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곳의 안전 경계를 한 사람이 뛰어다니며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나는 도원솔루션 옥상에서 밤하늘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회사가 야근으로 악명을 떨친 건 맞지만, 야근한다고 다리가 열네 쌍으로 늘어나는 건 아니었다.
“구역을 나눠서 현장 책임자를 세워야 합니다.” 서윤이 무전으로 말했다.
“책임자라는 단어가 무섭네요.”
“고용이나 결재 책임 말고, 실제 안전 점검 담당자요. 자기 건물의 피난 계단을 아는 사람.”
그 설명은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세림병원 시설팀, 성하금융센터 당직실, 집하장 유지보수조, 지역 소방 상황실에 각각 확인 가능한 실물 위험을 전달했다. ‘0층’이나 ‘사람이 출근부로 변한다’는 표현을 뺀 건 현상을 숨기려는 게 아니었다. 출처 모를 문구를 방송할 때 시스템이 승인으로 오독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문이 엉뚱한 장소와 연결되는 현상, 조명 오류, 계단 고립 가능성은 정확히 설명했다.
배만식 소장이 종이 지도를 큰 테이블 위에 펼쳤다. 열일곱 곳을 점으로 표시했다. 이미 실물 경계와 신고선을 대조한 세 곳에는 초록 핀을 꽂았다. 나머지 열네 곳에는 노란 핀을 꽂았다. 초록색도 완전 해결이 아니라 당장 피난 경로가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제일 위험한 곳은?” 내가 물었다.
“저온 물류센터와 지하 변전실.” 소장이 두 점을 짚었다. “출입 기록이 꼬이면 문보다 전기가 먼저 말을 안 들을 수 있어.”
우리는 정라희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발목에 붕대를 감고 집하장 안전 대기 구역에 있었다. 당장 이동할 몸이 아니었다. 대신 자기 팀의 현장 점검 담당자 연락처를 알려 줬다.
“전기실은 문을 열지 말고 외부 계측부터 해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혹시 화면에서 제 이름으로 작업 승인 뜨면 무시하세요. 전 지금 여기 있어요.”
“좋습니다. 오늘은 정라희 씨가 동시에 세 건물에 출근하지 않는 날로 만들죠.”
그녀는 웃지 않았다. 잠깐 뒤에 피식 소리가 나더니 전화를 끊었다. 사람들은 다 지쳐 있었다.
첫 번째 현장 보고는 저온 물류센터에서 들어왔다. 냉장창고 출입문이 열렸다고 기록되는데 실물 문은 닫혀 있었다. 근처에서 일하던 노동자 두 명이 ‘퇴근 완료’로 표시되어 출입증이 작동하지 않았다. 시설 담당자가 수동 대피 문을 확인하고 두 사람을 건물 밖으로 안내했다. 그들을 출근부에서 되살리기 전에 실제 몸을 안전하게 내보낸 것이다.
두 번째 보고는 주차장 통로였다. 빈 차량 여섯 대가 사람 여섯 명으로 집계되어 승강기가 내려오지 않았다. 현장 당직은 차량 번호를 임시 분리하고 계단을 개방했다. 누구도 차에게 퇴사서를 받아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세 번째 연락은 아파트 관리동에서 왔다. 밤샘 경비원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층 버튼이 모두 ‘근무 시작’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전산 승강기 호출은 중지됐지만, 실물 비상 계단은 열려 있었다. 경비원은 당황한 주민을 계단으로 안내했고 관리동 시설 담당자는 승강기 안에 실제 사람이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우리 집이 회사가 되는 건가요?” 주민이 전화로 물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직 그런 결론은 없습니다. 지금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시고 시설 안내를 따라 주세요. 집으로 돌아갈 권리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위로보다는 정확한 행동 지침을 드리고 싶었다. 전산 세계에서 이름과 목적지가 바뀌어도 실제 계단과 몸이 있는 곳부터 확인하면 그나마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무전기를 한 손으로 들고 상태를 표에 기록했다. 어느 건물은 원격 사진만 보내왔고, 어느 건물은 실제 출구를 직접 열어 보였다. 우리는 원격 화면 확인과 현장 안전 확인을 구분했다. 사진 한 장을 보고 사람이 구조됐다고 쓰지 않았다.
