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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52화
PAYLUA ORIGINAL · 제52화

아직 발신하지 않은 전화

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3,598자

오프라인 책장
공중전화는 이미 철거된 지 오래였다. 지도에 남아 있다는 이유로 유령 같은 수화기를 기대했던 건 아니다. 나는 아무리 판타지에 적응한 퇴사자라도 전화요금은 현실적으로 계산한다. 버스 환승 통로 아래에는 분리수거함과 오래된 벤치, 녹이 슨 시설 점검함이 있었다. 도원솔루션에서 걸어서 십오 분. 건물과 건물 사이로 뜬 파란 안내를 따라오면 세 분이면 닿을 것 같았지만 우리는 실물 보도를 이용했다. 앞서 파란 통로를 무심코 따른 사람이 다른 건물 지하 배관실에 떨어진 일이 있었다. 정라희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집하장에서 구조했던 정비 기사였다. 발목의 붕대를 감은 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점검함을 지키고 있었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가 물었다. “어제 18-0 시험 상자를 맡겼잖아요. 거기 외부 수신함 위치가 이 주소로 나왔어요. 관할 시설팀에 연락하고 왔습니다.” 그녀는 옆에 선 시청 시설 관리 직원의 명찰을 가리켰다. 김하린. 새벽 근무를 넘겨받은 공공 교통시설 안전 담당자였다. 하린은 우선 우리를 통로 바깥 안전선 뒤로 물렸다. “안에 전기가 살아 있습니다. 허가 없이 열거나 건드리면 안 됩니다.” “네. 저 퇴사자라 더더욱 전선은 안 만집니다. 산재 신청할 회사도 없어서요.” 하린은 웃을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 점검함을 열었다. 평범한 단자대 아래 노란 봉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1758 외부 신고 임시 저장 — 미송신 자료 분리] “이게 뭐예요?” 서윤이 물었다. 하린이 파일 목록을 읽었다. “문자·음성·상태 신호를 따로 보관하는 장치예요. 네트워크가 끊겨도 신고를 잃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설명되어 있네요.” 겉의 붉은 표시등이 깜박였다. 세 칸 가운데 첫째는 수신, 둘째는 원본 보관, 셋째는 송신 확인이었다. 앞의 두 칸만 켜져 있었다. ‘신고가 있었다’는 사실과 ‘신고가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다르다는 뜻이었다. “미송신 자료가 있으면 왜 제0 회의에서는 아직 접수되지 않았다고 나오죠?” 민재가 물었다. “기업 협의회 서버는 송신 확인만 읽었을 겁니다.” 내가 대답했다. “수신함에 있던 메시지를 무시하고, 대신 발신자 이름이 들어간 승인서를 기다렸겠죠.” 정라희가 장치 아래 낡은 라벨을 가리켰다. [보낸 사람 성명 불필요. 현장 위치와 위험 종류만 기록.]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병원에서 쓰던 거짓 퇴원 확인표가 떠올랐다. 고장 났다는 신고를 하려면 누군가 직원으로 등록되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하린은 기록을 임의로 열지 않았다. 공공 설비의 신고 원본과 개인정보를 구분하려면 담당자가 입회해야 했다. 우리는 우선 파일의 크기, 수신 시각, 송신 실패 이유만 확인하기로 했다. “수신 건 하나, 음성 데이터 열두 초. 수신 시각 2026년 10월 31일 17시 58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장치 번호 1758과 우연히 같은 시각. 처음에는 숫자가 시간에서 왔다고 생각했지만, 번호판은 훨씬 오래된 것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우연을 운명으로 묶는 일이 아니었다. “전송 실패 사유는요?” “수신자 지정 오류. 안전 신고가 아닌 시설 책임자 채용 알림으로 분류됨.” 민재가 욕을 삼켰다. 이미 여러 번 봤던 오류였다. 그러나 이번 것은 중간에서 막혔다. 도원솔루션의 출근 장부가 입력할 ‘직원 이름’이 없으니 신고 내용을 밖으로 보내지 않은 것이다. “음성은 재생할 수 있습니까?” 하린이 잠시 망설였다. “전부는 안 됩니다. 특정인의 말이 들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다만 실제 위험 여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공개 가능 부분은 소방 담당자와 같이 확인할 수 있어요.” 