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 십 분까지 열여덟 분이 남았다. 열네 곳의 점검 담당자를 다시 배정한다는 미승인 명령이 내려오자, 나는 모니터 대신 배만식 소장에게 물었다.
“변전실 비상등은 지금 켜져 있습니까?”
“켜져 있소. 냉장창고 수동 문도 열리고.”
“그럼 일단 실제 상태를 유지합시다. 명령을 지우는 것보다 사람이 갇히지 않는 게 먼저니까.”
서윤이 현장 연락망에 짧은 안내를 보냈다. ‘예정된 전산 담당자 변경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실물 피난 안내와 비상 전원은 현장 안전 절차대로 유지하십시오.’ 다른 문장을 더 붙이지 않았다. 길고 복잡한 문구는 누군가에게 승인 문장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도원솔루션 11층에서 터졌다. 민재가 비명을 질렀다.
“형, 복도에 연기가 나요!”
나는 무전기를 꽉 쥐었다. “실제 연기야, 화면이야?”
“냄새가 나요. 소방 감지기도 울렸어요. 근데 화면에는 [화재훈련 완료]라고 떠요.”
실제 화재 경보와 가짜 훈련 완료가 겹치고 있었다. 건물이 던전이 되기 전에도 이런 날은 최악이었다. 나는 즉시 현장 소방 대응을 요청하고, 민재에게 비상 계단 쪽 실제 출입문을 따라 이동하라고 했다.
“11층엔 아직 세 사람이 있어요. 서버실 옆 냉각기 점검하던 팀이요.”
“그 사람들 위치부터 확인해. 출입 장부 말고 목소리로.”
민재는 한참 뒤에야 답했다. “한 분하고 통화됐어요. 두 분은 서버실 안에서 문을 못 열고 있대요.”
서윤은 바로 설비 담당자에게 연결했다. 우리 모두 11층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한꺼번에 움직이면 회의실에서 점검하던 구간이 무방비가 된다. 배 소장은 0층 전기실에 남고, 나는 서윤과 함께 현장 계단을 이용했다.
비상 계단으로 올라오는 동안 우리는 세 번이나 잘못된 문을 만났다. 하나는 출입증 대는 곳에 사람 얼굴이 비쳤고, 다른 하나는 바깥 복도 대신 0층 회의실을 보여 줬다. 마지막 문만 소방 표식과 손잡이 온도, 계단의 실제 방향이 일치했다. 서윤은 지나온 문마다 현장 담당자에게 위치를 무전으로 남겼다. 무슨 원리로 공간이 겹치는지 몰라도 안전한 길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은 할 수 있었다.
“오늘 이후엔 출근할 때 나침반이 필요하겠는데요.” 내가 말했다.
“나침반보다 시설 도면이 필요하겠죠.” 서윤이 답했다.
우리는 11층 계단참에서 실제로 연기가 새어 나오는지 살피고 방화문이 닫히는 걸 확인했다. 화재 위험은 마법이든 전기 결함이든 사람을 똑같이 다치게 한다.
11층에 도착하자 진짜로 뜨거운 냄새가 났다. 서버실 앞 복도 천장에 검은 그을음이 생겨 있었다. 가상 화면은 [훈련용 연기 발생]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화면을 무시하고 손등으로 가까운 문의 열기를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손잡이가 뜨거웠다. 함부로 문을 열면 안 되는 상태였다.
“시설팀 도착까지 문을 건드리지 마세요.” 서윤이 말했다. “안쪽에 계신 분들, 대답하실 수 있나요?”
문 너머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
“여기 두 명입니다. 배기 팬이 멈췄어요.”
“위치와 부상 여부를 말씀해 주세요. 문을 억지로 열지 마시고요.”
우리는 실제 소방대와 건물 소방 담당자가 통로를 확보하도록 길을 비웠다. 몇 분 뒤 소방대가 안전한 반대편 비상 접근로를 통해 두 사람에게 접근했다. 냉각기 전원은 절차에 따라 분리됐고, 연기가 퍼지지 않도록 방화 구획이 유지됐다. 두 사람은 차례로 밖으로 나왔다. 마지막 사람이 계단을 내려갔을 때 내 다리가 풀렸다.
