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번째 건물은 없어요.”
집하장 관리자가 설계도를 두드렸다. 공동 운영사의 건물은 도원솔루션을 포함해 열일곱 곳. 그 바깥에는 공공 보행 통로와 지하 배수 시설, 오래된 물류 집하장이 있었지만 열여덟 번째 건물 번호를 부여받은 곳은 없었다.
“그런데 출구 18이라는 표시는 어디서 생긴 겁니까?” 내가 물었다.
관리자는 서류함에서 낡은 청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 위에 열일곱 개 직사각형이 원을 이루고 있었고 중앙에는 굵은 테두리도 없는 빈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점 옆에 적힌 글씨는 [외부 비고용 대기 경계]였다.
“입주 기업의 출입 기록을 거치지 않고도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 안전 지대였다고 들었습니다.”
“기록을 믿을 수 있나요?” 서윤이 물었다.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것만 말할 수 있어요. 시설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릅니다.”
나는 관리자의 신중한 대답을 마음에 들어 했다. 오늘 밤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걸 칭찬하고 싶었지만, 이 정도면 인류 문명의 기본 아닌가 싶어 입을 다물었다.
회색 작업복 점검인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외투에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남기석 / 과거 현장 보조]라는 작은 표찰이었다. 그는 내가 쳐다보는 걸 알아채자 먼저 말했다.
“현재 관리자 명단과 연동되지 않게 신분 범위를 확인받았습니다. 제 이름은 남기석입니다.”
“처음부터 이름을 밝힐 수는 없었습니까?”
“그랬으면 장부가 제 이름을 승인권자 칸에 옮겼을 겁니다. 확인 전에는 위험했어요.”
“그 사정은 이해합니다. 다만 이제부터는 누가 무엇을 직접 봤는지 말해 주세요.”
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래전 이 시설의 임시 복도와 경고등을 점검한 보조였으며, 그때도 독립 출구 18이라는 이름은 쓰지 않았다고 했다. 원래 명칭은 ‘제0 경계’였고, 건물 번호가 아니라 건물 바깥에서 위험을 알리는 자리라는 뜻이었다.
“기계가 제0을 18번으로 바꾼 이유는요?”
“제가 보고한 것은 아닙니다. 통합 장부가 순서 번호를 매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증거로 오래된 작업 수첩을 보여 줬다. 마지막 장에는 놀랍게도 ‘입사하지 않은 사람은 출입 승인 요청을 할 수 없다’는 규정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 아래 손글씨가 있었다.
[구조를 요청하는 데 취업할 필요는 없다.]
나는 문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딱 내 마음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당연한 말을 누군가 오래전에 따로 적어 둬야 했다는 사실이었다.
기석은 장부를 만지면서 자신도 예전에 이곳을 떠났다고 했다. 당시 계약이 끝나자 담당자가 새 일자리로 자동 배치하겠다는 서류를 내밀었지만,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싶어 거절했다. 실제로 처리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이름을 숨기려 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때는 제가 그냥 겁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겁이 많아서 위험을 피할 때도 있어요.” 나는 말했다.
기석은 서윤에게 자신의 옛 출입 패스와 최근 작업 패스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 두 패스는 같은 제0 경계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하나는 장비 접근이고 하나는 사람 이동 승인으로 잘못 분류되어 있었다. 우리는 최신 패스의 사람 이동 기능을 일단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제 이름을 말한 건 오늘 처음이 아닙니다. 다만 시스템이 제대로 들을 때까지 기다렸어요.” 기석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를 의심했던 나도 조금 미안해졌다. 그러나 위험한 시기에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해서 누구의 권한이든 무제한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의 설명과 패스 기록을 나란히 남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우리는 제0 경계의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 집하장 관리자와 함께 폐쇄된 대기 공간을 살폈다. 입구에는 두 개의 장치가 있었다. 하나는 회사 출입증을 읽는 검은 단말기, 다른 하나는 아무 이름도 요구하지 않고 눌러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노란 버튼.
