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 삼백열여섯 장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물론 진짜 사직서는 아니었다. 직원들은 종이를 붙잡고 있었지만 손가락을 펴지도 못했다. 눈동자에는 겁이 가득했고, 붉은 창은 모든 사람 머리 위에서 같은 시간까지 숫자를 세고 있었다.
[동시 퇴사 승인까지 02:59:59]
"이 사람들이 직접 신청한 거예요?" 문서윤이 소리쳤다.
검은 셔츠의 임 대표가 양손을 벌렸다. "건물에서 퇴사를 원하지 않는 직원은 없겠죠. 퇴사 의사 확인을 생략하면 처리 속도가 빨라집니다."
사람의 마음을 단순한 버튼으로 만드는 일. 회사도 현실에서 그걸 꽤 잘했다. 다만 여기서는 버튼을 누르면 사람이 사라진다는 차이가 있었다.
"사직서를 내려놓으세요!" 나는 경비원에게 소리쳤다.
"손이 안 떨어져요!" 그가 울먹였다. "우리 집에 딸이 기다리는데…"
그 말과 동시에 종이 위에 작은 검은 점이 생겼다. 점은 서명 칸으로 번지며 경비원의 이름을 스스로 써 내려갔다.
[가족 귀가 요청: 확인]
[퇴사 의사로 환산 중]
"그건 아니잖아!" 나는 외쳤다. "집에 가고 싶은 거지 사라지고 싶은 게 아니잖아!"
붉은 창이 잠깐 흔들렸다. 서명의 첫 획이 끊겼다. 바로 그 순간 배만식 소장이 손잡이 하나를 잡아당겼다. 기계실에서 보던 비상 전원 절체 레버였다. 0층 벽이 진동했고 사직서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배 소장의 얼굴에 땀이 흘렀다. "서너 번은 더 못 해. 이건 잠깐 끊은 거야!"
검은 셔츠가 손뼉을 쳤다.
"놀랍군요. 수작업 개입이라니. 하지만 시스템은 다시 시작할 겁니다."
벽에 새로운 숫자가 떴다. 02:59:12. 카운트다운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세 시간. 직원들의 실제 위치를 알아야 했다. 지금 0층에 서 있는 사람들을 무턱대고 밀고 나가면 통로에서 사고가 날 수 있었다. 나는 문서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사무실에서 늘 쓰던 노란 안전조끼를 꺼내 입었다.
"저는 실제 사람을 찾으러 갑니다." 서윤이 말했다. "그쪽은 이 가짜 복사본들이 뭔지 알아내요."
"혼자서는 안 돼요."
"그러면 강민재 씨, 같이 가요."
민재가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저… 저도 개발자라서 길 찾기는 못하는데요."
"지도는 제가 봅니다. 당신은 무전기를 들고 따라와요."
그녀는 시설본부 문으로 뛰어갔다. 배 소장도 그녀를 따랐다. 나는 순간 혼자가 됐다. 아니, 정확히는 대표이사 둘과 혼자 남았다. 회사에 다닐 때도 이렇게 면담을 자주 받진 않았다.
0층의 복사본 직원들 사이를 지나며 나는 한 가지를 시험했다. 경비원 복사본에게 아까 딸 이야기를 왜 했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는 대답을 망설이더니 딸이 왼쪽 신발 끈을 자꾸 풀어 놓는다고 했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찍었던 사진 이야기도 했다. 너무 상세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기록을 어디서 가져왔어요?" 내가 물었다.
"제 기억이요."
"기억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당신은 기억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그 질문 앞에서 나는 가벼운 농담을 할 수 없었다. 복사본은 진짜 사람일 수도 있었고, 단순히 기억을 복제한 프로그램일 수도 있었다. 그 어느 쪽이든 눈앞에서 도움을 청하는 존재를 가볍게 폐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에게 약속했다. "네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우리 쪽에서 먼저 해치진 않을게요."
그 순간 사직서 끝이 조금 투명해졌다. 경비원은 그걸 보고 자신의 손을 만져 보았다. 자신의 손가락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작게 웃었다.
