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넘기자 회사는 내일을 오늘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금융센터 정문 옆에는 병원 진료 대기 번호가 붙었고, 병원 옥상에는 도원솔루션의 야간 근무표가 떠올랐다. 멀리 있던 건물들이 실제로 한곳에 붙은 건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건너야 할 거리는 그대로였다. 대신 어떤 문을 열면 다른 건물의 복도가 겹쳐 보였다. 내 눈에만 보이던 푸른 화살표도 이제 다른 사람의 발밑에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저기요.” 배만식 소장이 길 건너를 가리켰다. “저 비상구가 우리 회사 계단이잖아.”
“차로 오 분 거리인데요.”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그쪽 문을 향해 누군가 걸어가려 하자 문서윤이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실제 차도와 출입문이 만나는 위치는 여전히 위험했다. 겹쳐 보이는 경로를 따라가다 벽이나 도로 한가운데로 걸어 나올 수도 있었다.
“아무도 저 문부터 시험하지 마세요.” 그녀가 말했다. “실제 바닥과 출입 방향을 확인하기 전에는 이동 금지입니다.”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짙은 회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평범했지만 손에는 이상한 게 들려 있었다. 출입증이 아니라 반쯤 접힌 비상문 손잡이였다.
“17개 건물의 출근을 관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셨죠?” 내가 물었다.
“그렇게 말했어요.” 남자는 대답했다. “저는 남겨 둔 문을 점검합니다.”
“소속이 어딥니까?”
“지금은 여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제 소속까지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
이 대답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 만난 사람이 이유도 없이 믿음직스럽게 들릴 때 더 경계한다. 가장 비싼 전산 사고는 대개 ‘이 사람은 알겠지’에서 시작된다.
남자는 자신을 '문지기'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건 회사가 붙인 직책이었고, 본인이 원하는 호칭은 아니라고 했다. 대신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패를 보여 줬다.
[회수 외 경로 점검]
[담당자 성명: 미기재]
[강제 이송 금지]
“그 패를 보여 주면 모든 문이 열리나요?” 내가 물었다.
“아닙니다. 열리지 않는 문이 어디 있는지 알려 줄 뿐이에요.”
“훨씬 솔직하군요.”
그의 패에는 공동 운영 기관 로고와 다른 작은 흠집이 있었다. 서로 이어진 동그라미 두 개와 선 하나. 우리는 조금 전 1758 중계기 안쪽에서 같은 표시를 봤다. 나는 그 사실을 곧바로 얘기하지 않았다. 단서가 같다고 인물의 정체가 증명되는 건 아니다.
문서윤은 그에게 건물 밖 안전 경로를 묻고 현장 직원들과 대조했다. 남자는 손잡이가 있는 문을 무작정 열지 말고 각 건물의 독립 비상계단부터 확인하라고 말했다. 그의 조언은 일반적인 대피 원칙과도 맞았지만 그것만으로 신뢰할 수 있는 구조 책임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때 내 휴대전화에서 강민재의 목소리가 터졌다.
“선배님, 직원들 안전 구역은 유지 중인데 로비 천장에 다른 회사 명찰이 내려와요. 아무도 입사하지 않았는데 업무 배정표가 만들어집니다.”
“문은?”
“직접 점검한 비상문은 열려 있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 눈에는 다른 쪽으로 나가라는 화살표가 보여요.”
“그 화살표 믿지 말고 실제 경로를 따라가. 직원들한테는 안전한 출구가 하나뿐이라는 말도 하지 마.”
민재는 이미 몇 명을 수동 점검한 비상 통로로 안내했다고 했다. 서지완은 대강당의 내일 출근부를 별도 봉투에 넣고, 현재 직원 명단과 섞이지 않게 보관 중이었다. 아이도 그 옆에서 쉬고 있었다. 새벽이 되면 어머니가 올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약속할 수 없는 희망을 아이에게 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색 작업복 남자가 우리 대화를 들으며 말했다. “그 아이는 아직 0번 문을 선택하지 않았군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봤다. “아이에 대해 뭘 알고 있습니까?”
“번호를 압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그가 뻔뻔하게 말하는데도 화가 날 이유는 명확했다. 아이를 번호로 부르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 아이가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는 아직 본인이 말하지 않았다.
“그럼 번호로 부르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아이에게 먼저 물을 일이에요. 그것도 안전이 확보된 뒤에.”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습니다.”
