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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45화
PAYLUA ORIGINAL · 제45화

엄마의 퇴근길을 그리는 아이

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3,692자

오프라인 책장
새벽 두 시, 조정실의 여자아이는 사과를 반 개만 먹겠다고 했다. 민재가 과일을 잘라 주자 아이는 먼저 접시의 가장자리로 씨를 밀어 놓았다. 나는 그 모습을 통화 화면으로 봤다. 아이가 아침까지 잠을 잘 거라는 기대는 틀렸다. 하지만 일어났다고 해서 조사에 응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회사에 무슨 일 생겼어요?” 아이가 화면 밖에서 물었다. “건물 길을 고치고 있어.” 민재가 답했다. “길 고치는 건 엄마가 잘해요.” 나와 서윤은 동시에 말을 멈췄다. 아이는 모니터를 보고 있지 않았다. 새 도화지에 길게 파란 선을 긋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띠에는 여전히 000이라는 숫자가 있었다. 민재가 물었다. “엄마가 길을 만드는 일을 했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안 만들어요. 어디가 위험한지 그려 줘요. 사람들이 길을 찾게.” 이전에 아이는 ‘문을 그린 사람이 문을 만든 건 아니야’라고 썼다. 이번 설명은 그 말과 잘 맞았다. 그게 어머니의 직업인지, 아이가 들은 말인지 아직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민재에게 더 묻지 말라고 손짓했다. “네가 그린 그림은 네 거야.” 민재가 말했다. “보여 주고 싶으면 보여 줘. 아니면 계속 그려도 돼.” 아이는 사과를 먹고 다시 색칠했다. 잠시 후 스스로 화면 앞으로 그림을 들어 올렸다. 검은 빌딩 열일곱 개 바깥쪽에 파란 선이 지나갔다. 선 끝에는 작은 동그라미가 있었다. 동그라미 옆에 [1758]을 다시 써 놓았다. “이건 뭔데?” 민재가 물었다. “엄마가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 내지 말고 여기다 알려 달랬어요.”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아이의 말만으로 17시 58분 신고자를 엄마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이 들은 행동 지침을 말했을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소리 내지 않고도 신고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림 고마워.” 나는 화면 가까이 말했다. “지금은 과일 더 먹고 싶니?” “귤.” “귤이 남았는지 알아볼게.” 민재는 내게 눈을 흘겼다. 0층에서 괴물을 만났을 때보다 귤을 찾을 때 더 곤란한 표정이었다. 다행히 한서림이 가방에서 작은 귤 두 개를 꺼냈다. 오늘 밤 최고의 구조자는 아마 그분일 것이다. 우리는 아이에게서 받은 그림의 공개를 허락받은 부분만 도식화했다. 어머니에 관한 말은 민재가 따로 남기되 강제 신원 검색에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아이가 가리킨 파란 선과 실제 1758 안전 회선의 시설 위치만 대조했다. 두 점은 비슷한 방향에 있었다. 한서림은 아이와 함께 작은 게임을 시작했다. 귤껍질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종이 위에 굴리는 게임이었다. 아이가 웃을 때마다 조정실 한쪽의 센서가 불규칙하게 켜졌지만 우리는 그 반응을 ‘기뻐서 나타난 신호’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표정을 단말이 수집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했다. 한서림은 센서의 시야를 안전하게 가리고 놀이를 계속했다. 나는 민재에게 아이의 말이 어디까지 자발적이었는지 물었다. 그는 아이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잠들어 있었고, 누구도 질문지를 내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 말과 함께 놀이 중 아이가 먼저 ‘엄마의 퇴근길’이라고 적었다는 사실도 알려 줬다. 작은 사실 하나에도 맥락이 필요했다. 도원솔루션 0층 통신실에 연결된 오래된 선로 목록을 뒤져 보니, 1758 수신기의 보조 입력으로 ‘필기 표지 보관 단말’이 하나 있었다. 과거에는 위험 구역을 그림이나 표식으로 남기면 중앙의 현장 도면에 반영되도록 했던 모양이었다. 그 장치가 왜 조정실과 이어졌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했다. “그럼 엄마가 회의 설계자라는 거예요?” 민재가 물었다. “아니. 아이는 위험을 그려 줬다고만 했어. 