸로 사람을 부르는 권한이에요.”
그 말에 나는 잠깐 말을 잊었다. 스물넷의 신입 직원은 오늘 한 번도 정식 출근을 하지 않았는데, 우리보다 먼저 퇴사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대학 입학 첫날부터 졸업논문을 쓰는 사람 같았다.
우리는 출근부의 원본을 중립 보관함에 봉인하고 열람용 사본만 꺼냈다. 첫 장에는 2026년 11월 1일 오전 9시, 신입 서지완의 첫 출근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상적인 채용 서류였다면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 장에는 현재 시각보다 앞선 06:01에 제0 회의 ‘수신 대리자’로 지정된 기록이 있었다.
“저는 오전 아홉 시 출근 계약만 했어요.” 지완이 말했다. “여섯 시 회의에 대해선 아무것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출근하기 전이잖아요.” 민재가 거들었다.
“그게 제일 억울해요. 입사도 전에 야근을 시키는 회사는 들었지만, 입사 전에 야간 당직을 내주는 회사는 처음이에요.”
지완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그녀가 물을 마시도록 의자를 밀어 주었다. 마음대로 앉히려 들지는 않았다. 회의실 의자를 둘러싼 일을 겪고 나면 평범한 의자도 조심스럽다.
그녀의 그림자 두 개가 바닥에 비쳤다. 하나는 형광등 방향으로 정상적으로 늘어졌고, 다른 하나는 창문 반대편으로 짧게 움직였다. 서윤은 이미 조사했던 영상 투사 원인을 다시 확인했다. 천장에 달린 회의실 안내 프로젝터에서 시차가 있는 지완의 형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걸 끄면 제 두 번째 그림자가 사라지겠죠?”
“프로젝터 쪽 영상은요. 그런데 출근부의 미래 날짜나 실제 0층 발생까지 설명되는 건 아니에요.”
그녀는 내 설명을 끝까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자기 문제의 전부를 단번에 해결했다고 말하는 걸 듣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지완은 원래 첫 출근을 앞두고 전날 밤 인수인계 자료를 받으러 왔다고 했다. 그때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날짜로 찍힌 출근부가 사물함에 있었고, 자신이 아직 서명하지 않은 교육 이수표에 완료 도장이 찍혀 있었다. 처음에는 전산 착오인 줄 알았지만 도장 아래에 손으로 쓴 짧은 문장을 발견했다고 했다.
“'다음 사람은 오늘의 일을 떠맡지 않아도 된다.' 이런 문장이었어요.”
“누가 썼습니까?”
“모르겠어요. 그런데 글씨가 제 것 같기도 해요.”
나는 그녀가 거짓말하는지 판단하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 필체를 착각할 수도 있고, 누군가 흉내 낼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건 서류가 누구를 움직이려 하는가였다.
문서윤이 출근부의 서버 이력을 대조했다. 첫 출근 예약 자체는 인사팀이 정상 등록한 것이었다. 문제는 10월 31일 밤 공동 운영사 서버가 그 예약을 받아 제0 위험 신고 수신자로 자동 확장했다는 점이었다.
“사람을 찾는 규칙이 아니라 다음 일정 하나를 잡아 온 거네요.” 내가 말했다.
“첫 번째 출근 예정자니까 '다음 사람'으로 인식한 것 같아요.”
지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제가 아니라고 쓰겠습니다.”
“아니라고 써도 다른 사람을 찾을 거예요.”
“그래도 제 이름은 제 거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할 이의서를 작성했다. 회사에 고용될지 말지와 위험 신고를 대신 받을지 말지는 별도 문제라는 문장이었다. 나는 그 옆에 기술 검증 메모만 붙였다. 어느 회사의 관리자도 아닌 내가 그녀의 계약을 취소하거나 대신 승인할 권한은 없었다.
그때 내 휴대전화에 또 ‘내일의 차도윤’ 메일이 들어왔다.
[서지완이 자진 출석을 거부했습니다.]