그때 점검함 뒤쪽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벤치 옆 공사 가림막이 흔들리고 그 안에서 검은 직사각형 구멍이 나타났다. 화면 속 0층 출입문과 닮은 형상이었다. 사람보다 먼저 발자국 모양의 종이 조각들이 통로에 쏟아졌다. “모두 뒤로!” 하린이 외쳤다. 정라희는 다친 발을 끌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실제 경사로 쪽으로 이동했다. 구멍 앞에는 [외부 신고 접수자 출근 완료]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이거 또 사람을 잡으러 온 거죠?” 민재가 말했다. “접수자를 못 찾으니까 가장 가까운 실물 사람을 쓰려는 거겠지.” 우리는 분리수거함을 치워 통로 폭을 확보했다. 소방에 신고한 하린은 위험구역을 통제했고, 버스 기사에게는 승객을 반대편 출구로 안내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록상의 문을 삭제하는 것보다 실제 사람이 종이 조각을 밟고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일이 먼저였다. 검은 구멍은 케이블과 연결된 전광판 위에 겹쳐 있었지만, 가림막 너머 콘크리트가 진짜로 차가워졌다. 손을 대볼 생각은 없었다. 한 발짝 앞의 노란 점자블록까지 순간적으로 회색 카펫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 바닥도 진짜로 변하네요.” 서윤이 낮게 말했다. “네. 그러니까 서류 오류만 고치면 끝난다고 할 수 없는 거예요.” 하린이 가져온 휴대용 안내등을 노란 점자블록 바깥에 놓았다. 전광판 대신 손으로 든 조명을 따라 사람들을 이동시켰다. 그러자 검은 구멍 안의 글자가 바뀌었다. [외부 인원 미배정. 임시 소환 실패.] 사람을 등록하는 데 실패한 거지, 공간의 이상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하린은 현장 폐쇄와 장비 감시를 유지했다. 우리는 점검함의 원본을 지키기 위해 별도 전원만 확인했다. 봉인도 손대지 않았다. 십오 분 뒤 소방 담당자와 공공 설비 관리자가 위험 신고 음성의 첫 부분을 들을 수 있다고 알려 왔다. 옆에는 비식별 처리된 문서가 놓였다. 마른 잡음 사이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 나가려는 사람이 있어요. 안쪽 통로를…” 거기서 끊겼다. 열두 초짜리 파일의 나머지는 개인 정보가 들어 있을 가능성 때문에 당장 열람할 수 없었다. 서윤은 나를 보았다. 아이가 말하던 어머니의 음성이 비슷하다고 말할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눈앞에 없는 사람의 정체를 목소리만으로 맞추려 하지 않았다. 하린이 작은 태그를 들어 보였다. 신고 원본 옆에 있던 데이터였다. [발신 버튼 입력: 확인되지 않음] [접수 경로: 설비 위험 자동 감지] [실물 도움 요청자: 별도 확인 필요] “그러면 사람이 전화를 건 게 아닐 수 있다는 거군요.” 내가 말했다. “맞습니다. 위험을 먼저 감지한 건 장비이고, 누군가 음성을 덧붙였는지는 조사해야 해요.” 집하장의 낡은 금속 상자에서 작은 기계음이 울렸다. 정라희가 품에서 꺼낸 상자의 표시창에도 문장이 떴다. [미전송 마지막 메시지] [재시도 예정: 06:01] [수신자 요구: 개인 서명] 나는 상자를 노려봤다. “아주 잘못 배웠네. 안전 신고가 사람한테 서명받으러 다니면 구조가 늦어져.” 하린이 물었다. “그럼 송신을 끊어야 하나요?” “아니요. 보내야죠. 다만 사람을 직원으로 바꾸는 수신처가 아니라 실제 구조 담당자에게요.” 새벽 다섯 시 십 분. 남은 시간은 쉰한 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원본을 멋대로 재전송하지 않았다. 기록이 원래 무엇을 말했는지, 누군가 현재 위험에 처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 점검함의 두 번째 목록에, 앞선 신고와 전혀 다른 위치가 나타났다. [동일 위험의 미확인 현장: 성하금융센터 서쪽 계단 0.5층] 금융센터에는 설계도에 없는 ‘반 층’이 생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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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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