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가 가까워지자 도원솔루션 로비의 전광판이 다시 켜졌다. 이번엔 직원 생존 숫자 대신 회의실 좌석을 표시했다. 열일곱 개의 의자와 하나의 빈자리.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가 가장 밝게 빛났다.
“아침 여섯 시 일 분 전까지는 저 칸을 채우라는 거겠죠?” 민재가 말했다.
“그렇게 읽히게 만들었겠지.” 나는 그의 손에서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누가 꼭 앉아야 한다는 뜻은 아닐 거야.”
민재는 두 번째로 나타난 자신에 관해 물었다. 그 존재는 현재 별도 대기 구역에서 ‘비상 호출 보조’라는 임시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고, 아직 실제 민재의 주민 정보도 쓰지 않았다.
“형, 그 사람은 저랑 같은 걸까요?”
“모르겠어. 네가 네 이름을 결정할 수 있듯 그 사람도 당장은 자기 호칭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민재는 한참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장난칠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컵을 받아 들며 말했다.
“형이 퇴사한 게 아니었으면 이런 상담도 다 인수인계였을 텐데.”
“퇴사했으니까 무상 상담료 청구할게.”
잠깐 웃음이 났다. 그 소리가 로비에 오래 남았다. 새벽에 남은 사람들이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좋았다.
0층 회의실의 마지막 문서는 도면통 속에 있었다. 원안의 제목은 ‘시설 위험 발생 시 외부 인원 임시 대기와 퇴로 보장 기준’이었다. 무시무시한 회사 이름도, 미처리 업무 괴물도 없었다. 건물에서 누군가 일하다 사고가 나면 직원이든 아니든 나갈 길을 남겨 둬야 한다는 단순한 계획이었다.
“이게 0층을 만들기 위한 설계인가요?” 서윤이 물었다.
“원본에는 0층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나는 문장을 더듬었다. “건물 하나에만 속하지 않는 안전 대기 지점이라고 써 있죠.”
변경 기록을 맞춰 보자 그림이 선명해졌다. 서로 다른 건물의 비상 출입 기록을 한 장부에 모으기 위해 공공 대기 경계를 전산 공간에 겹쳤고, 뒤에 고용 상태와 결재 권한을 같은 식별자로 관리하는 기능을 추가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시스템은 실제 사람을 ‘직원 기록’으로, 안전한 대기를 ‘미완료 업무’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던전과 대역이 생긴 전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물리적으로 벽이 바뀌고 새로운 존재가 나타난 현상은 장부의 오류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원본 도면은 왜 위험한 설계를 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였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업무 종료 후 잔류 위험]이라는 항목에 붉은 밑줄이 있었다.
“직원은 퇴근할 수 있다. 그러나 시설 경고는 다음 담당자에게 인계되기 전까지 유지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을 회사에 묶으라는 게 아니라.” 나는 말했다. “경고를 사람이 없어도 남겨 두라는 뜻이었네.”
안내문을 배포하기 전에 나는 한 줄을 더 쓰려다가 멈췄다. ‘퇴사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그 문장은 나를 위해서는 필요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결정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대신 서윤이 제안한 문장을 넣었다. ‘각자의 퇴근과 이동은 본인이 결정하며, 구조 요청은 근로계약이 아닙니다.’
나는 배포 문서의 마지막 서명란을 보았다. 누가 결재했는지 보이지 않는 [중앙 관리자] 항목 대신 현장 시설 책임자의 안전 확인만 구분했다. 그들은 실제 자기 건물의 점검 결과에만 책임졌다. 열일곱 곳을 한 사람의 서명으로 덮는 일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문장을 별도의 안전 안내로 현장에 배포했다. 개인정보와 참석자 명단을 제외한 공개 가능한 원칙만이었다. 세림병원은 독립 경고 회선을 유지하며 환자 퇴원을 일괄 처리하지 않기로 했다. 금융센터도 시설 위험과 퇴직 장부를 분리했다. 집하장에선 외부 대기자를 직원 명단에 올리지 않도록 임시 절차를 수정했다.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오지 않았다. 회색의 0층 복도는 계속 출입문 사이에 겹쳐졌고, 이름 없는 종이 존재들은 어디로 갈지 모른 채 대기했다. 우리는 문제가 끝났다는 공지를 하지 않았다. 대신 17개 건물마다 실물 안전 담당자와 교대조 연락처를 확인했다. 내 손에는 더 이상 회사 출입증이 없었지만, 남이 부를 수 있는 번호 하나쯤 남겨 둔다고 퇴사가 취소되진 않았다.
