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 붙은 '0층'이라는 글자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이 건물 지하에는 주차장과 전기실이 있었다. 0층이라는 건 도면에도 건축물대장에도 없었다. 회사가 월급명세서에 없던 수당도 이렇게 만들어 줬더라면 덜 서운했을 텐데.
문을 열자 사무실 냄새가 났다. 오래된 커피, 고무 매트, 인쇄기 열기. 방의 중앙에는 커다란 회의 테이블 하나가 있었다. 테이블 위로 깨끗한 종이컵 열한 개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방의 양쪽 벽에는 서로 다른 회사 로고가 걸려 있었다. 왼쪽은 우리가 일하던 '도원솔루션'의 푸른 로고, 오른쪽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검은 로고였다.
"도원솔루션 제로 운영본부." 배만식 소장이 낯선 글자를 읽었다. "이런 부서가 있었나?"
"저는 못 들었어요." 민재가 말했다. "회식비 결재도 본 적 없고."
"회식비는 핵심 증거지." 내가 말했다.
방 가운데에 둥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정장 차림 남자가 앉아 있었다. 희끗한 머리, 유난히 반듯한 넥타이, 익숙한 얼굴. 도원솔루션의 대표이사 임현규였다.
"대표님?" 문서윤이 외쳤다.
임 대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손에 든 종이를 계속 넘기고 있었다. 종이에서 피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니 빨간 인주였다. 한 장마다 '최종 승인'이 찍혀 있었다.
다른 의자에도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그 역시 임현규였다.
다만 두 번째 대표이사는 검은 셔츠를 입고 손을 테이블 아래에 숨기고 있었다. 얼굴도 첫 번째와 완전히 같았다. 나는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새로운 외부 담당자 오셨군요." 검은 셔츠가 말했다. "차도윤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뒤로 물러나자 서윤이 내 팔을 잡았다. "저 둘… 뭔가 잘못됐어요."
"저도 대표님을 두 분 모시고 싶진 않았습니다."
검은 셔츠가 웃었다. "둘 중 어느 쪽이 대표인지 알아맞히면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틀리면 여러분의 퇴사 기록은 삭제됩니다."
"이미 퇴사한 건 저뿐인데요."
"그렇다면 나머지는 재직 상태가 유지되겠죠. 아무 문제 없군요."
그의 말에서 섬뜩한 계산을 느꼈다. 회사를 나가는 자유를 포기하면 목숨을 돌려주겠다는 뜻 같았다.
나는 즉시 답하지 않았다. 서윤이 내 귀에 속삭였다. "어느 쪽이 진짜예요?"
"모르죠. 그런데 아는 게 하나 있어요."
"뭔데요?"
"진짜 대표가 두 명일 순 없다는 건요."
"그건 누구나 알잖아요."
"아니요. 우리 회사는 가끔 모르는 것 같아서요."
나는 테이블 둘레를 천천히 돌았다. 첫 번째 대표의 명패에는 '대표이사 임현규'라고 적혀 있었다. 두 번째는 '집행 관리자 임현규'였다. 법적 직함은 하나뿐이지만, 0층은 직함을 사람처럼 복제해 둔 듯했다.
그리고 두 명 모두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테이블 한쪽에는 회사가 설립되던 날 찍은 사진이 세워져 있었다. 젊은 임 대표와 이름 모를 직원 네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보자 사진 속 사람들은 선명하지 않았다. 임 대표를 제외한 사람들의 얼굴은 물감을 닦아낸 것처럼 뭉개져 있었다. 배 소장은 사진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구석을 짚었다.
"여기 우리 첫 번째 시설팀장이야. 내가 입사했을 때 인수인계해 준 사람이지."
"얼굴은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알아요?"
"양복 주머니에 박힌 손바느질 때문이지. 저 사람, 왼손이 불편해서 아내가 늘 단추를 고쳐줬어."
배 소장의 눈이 잠깐 젖었다. 그는 손을 떼려다 멈췄다. 사진의 하얀 부분에 글자가 떠올랐다. [퇴사 처리 완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문장 아래 다른 문장이 생겼다. [존재 확인 불가].