내 주머니 속에서 작은 무언가가 바스락거렸다. 퇴사할 때 민재가 준 쪽지였다. '감사했습니다'라고 적힌 글씨. 이런 종이는 사람의 마음을 옮기지만, 사람 자체는 아니었다. 나는 그 차이를 끝까지 잊지 않기로 했다.
"차도윤 씨." 첫 번째 임 대표가 입을 열었다. "저쪽에 있는 것이 우리 직원들을 복사했습니다. 진짜 사람들은 각 층에 갇혀 있어요."
"그럼 여기 이 사람들은 뭔데요?"
"퇴사해야 하는 명단. 이름만 빌린 것들입니다."
내가 눈을 돌리자 경비원과 같은 얼굴을 한 복사본은 계속 울고 있었다. 손으로 뺨을 만지는 모습도, 집에 딸이 기다린다고 말하는 목소리도 너무 생생했다.
"그냥 이름만 빌린 거라고요?"
"기록이 감정을 흉내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속지 마세요."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영업 화면을 만드는 프로그램과 달리 사람의 공포를 흉내 낼 기술은 우리 회사에 없었다. 더구나 진짜 직원이 어딘지 확인하기도 전이었다.
검은 셔츠가 나직이 말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저쪽 임 대표의 일입니다. 대신 당신에게도 기회를 드리죠."
그는 테이블 위에 사직서 한 장을 밀었다. 맨 위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직무: 최종 퇴사 확인자]
[권한: 전 직원 일괄 종료]
[보상: 단독 외부 귀환]
"거절하면요?"
"다 함께 종료되는 순간을 보게 됩니다."
나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내 이름 아래 금액이 적혀 있었다. 일곱 해 동안 못 받은 야근 수당보다 훨씬 큰 돈. 평범한 월급쟁이가 던전 안에서도 똑같이 돈으로 유혹받는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도윤 씨가 정말 그걸 받을 겁니까?" 첫 번째 임 대표가 물었다.
"받을 건데요."
그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사직서를 접었다가 다시 펼쳤다. 하단에 작은 글자가 보였다. '종료 대상은 신청 시점 현재 직원 명단.' 그런데 내 사직은 이미 승인됐으니 나는 그 명단의 바깥이었다. 이 사직서의 권한도 조건 없이 내게 주는 게 아니었다.
"이거 복사본이죠?"
검은 셔츠가 침묵했다.
"내 서명 없이 어떻게 모든 직원을 종료해요? 내가 원래 권한자라서가 아니라, 지금 당신들한테 필요한 사람이어서 주는 거잖아."
명단을 따라 훑다가 익숙한 이름이 하나 보였다. 이명주. 여섯 달 전 회사를 떠난 디자이너였다. 그는 이미 퇴사했고 멀리 부산으로 이사까지 갔다. 그런데 복사된 사직서 더미에 그의 이름이 끼어 있었다. 내가 종이를 집어 들자 이름 옆의 글씨가 흔들렸다. [근무 이력 정리 대상].
"퇴사한 사람도 이 안에 있어요?" 내가 검은 셔츠에게 물었다.
"회사에 남은 기록은 회사 소유니까요."
"그건 자료가 남은 거죠. 이 사람이 여기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누군가 내 이름과 기억으로 사람을 만든다면, 그 사람을 안전하게 다루기 위해서라도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아야 했다.
나는 사직서를 찢지 않았다. 대신 벽에 걸린 조그만 비상 전화기 앞으로 걸어갔다. 수화기를 들자 뜻밖에도 진짜 통화음이 들렸다.
"차도윤, 누구한테 전화하겠다는 겁니까?"
"도원솔루션 시설방재실이요. 직원 퇴사 여부를 확인할 곳이 아니라, 실제 피난 인원을 확인할 곳이 필요해서."
전화를 받은 건 문서윤이었다.
"도윤 씨, 큰일이에요."
"무슨 일이에요?"
"실제 인원 명단이 안 맞아요. 우리가 본 직원 수보다 한 사람이 더 있어요."
"누군데요?"
"명단에 이름이 없어요. 그런데 설비실 카메라에 찍혔어요. 손에…"
그녀가 말을 멈췄다. 뒤에서 금속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 손에 사직서 대신 출근부가 있어요. 그리고 도윤 씨, 조심하세요."
"왜요?"
"모든 출근 기록의 시작 날짜가 내일로 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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