설계 회의에 참석했다는 증거는 없어.” 서윤이 이어 말했다. “아이를 0번 참관인으로 부르는 건 더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장치 번호와 사람이 겹쳤을 가능성을 먼저 봐야 해요.” 서윤은 현장 복구팀에 조정실 보호 환경을 먼저 확인하라고 했다. 출입문은 비상시 안에서 열 수 있어야 하고, 바깥의 회의 호출 신호가 실내 조명이나 환기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됐다. 민재가 직접 손잡이를 돌려 확인했다. 그동안 아이는 귤껍질 별을 완성했고, 한서림은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사진은 찍지 않았다. 나는 그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회사에서 수많은 로그를 지켜 왔지만, 기록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순간이 누군가에게 더 중요한 보호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때 조정실의 벽에 원형 표식이 떠올랐다. 가상 회의실에서 본 접이식 의자와 같은 표식이었다. 아이는 그림을 내려놓고 벽을 한 번 바라봤다. “저 의자에 앉으면 엄마가 오나요?” 아무도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거짓말로 아이를 달래고 싶지 않았다. “그 의자가 엄마를 데려온다는 근거는 없어요.” 내가 말했다. “엄마를 찾는 일은 어른들이 하고 있어요. 네가 그 의자에 앉을 필요는 없어요.”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안 앉을래요.” 말이 끝나자 의자 그림이 조용히 사라졌다. 시스템이 아이의 거절을 인정한 걸까. 아니면 지연한 걸까. 우리는 전산 기록에서 거절이 실제로 보존됐는지 바로 확인했다. 화면에는 ‘대기 상태’만 표시됐다. 그래서 조정실 실물 출입문을 더 안전하게 관리하고, 아이와 무관하게 대리 출석 연결선을 분리했다. 그 순간 통신실에서 남기석이 보내 온 사진이 도착했다. 오래된 금속 명판의 한쪽에 녹슨 작은 홈이 있었다. 새겨진 글씨는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외부 관찰 … 개인 아님 / 장치 …’ “외부 관찰자라는 말이 원래 기계 장치를 뜻했을 수도 있겠네요.” 내가 말했다. “가능성은 높지만 전체 표기가 필요해요.” 서윤이 답했다. 아이의 000 팔찌와 기계의 000 식별자가 혼합되었을 가능성은 한층 커졌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생겼다. 그렇다면 누가 아이에게 그 팔찌를 채웠을까. 어디서 엄마의 퇴근길을 잃어버렸을까. 우리는 통신실의 외부 관찰 장치가 실제로 사람을 식별했는지도 검토했다. 수신 장부에는 000 뒤에 이름을 넣을 칸이 아예 없었다. 대신 [기기 고장·불능·전원 상실] 세 상태와 [현장 구조요청 유무]를 기록하는 칸만 있었다. 인사 데이터베이스로 이관한 뒤에야 그 자리에 ‘직원 성명’이라는 열이 생겼다. “숫자 하나가 사람으로 둔갑한 겁니까?” 민재가 물었다. “아직 이 장치와 아이 팔찌가 같은 체계인지 확정은 못 해.” 나는 말했다. “그래도 사람 이름을 넣어서는 안 될 칸이었다는 건 분명해졌지.” 민재가 새 사진을 전송했다. 아이는 귤껍질을 별 모양으로 모아 놓고 있었다. 가운데 작은 점 하나가 있었다. 아이는 그 점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여 주었다. “여긴 엄마가 쉬어야 하는 곳이에요.” 나는 장면을 오래 바라봤다. 지금까지 우리는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 추적했다. 하지만 혹시 엄마가 돌아올 때 쉬어야 할 곳을 누군가 없애 버렸다면? 아이의 길에는 끝이 있었다. 출근 시간이 아니라, 퇴근 뒤의 쉼터였다. 나는 서윤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녀는 도면을 천천히 돌려 보았다. “0층 기록실을 살펴볼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요. 저기엔 ‘외부 대기’만 적혀 있고, 쉬는 자리의 관리 기록은 없거든요.” 균열이 난 천장에서 종이 한 조각이 내려왔다. 그 위에는 짧게 쓰여 있었다. [안전 대기 공간: 인사관리 전용으로 전환 예정] 나는 그 문장을 찢고 싶었다. 대신 사진을 찍어 보존했다. 오늘 밤 제일 얄미운 건 괴물이 아니라, 휴식조차 출근부 칸으로 바꾸려는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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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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