회의실의 접이식 의자는 끝내 비워 두었다. 대신 의자 옆에 안내 문구를 설치했다.
‘이 자리는 위험을 신고할 수 있지만, 그 사실만으로 업무와 이름을 넘겨받지 않는 사람을 위한 자리입니다.’
남기석이 의자를 보더니 멋쩍게 말했다.
“처음에 여길 찾았을 땐 반드시 누군가 앉아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사무실에서 빈 의자는 곧 인원 부족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비상구 앞 빈자리는 필요한 공간이죠.”
그때 1758 수신기에서 짧은 신호가 울렸다. 실제 위험 신고였다. 외벽에 남아 있던 센서 하나가 비상 통로의 물리적 잠금 이상을 보고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회의실 마이크 쪽을 봤다. 이번에는 출석부가 열리지 않았다. 경고는 건물 시설 담당자에게 전달됐다. 빈 의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 건은 정상 경로로 갔네요.” 서윤이 말했다.
나는 처음으로 깊게 숨을 쉬었다. 작은 성공이었다. 그러나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네 시 십칠 분이었다. 자동 배포 예정 시각인 여섯 시 일 분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바로 그때 숨겨진 파일 하나가 나타났다. 파일 제목은 ‘최초 설계 회의’가 아니었다.
[제0 경계 제2차 수정 회의]
[보관 대상: 참석하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
[열람 조건: 첫 신고가 다시 도착한 뒤]
“첫 신고가 다시 도착했다는 건가?” 내가 물었다.
1758 수신기의 불빛이 천천히 두 번 깜박였다. 이어 재생 장치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낯선 여자 목소리였다. 가까이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했지만 녹음 시각은 읽히지 않았다.
“여길 0층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여긴 누군가가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할 때 남겨 둔 자리입니다.”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가 이어졌다.
“그리고 제발, 다음 사람을 기다린다는 이유로 지금 있는 사람의 퇴근을 막지 마세요.”
민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형, 저 목소리… 조정실 아이가 말하는 엄마랑 관련이 있을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가 어머니에 대해 했던 말과 비슷한 뜻을 담고 있었지만, 녹음만으로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대신 원본 식별번호와 공개 가능 범위를 확인했다.
음성 파일 아래에는 이상한 두 번째 날짜가 있었다.
[원본 작성 시각: 확인 불가]
[재생 예약 시각: 2026-11-01 06:01]
[참석 예정자: 차도윤]
[출석 동의: 없음]
나는 이마를 문질렀다. 도원솔루션은 기어코 오전 회의에 나를 집어넣으려 했다. 퇴사자에게는 야간수당도 없는데.
그러나 진짜 충격은 그 아래 숨어 있었다.
[제2차 수정 회의의 열여덟 번째 항목]
[장소: 제0 경계 바깥]
[참석 형태: 사람이 아니라 위험 신고]
[상태: 아직 접수되지 않은 마지막 메시지]
나는 오래된 설계도 위에 손가락을 놓았다. 회의실의 열여덟 번째 자리는 사람이 앉는 의자가 아니라, 누군가 건물 밖에서 보낼 수 있는 구조 요청을 위한 자리였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누가 그 자리를 사람 이름으로 바꾸었을까.
그리고 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메시지가 이미 내게 예약되어 있을까.
“서윤 씨.” 내가 말했다. “다음엔 누가 회의실에 들어갈지를 찾는 게 아니겠네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 아직 도움을 청하지 못했는지 찾아야겠어요.”
제5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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