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인출기 화면에는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인출 가능: 박지수, 김태식, 오은호]
[인출 방식: 일괄 인계]
[수령인: 차도윤]
시중 은행에서 이런 화면을 봤다면 은행을 옮겼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은행을 옮겨도 옆 건물 바닥에서 0층이 자라고 있었다. 최악의 예금 상품이었다. 이자가 사람 목숨인 상품.
“이 기계는 원래 있었습니까?” 문서윤이 물었다.
정우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 자리는 방화 셔터 제어반이었어요. 기계가 그 앞에 겹쳐 보입니다.”
배 소장이 허리를 굽혀 기계 옆면을 살폈다. 내가 보는 금속 외장은 실제로 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기계 뒤에는 벽 대신 지하 설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온전한 실물이 아니었다. 나는 카드 투입구 안에 무엇이 있는지 플래시를 비췄다. 종이가 여러 장 겹쳐져 있었다. 누군가 사람을 꺼내려면 먼저 어제 날짜의 퇴사 증명서를 집어넣어야 하는 것 같았다.
“잠깐만요.” 서윤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카드 넣으면 동의로 해석할 수도 있어요.”
“넣을 생각 없습니다. 오늘은 ATM 비밀번호보다 사람이 우선이에요.”
소방대는 세 사람의 구조 경로를 따로 확보하고 있었다. 박지수와 김태식은 방화문 너머 점검 통로에서 기다리고, 오은호는 독립 환기실에서 배선을 고정했다. 그 사이 우리가 할 일은 실제 방화문이 열렸을 때 이 기계가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나는 우찬에게 요청했다. “이 모듈이 사람 이름을 어디서 가져오는지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그는 중앙 모니터에 안전 점검용 읽기 전용 화면을 열었다. 경비실 비밀번호를 요구하지 않는 공개 시험 기록이었다. 기록에는 '정산 보관물'이라는 문구와 함께 세 종류의 항목이 있었다. 직원 식별 번호, 임시 작업 권한, 비상 통행 번호. 그런데 최근 업데이트 이력에는 세 항목을 전부 '인출 가능 자산'으로 변환한다는 내용이 추가돼 있었다.
“누가 이런 걸 승인했죠?” 내가 물었다.
“서명란은 비어 있어요. 공동 운영 기관 승인 예정이라고만…” 우찬이 말을 멈췄다.
빈 서명란. 도원솔루션에서도 보았던 공석의 책임자 자리였다. 시스템은 자정이 되면 첫 번째로 확인 버튼을 누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려는 듯했다.
그때 은행 내선전화가 울렸다. 우찬이 수화기를 들었고, 상담원처럼 친절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도윤 고객님, 지금 특별 인출을 진행하면 세 분의 모든 채무가 소멸됩니다.”
“그렇게 좋으면 사람 대신 서류부터 인출하시죠.” 내가 말했다.
“고객님의 음성이 수집됐습니다. 승인 의사로 분류됩니다.”
서윤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여기서 말대답하지 마요.”
“은행 고객센터랑 대화하다 보니 습관이 나왔습니다.”
우찬은 고객 응대 회선과 비상 구조 회선이 다른 장비에 연결돼 있다는 걸 확인했다. 우리가 이용한 독립 비상 통화기에서는 이런 승인 안내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상담 회선만 분리해 비상 통화와 구조대 무전은 유지했다.
잠시 뒤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기계 화면에 세 사람의 이름이 사라지고, 대신 낯선 계좌번호 세 개가 나타났다. 화면 아래에는 각 계좌의 잔고가 '0초'라고 적혔다.
“돈이 아니라 시간을 정산한다고?” 배 소장이 중얼거렸다.
나는 지난주 회사에서 받은 마지막 급여 명세서를 떠올렸다. 야근 시간을 잘못 집계해 문제 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통장에 들어오는 돈과 살아 있는 시간을 같은 단위로 취급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이 인출을 완료하면 어떻게 되는지 로그가 있어요?”
우찬이 읽었다. “‘원본 인계 완료 후 기존 경로 삭제.’”
“절대 진행하면 안 되겠네요.” 서윤이 말했다. “지금 세 분의 출입 경로가 사라지는 거니까요.”
나는 메모지를 꺼내 기계에 붙은 유리 너머 실제 비상 통로와 가짜 금융 회로를 따로 그렸다. 굵은 선은 사람이 지나갈 실제 길, 점선은 기계가 주장하는 길. 아무리 비슷해 보여도 서로 같은 것이 아니었다.
“소방대가 실제 통로로 구조하면 기계는 무슨 일을 하죠?”
“정산을 실패로 처리하겠죠.” 우찬이 말했다.
“실패했다고 다시 강제 인출하지 않게 할 수 있나요?”