“노란 버튼은 1758 회선과 같은 종류예요.” 배 소장이 말했다.
“누르면 누가 오는지 확인할 수 있나요?”
“반드시 출동이 보장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신고가 접수됐는지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어요.”
기석은 버튼 위의 뚜껑을 열었다. 안쪽에는 실제 기계식 접점이 살아 있었다. 그는 시설 관리자와 안전 담당자의 입회 아래 진단 모드로 신호가 전달되는지만 시험했다. 화면에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위험 알림 수신 확인]이라는 문구만 떴다.
바로 옆 검은 단말기는 달랐다. 화면에 흰 글씨가 떠올랐다.
[제0 경계 사용자는 열여덟 번째 직원으로 임시 배치]
“직원 수가 부족해서 경고 버튼까지 채용하나 봅니다.” 내가 말했다.
배 소장이 웃었다. “야근 수당은 누구 통장으로 들어갈지 궁금하네.”
우리는 검은 단말기의 자격 발급 기능만 격리했다. 노란 버튼은 계속 쓸 수 있게 두었다. 그 순간 출입문 위의 [독립 출구 18] 표기가 사라졌다가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글씨가 조금 달랐다.
[제0 경계 / 독립 구조 대기]
“표시가 본래 기능으로 돌아온 건가요?” 서윤이 물었다.
“일부만요. 아직 건물 간 공간 중첩은 남아 있어요.”
우리가 장비를 확인하는 동안 집하장 밖 버스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업무를 마친 배달 기사, 야간 근로자, 근처 상가에서 나온 손님들이었다. 그들은 도로 끝이 순간적으로 건물 복도로 바뀌는 모습을 보고 놀라 멈췄다. 다행히 차량 통행은 이미 시설 측과 교통 담당자가 우회 조치를 시작한 상태였다.
한 배달 기사가 내게 물었다. “여기로 가면 길이 열립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 열려 있는 곳은 구조 대기 공간입니다. 확인된 다른 출구는 저쪽입니다. 원하시면 담당자가 안내해 드릴게요.”
기사는 안도하며 안전 표지를 따라갔다. 그 뒤에서 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저기로 가면 회사 들어가야 해요?”
“아뇨. 제가 먼저 확인했는데 취업 안 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이 웃었다. 웃음이 있어 다행이었다. 누군가 길을 잘못 들어도 바로 노동 계약으로 이어질 것 같은 밤이었으니까.
그러나 기석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는 오래된 청사진에서 제0 경계 바깥의 화살표를 가리켰다. 화살표 끝에는 삭제된 단어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비상 ______ 구역]
“뭘 지운 거죠?” 내가 물었다.
“인계 받을 때부터 이랬습니다. 저는 수선 지시만 받았고 이 문서의 작성자는 아닙니다.”
관리자는 다른 사본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기석은 내가 가져온 미래 메일을 잠깐 읽더니 손을 멈췄다.
“18번 문이 출구이면서 입구라고요?”
“이 메일은 발신 인증이 없어요. 사실로 볼 순 없습니다.”
“그래도 경고의 형태는 오래된 시험 메모와 닮았습니다. 밖으로 나온 건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회사 직원으로 바꾸는 규칙일 수도 있어요.”
나는 그 말을 기록했다. 기석은 원인을 알고 있다기보다 오래된 시험의 위험성을 떠올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말이 실제 도로에서 생긴 현상과 맞아떨어질수록 불안은 커졌다.
건물의 0층이 밖으로 나와 있다면, 더 이상 회사 문을 열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도로를 걷는 것만으로 출근 처리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서윤의 무전기가 울렸다.
“도원솔루션 안전실에서 알려 드립니다. 건물 외벽 앞 인도에 직원 출근부가 생성됐습니다. 일반 시민의 발자국을 읽고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들자 버스 정류장 너머 도로 바닥에 작은 글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출근 지점 이동 중]
제3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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