“훈련 끝났네요.” 민재가 말했다. 얼굴이 새하얬다.
“훈련이면 좋겠지.”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복도 끝에서 또 다른 민재가 걸어 나왔다. 같은 얼굴, 같은 회사 점퍼, 왼쪽 팔꿈치에 똑같은 얼룩까지 있었다. 다만 어깨에는 사번 대신 [비상 호출 보조]라는 표식이 달려 있었다.
“전 여기서 빠져나온 적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민재가 뒤로 물러났다. “저거 저 아니에요.”
“알아.” 내가 낮게 말했다. “그래도 당장 적이라고 판단하지 마.”
그 형체의 신발은 실제 민재의 신발보다 깨끗했다. 회색 먼지가 묻어 있지 않았고, 발뒤꿈치에는 아직 뜯지 않은 라벨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증거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0층에서는 사람의 외모와 물품이 너무 쉽게 복제됐다. 다만 새 존재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민재는 그 손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자신의 점퍼 주머니에서 물병을 꺼내 복도 가운데 놓았다.
“저도 무서워요. 근데 저 사람도 목마를 수 있잖아요.”
그 말에 나는 민재의 어깨를 다시 한 번 두드렸다. 두 사람이 같은 이름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물 한 병 건넬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두 번째 민재는 내가 11층 장애 보고를 받던 장면을 기억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 민재가 계단을 내려간 이후의 일을 몰랐다. 그가 어디서 생겨났는지, 독립된 의식을 갖는지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피난 계단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도 나가도 됩니까?”
나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시설 구조대가 실물 통로와 안전 상태를 확인한 뒤, 그에게 별도 동행 여부를 물었다. 두 번째 민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 이름은 민재로 기록하지 말아 주세요. 일단 ‘비상 호출 보조’로 남을게요.”
“그건 당신이 고른 임시 호칭으로 적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민재도 그 말을 들었다. 놀란 얼굴이었지만 다른 사람을 지우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잠깐 복도에 서 있었다. 누군가의 삶이 복사돼 나와도, 그 복사본에 먼저 무기를 들이대지 않는 선택은 쉽지 않았다.
새벽 세 시 십 분이 됐다. 건물 스피커가 일제히 울렸다.
[안전 점검 담당자 재배정]
[담당자: 비상 호출 보조]
[대리 승인: 완료 예정]
“또 사람 대신 역할에 책임을 씌우려고 하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서윤은 현장 구조 보고서에서 실제 승인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소방대와 시설 책임자의 현장 안전 조치에는 새로 나타난 존재의 서명이 없었다. 그가 비상 호출을 도왔을 수는 있어도 모든 건물의 안전 결정을 맡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0층 회의실과 연결된 기록실의 미승인 변경 신청을 열었다. 담당자 이름 대신 ‘신규 생긴 역할’이 입력되어 있었다. 시스템은 사람이 생길 때마다 빈 관리자 자리를 채우려 하고 있었다.
“정말 회사는 인력 충원 하나는 빠르네요.” 내가 말했다. “급여는 한 푼도 안 주면서.”
우리는 강제 재배정 항목의 외부 적용만 중지하고 원본을 보존했다. 그 순간 11층 복도에 나타난 가짜 화재훈련 표시가 꺼졌다. 대신 회의실 마이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차도윤 방문자. 최초 설계 변경 제안자의 이의가 접수되었습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최초 설계 변경 제안자.’ 누군가 아직 회의실 기록 뒤에서 우리가 한 조치를 보고 있었다는 뜻일까. 이어서 두 번째 문장이 떴다.
[이의 사유: 사람이 나가면 시스템이 남는다]
그 말은 맞았다. 그러나 그래서 사람을 붙들어 두어야 한다는 결론은 틀렸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이제는 이 시스템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아야 했다. 누군가의 퇴근 뒤에도 남아야 하는 업무. 그것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제4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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