자정 이후 0층의 형태는 더 이상 단순한 건물 내 던전이 아니었다. 어느 건물에서도 동일한 계약 종료 도장이 나타났고, 퇴사자가 아니어도 자기 이름을 지우라는 안내를 받았다. 금융센터에서는 구조된 세 사람이 사라졌다는 허위 알림이 또 들어왔지만, 우찬은 실제로 세 사람과 통화해 안전 상태를 재확인했다. 세림종합병원에서는 박유라 간호사가 신규 환자 명부에 금융센터 이름이 들어온 사실을 확인하고, 진료 기록과 외부 시험 기록을 분리했다.
사람들은 바빴다. 그래서 살아 있었다. 누구도 전산 화면만 보고 서로를 없어진 사람으로 처리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회색 작업복 남자에게 물었다.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제가 아는 건 일부입니다.” 그는 말했다. “옛날엔 회사가 사람의 일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기록이 사람의 내일을 먼저 배치하기 시작했어요.”
“누가 바꿨습니까?”
“공동 운영 기관이 한 번에 바꾼 건 아닙니다. 여러 건물이 편하다는 이유로 같은 기준을 받아들였어요. 그중 하나가 오늘 자정 작동했습니다.”
그 말이 완전한 설명은 아니었다. 왜 던전이 생겼는지, 종이 인간들이 정말 살아 있는지, 이미 퇴사한 이명주가 왜 병원 무전실에 남아 있는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도시 전체의 이상이 단순한 마법 장난이 아니라 사람의 의사를 빈칸으로 바꾼 시스템과 연결됐다는 단서는 더 선명해졌다.
남자는 허리춤의 손잡이를 풀어 내게 보여 줬다. 끝에는 숫자가 있었다. 18.
“열일곱 개 건물을 연결했다면 열여덟 번째도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건물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시범 설계에선 남겨 둔 바깥 출구였어요. 어느 회사에도 소속되지 않은 길.”
나는 아이가 그린 지도 바깥의 점을 떠올렸다. 그 점이 바로 그 길을 뜻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림은 아이의 것이었고, 지도와 설비의 대응도 아직 검증 전이었다.
“그 길은 어디 있습니까?”
남자는 내 뒤를 가리켰다. 방금 전까지 주차장 벽이 있던 곳에 좁은 계단이 생겨나 있었다. 계단 아래쪽에서는 선명한 바람 냄새가 났다. 축축한 서류와 잉크가 아니라, 비 온 뒤의 도로와 나무 냄새였다.
“여기를 지나면 퇴근할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손을 들어 남자를 멈췄다. “제 의사를 먼저 묻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저 계단이 실제로 어디로 연결되는지 모릅니다. 동료들도 아직 안전을 확인하는 중이고요.”
“그래서 먼저 점검하는 겁니다.”
서윤이 계단 입구에 테이프를 붙였다. 아무도 무심코 내려가지 못하도록 물리적 경고를 남겼다. 배 소장은 외부 설비도와 비교했고, 나는 내 눈에만 보이던 화살표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을 기록했다. 퇴사자 특권이 도시 전역으로 번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제 모든 사람이 회사의 출구를 볼 수 있게 되는 걸까.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때 휴대전화에 미리보기로만 나타났던 미래의 메일이 다시 도착했다. 이번에는 송신 시각이 현재보다 이 분 뒤였다.
[발신: 내일의 차도윤]
[제목: 첫 번째 실패를 수정할 수 있다면]
[내용 미리보기: 18번 문을 먼저 열지 마. 그 문은 출구이기도 하지만…]
문장은 거기서 끊겼다. 바로 뒤이어 또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새로운 위험 구역 확인]
[공동 운영 대상 17개 건물 외부]
[장소: 독립 출구 18]
[상태: 처음으로 사람의 응답을 기다림]
“이번엔 또 무슨 야근입니까?” 배 소장이 물었다.
“글쎄요.” 나는 좁은 계단을 바라봤다. “회사 밖에서도 출근하라니, 업계가 정말 좁아졌네요.”
서윤이 짧게 웃었다. 남자는 손잡이를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지 않았다. 적어도 무슨 문인지 확인하고, 누가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오늘 밤 내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회사를 탈출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도시 전체가 어느 회사의 이름 아래로 들어가려 할 때, 누구나 스스로 나갈 길을 고를 수 있도록 진짜 출구를 남기는 일이었다.
제3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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