우찬은 관리실을 통해 프로그램의 원래 정지 기능을 찾아냈다. '물리적 안전 사건 발생 시 자동 정산 분리.' 외부에서 기계를 해킹할 필요도, 누군가의 생체 정보를 훔칠 필요도 없었다. 원래 시스템이 갖고 있던 긴급 중지 절차를 사용하면 됐다. 다만 오류가 있었다. 안전 중지 버튼 아래에 '보증인 서명 필수'라는 글자가 추가돼 있었다.
“또 제 이름을 넣으려는군요.” 나는 말했다.
서윤은 실제 건물 안전관리 권한을 가진 정우찬과 구조 지휘를 맡은 소방대에게 확인 요청을 보냈다. 사용 승인은 시설 책임자가 현장 점검표로 남기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했다. 내가 퇴사자인지는 해당 절차와 상관이 없었다.
그 와중에 검은 기계가 카드를 스스로 뱉어 냈다. 플라스틱에는 낯선 회사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미래기록관리협의회]
[안전 대리 인출 카드]
카드 뒷면에는 작은 글씨가 있었다. '원본이 부재하면 대역을 원본으로 간주.' 가장 핵심적인 위험이 단 한 줄에 적혀 있었다. 대역을 존중하는 것과 동의 없이 두 사람을 한 명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다. 회사가 그 차이를 지우는 동안 이명주와 명주 둘은 서로를 구분할 시간을 잃을 뻔했다.
“이 카드도 만지면 안 되겠어요.” 내가 말했다.
“증거로 보관해야 합니다.” 서윤이 일회용 증거 봉투를 펼쳤다. 실제 카드를 만지기 전에 절연 상태와 표면 위험을 확인하고, 우찬 입회하에 기계가 이미 배출한 카드를 봉투에 넣었다. 카드가 사람 이름을 빌린 정산 요청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따로 기록했다.
정산 장치가 갑자기 밝아졌다.
[긴급 중지 유효]
[구조 대상 분리]
[장부상 세 명과 실제 세 명의 식별 결과 불일치]
실제 구조가 시작되기 전, 우리는 세 사람에게 '밖으로 나온 다음 어떤 기록을 남길지'를 물었다. 지수는 자신이 금융센터 직원이라고 표시된 장부를 바로 고쳐 달라고 했고, 태식은 명찰보다 현장에 남아 있는 작업 장갑을 챙겨 달라고 부탁했다. 은호는 발전기 분전함의 마지막 점검 수치가 사라지지 않도록 확인해 달라고 말했다. 모두 다른 요구였다. 누군가 셋을 한꺼번에 인출해야 할 대상으로 묶은 서류와는 달랐다.
서윤은 수첩을 펴서 요구를 하나씩 기록했다. 세 사람의 진술을 현장 안전 기록에 덧붙이자 인출기의 화면에 이상한 잔상이 생겼다. 한 번에 세 명을 처리하겠다는 문장이 반짝이다가, '개별 처리 불가'라는 경고로 바뀌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을 하나씩 대하면 귀찮아지는 시스템이라면, 그 시스템이 귀찮아지는 게 맞다.
우찬은 건물 공용 보관함에 남아 있던 원래 출입 명부를 가져왔다. 수기로 적힌 임시 출입 세 건에는 법적 퇴사 여부를 판단하는 항목 자체가 없었다. 오늘 누가 어디에서 작업했고 안전하게 돌아갔는지만 남기는 서류였다. 우리는 그 사본을 구조 지휘부와 각각 보관했다. 실제 기계가 어떤 결과를 출력하더라도, 사람 세 명의 선택과 이동을 다시 확인할 근거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소방대의 무전이 들어왔다. “방화문 외부 온도 안전 범위 복귀. 구조 경로 열겠습니다.”
점검 통로 안에서 짧은 환호가 들렸다. 박지수와 김태식이 두 사람의 발로 바닥을 구르며 소리를 냈다. 오은호의 방에선 작은 전등이 깜빡였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기계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인출 실패 보전]
[보증 계정 필요]
[가장 가까운 퇴사자: 차도윤]
내 발밑에 둥근 은행 창구 창이 열렸다. 아래에는 돈도 사람도 아닌, 다 쓰지 않은 퇴사 신청서 수천 장이 쌓여 있었다. 그 위로 목소리가 올라왔다.
“고객님, 아직 거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거래를 시작한 적도 없는데요.” 내가 답했다.
“시작하지 않은 거래가 저희의 주력 상품입니다.”
나는 문서윤을 돌아봤다. 그녀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더니 말했다.
“그러면 거래하지 않겠다고 남겨야죠. 구조부터 끝냅시다.”
우리는 기계 앞을 떠났다. 은행의 거래 내역이 아니라, 구조대가 손으로 열어 가는 실제 피난 문의 경첩 소리가 나를 따라왔다.
제2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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