"왜 사람을 이렇게 지워요?" 배 소장이 이를 악물었다.
검은 셔츠는 어깨를 으쓱했다. "중복 자료를 정리하는 것뿐입니다. 과거 자료를 영구 보관하면 저장 공간이 부족하거든요."
"사람이 자료야?" 배 소장이 앞으로 나서자 나는 급히 붙잡았다. 그의 팔은 돌처럼 단단했다. 화내는 것이 정당한 순간에도, 누군가 던전의 규칙을 모르는 채 공격하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첫 번째 임 대표의 볼에 작은 경련이 스쳤다. 사진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표정을 기억해 두었다. 나중에 어느 쪽이 가짜인지 알아볼 때, 법적인 직함보다 그런 작은 반응이 더 중요할지 몰랐다.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나는 검은 셔츠를 향해 말했다.
"허락합니다."
"제가 퇴사한 게 왜 그렇게 중요하죠?"
"당신은 내부 정산의 대상이 아니니까요."
"그게 좋은 뜻인가요?"
"방해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방 안 조명이 깜빡였다. 내가 창문을 찾자 검은 벽 위에 커다란 모니터가 켜졌다. 화면 속에는 회사 건물이 있었다. 현실의 도원솔루션은 열여덟 층짜리였지만 화면의 건물은 열아홉 층이었다. 맨 아래에 낯선 검은 층이 끼어 있었다.
[현재 퇴사자 수: 1]
[현재 건물 안 인원: 317]
[건물 안정화 조건: 퇴사자 0명]
"퇴사자만 없으면 원상복구가 되나요?" 민재가 물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검은 셔츠가 대답했다.
그 말은 부정도 긍정도 아니었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317명 중 한 사람을 없애면 안정화된다는 식의 말은 믿을 수 없어요."
"그럼 직접 확인해 보시죠."
첫 번째 임 대표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모든 종이컵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뒤이어 벽에 문이 여섯 개 나타났다. 문마다 서로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개발본부, 인사본부, 영업본부, 시설본부, 대표실, 그리고 '외부인 대기실'.
"시간은 세 시간입니다." 검은 셔츠가 말했다. "그동안 한 사람의 신분을 확정하세요. 이후에는 건물과 사람을 함께 정리하겠습니다."
"무슨 정리요?"
"업무 종료."
그의 미소가 점점 넓어졌다. 얼굴은 임 대표와 같았지만 눈동자 안쪽에는 마치 복사기 불빛 같은 하얀 선이 돌아가고 있었다.
서윤이 나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지금 싸우면 위험해요. 어느 문이든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모아야 해요."
"맞아요. 그런데 저 사람 말 중 중요한 게 하나 있어요."
"또 뭐예요?"
"한 사람의 신분을 확정하라고 했지, 반드시 제 신분이라고는 안 했잖아요."
나는 첫 번째 임 대표를 가리켰다. "저분이 진짜라면 두 번째는 누굽니까?"
검은 셔츠의 웃음이 멈췄다. 갑자기 방 전체가 낮게 울렸다. 첫 번째 대표의 종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질문 범위 초과]
[권한 미승인]
"거짓말을 하지 못하나 보네요." 나는 중얼거렸다.
첫 번째 대표가 이때 처음 입을 열었다. "0층에 오지 말았어야 합니다."
"누가요?"
"당신이 아니라, 저자가요."
그가 검은 셔츠를 가리켰다. 바로 그때 0층의 여섯 문이 동시에 열렸고, 밖에서 수백 명의 웅성거림이 밀려들었다.
도원솔루션 직원들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양손에 같은 사직서를 들고 있었다.
그중 맨 앞에 선 직원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아까 사무실에 있던 경비원이었다.
"차도윤 씨. 우리 전부 퇴사하고 싶어요."
직원들 머리 위에 빨간 창이 떴다.
[동시 퇴사 승인 예정: 316명]
[처리 시각: 18시 01분]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이 회사가 기다린 건 퇴사자가 아니라, **한꺼번에 사라질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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