오전 두 시 오십 분, 지하 변전실에서 마지막으로 들어온 메시지는 심상치 않았다.
[출입 상태: 전원 퇴실]
[실제 현장: 작업자 2명 잔류]
[비상 조명: 자동 소등 준비]
“실물 비상등은 독립 회선입니까?” 서윤이 물었다.
당직자가 대답했다. “원래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관리 단말이 이상한 전원 전환 요청을 보내고 있어요.”
“자동 전환을 보류하세요. 차단기 조작은 현장 전기 책임자만.”
우리는 비상등의 실물 상태를 확인할 때까지 화면의 ‘퇴실 완료’를 믿지 않았다. 변전실 담당자는 전기 안전규정에 따라 독립 예비전원을 점검했고, 작업자 두 명은 시설 계단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전원은 유지됐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오자 이번엔 화면에 ‘위험 미해결 업무 2건’이 떴다. 업무는 남을 수 있었다. 사람이 그 업무의 담보로 남을 이유는 없었다.
“이제 열한 곳이 남았습니다.” 민재가 표를 계산했다.
“확인 상태와 완전 복구를 섞지 마.” 나는 말했다.
그는 곧바로 표의 색을 바꿨다. 초록색 대신 노랑 테두리와 검은 글씨로 ‘실물 대피 가능, 원인 미해결’을 표시했다. 우리는 마법의 완료율보다 이런 지루한 글씨를 더 믿었다.
민재가 나에게 물었다. “형, 열네 곳을 한 번에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없으면 어떡하죠?”
“없어야 정상일지도 몰라.”
“네?”
“서로 다른 건물의 화재문 위치를 한 사람이 모두 알 수는 없잖아. 중앙에서 위험을 모아 보는 것과 현장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건 별개야.”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자기 태블릿에서 자동 ‘총괄 처리 완료’ 버튼을 숨겼다. 대신 각 현장 담당자의 점검 시각과 실물 확인 여부를 따로 표시했다. 스스로 뭔가를 바꿔 보려는 후배가 기특했다. 내가 전 직장에 남긴 마지막 장점이 있다면, 민재에게 적어도 ‘모르면 확인하기’라는 습관 하나쯤은 전해 준 게 아닐까.
그때 도원솔루션 0층에서 갑자기 회의 소집 벨이 울렸다. 벨소리는 각 건물 당직실의 비상 무전에도 겹쳐 들렸다.
[현장 위험 14건 접수]
[일괄 회의 소집 완료]
[참석자: 각 건물 현장 점검자]
“그건 안 됩니다.” 서윤이 말했다. “현장 담당자가 피난 안내 중인데 대리 출석시키면 안 돼요.”
우리는 회의 연결망이 무전 방송과 별도인지 확인했다. 실제 구조 무전은 살리고, 회의 소집 신호만 중지했다. 벨이 꺼졌지만 지하 변전실의 배전함에는 소등 요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조정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올라오는 거죠.” 내가 말했다.
“그래요. 제0 설계 변경 규칙이 여러 건물에 분산되어 있을 수 있어요.” 서윤이 답했다.
나는 옥상 끝에 섰다. 도원솔루션의 간판 불빛 아래로 서울의 밤길이 이어졌다. 도로 위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우리 회의에 초대되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회의를 비워 두는 동안 사람을 내보낼 수 있다면, 그게 우선이었다.
나는 한동안 연락을 받지 못한 건물 세 곳에 재차 전화를 걸었다. 답이 없다는 사실 자체는 사고의 증거가 아니지만 안전을 확인했다는 뜻도 아니었다. 지역 상황실은 현장 확인 인력을 별도로 보냈고, 우리는 해당 구역을 ‘확인되지 않음’으로 남겼다. 누군가 표의 빈칸을 싫어해 임의로 초록색을 칠하지 않도록 민재에게 강조했다.
그때 오래된 회의록이 내 휴대전화에 도착했다.
[현장 안전 확인 담당자 일괄 재배정]
[보류한 인원: 차도윤]
[미승인 변경 적용 시각: 03:10]
남은 시간은 스무 분이 채 되지 않았다. 0층 회의실은 이제 사람을 불러 모으는 데서 멈추지 않을 모양이었다. 우리가 확인한 안전 경로 자체를 다시 배정하려고 했다.
제4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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