[차도윤의 퇴사 취소를 승인하면 최종 신고를 발송할 수 있습니다.]
“나더러 재입사하라는 협박을 참 정성스럽게 쓰네.”
지완은 화면을 보고 눈을 좁혔다. “그 메일 문구, 제 출근부 뒤쪽에도 있어요.”
그녀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자 빈 사각형 하나와 숫자가 있었다.
[미래 수신 채널 06:01]
[규칙 발생기: 회의 소집 보조 / 실물 발신 미확인]
“미래에서 날아온 메일이 아니라 회의 소집 보조 프로그램이 만든 예약 문구일 수 있겠군요.” 서윤이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더 나쁜 문제가 남았다. 누가 그 프로그램에 내 이름, 지완의 이름, 아이의 000 팔찌 정보를 넣었는가. 1758의 옛날 원칙을 누가 사람 강제 참석 규칙으로 바꾸었는가.
한편 출근부 사본 뒤에는 예상하지 못한 첨부가 하나 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파란 지그재그 선. 도원 조정실 아이의 그림과 비슷했지만 사본 작성 시각은 아이가 조정실에 들어오기 전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아이가 그린 걸 복사했을 수도 있고, 우연히 비슷한 선일 수도 있어요.” 지완이 먼저 말했다. “저 그림을 보고 아이에게 가서 기억을 캐묻지는 말아 주세요.”
“그럴 생각 없습니다.” 나는 말했다. “이쪽도 사람 하나를 자동 지정해서 답을 얻으려는 장치를 막는 중이니까요.”
지완은 처음으로 편안하게 웃었다. 우리는 그림을 증거물로 남기되 아이와 연결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창밖의 어둠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건물 바깥 거리의 가게 셔터가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요일 새벽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토요일 퇴근이 끝나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다.
서윤의 무전기에서 병원 시설팀의 보고가 들어왔다. 세림종합병원 비상 통로에 다른 건물 계단이 끼어드는 현상이 조금 심해졌다. 위험한 공간의 위치가 지완의 출근부 두 번째 장에 그려진 화살표와 같았다.
“사람을 강제로 불러 오려던 문서가 실제 복도 위치까지 바꾸는 걸까요?” 지완이 물었다.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원인은 몰라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복도 현장 담당자에게 실제 상황을 전해 주세요. 그건 누가 직원인지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녀는 병원 시설팀의 번호를 확인하고 공간 중첩 의심 지점을 알려 주었다. 이름을 밝혔지만 책임을 대신 떠안지는 않았다. 상대는 직접 현장을 확인한 뒤 위험을 격리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제0 경계가 원래 하려던 일에 가까웠다. 누군가 제때 위험을 알리는 것. 그 사람이 오늘 회사에 출근했는지까지 따지지 않는 것.
그때 벽에 나타난 자동 참석표에서 지완의 이름이 회색으로 지워졌다.
[거부 접수 확인]
[다음 참석 후보 자동 조회 중]
“아이 이름도 끌어올 테니 확인은 하지 마세요.” 서윤이 말했다.
우리는 화면을 뒤집었다. 서류 속 회의는 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실제로 길을 찾고 있었다.
그보다 다급한 일이 있었다. 조정실에서 연락이 왔다.
“아이가 직접 보여 주고 싶은 그림이 있다고 합니다. 어른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는 그림이 아니라, 쉬는 곳을 지키기 위한 그림이라고 해요.”
지완은 자신의 휴대전화에 회사 인사팀 연락처를 저장했다. 계약을 유지할지, 출근 첫날에 무엇을 요구할지는 그녀가 결정할 일이었다. 나는 오늘 밤 본 출근부의 오류를 담당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사실관계만 적어 주었다. ‘미래 날짜 서류 소지’라는 이상한 문장 옆에 ‘지원자 본인의 입사·참석 동의와 별도’라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일이 많아질수록 중요한 구분은 더 짧고 분명해야 했다.
나는 서윤을 보았다. 우리가 가도 되는지 먼저 물어봐야 할 차례였다.
제5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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