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똑같은 목소리가 “제가 대신 들어갔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야근 인수인계표였다. 담당자 이름 옆에 ‘확인’이라고 써 놓으면 실제 담당자는 내용을 읽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걸 모르고 도장을 찍던 관리자들만 제외하면.
“안에 있는 분, 우선 지금 있는 위치를 말씀해 주세요.” 문서윤이 비상 통화기를 향해 말했다.
“발전기실과 연결된 점검 통로요. 바닥은 마르고 공기는 괜찮아요.” 여자가 답했다. “여기엔 저랑 김태식 씨가 있어요. 명찰엔 박지수라고 적혀 있지만 저도 진짜 이름이 박지수인지 모르겠어요.”
“왜요?”
“아침까진 다른 회사에서 야간 결제 시스템을 점검하던 직원이었거든요. 여기 온 뒤에 명찰이 바뀌었어요.”
명찰이 바뀌었다고 본인의 과거를 잃는 건 아니다. 나는 수화기 옆 스피커를 꺼서 방화문 안의 대역 목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다시 훔쳐 가지 못하게 했다. 서윤은 통화 녹음 시작 시각과 실제로 말한 사람을 구분해 적었다.
배 소장은 설비 도면을 펼쳤다. 지하 2층과 점검 통로 사이에는 방화문 말고도 구형 배관 유지 보수용 뚜껑이 있었다. 사람이 지나갈 크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통신선을 우회시키거나 작은 장비를 전달하는 건 가능했다.
“이쪽 밸브를 함부로 열면 안 됩니다.” 우찬이 경고했다. “전기 케이블 관로가 겹쳐 있어요.”
“그럼 열지 않겠습니다.” 서윤이 대답했다. “우리는 설비를 부수러 온 게 아니니까요.”
나는 문 위의 이상한 서류 세 장을 휴대전화로 비췄다. 종이는 문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글자를 쓰며 표면에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제목은 모두 똑같았다.
[계약 종료 증빙 반환]
여자는 안쪽에서도 같은 제목의 종이가 보인다고 했다. 대신 문 안에서는 ‘반환 대상’의 이름이 계속 바뀌었다. 박지수, 김태식, 그리고 내 이름. 이 세 장을 모두 확인하면 자동으로 방화문을 열겠다는 조건이었다.
“문을 열게 하려고 서명을 받는 걸까요?” 배 소장이 물었다.
“문을 열겠다는 약속만으로는 부족하죠. 그 문을 통과하면 누가 어디로 옮겨지는지도 봐야 합니다.” 나는 말했다.
우찬이 감시실에서 방화문 제어 시스템의 시험 로그를 가져왔다. 거기에는 ‘점검자 세 자리 확보’라는 낡은 표기가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사람이 서는 안전 위치, 셋째는 구조용 이동 장비를 대기시키는 빈 공간이었다. 사람 세 명이란 뜻이 아니었다.
“그럼 세 번째 두드림은 장비였나요?” 서윤이 물었다.
우리는 설명을 들은 뒤 실제 소리를 다시 요청했다. 안쪽에서 두 번의 손바닥 소리가 들렸고, 한 번은 규칙적인 금속 타격이 이어졌다. 김태식 씨가 바닥의 수동 펌프를 발로 눌러 밖에 신호를 보낸다고 했다. 화면에서 사람처럼 보이던 세 번째 실루엣은 펌프의 움직임을 잘못 읽고 만든 영상 대역이었을 수 있었다.
다만 그것만으로 안에서 나를 흉내 내던 목소리의 실체까지 설명되진 않았다.
“세 번째가 사람이 아닌 건 알겠네요.” 내가 말했다. “그런데 이 서류 인간은 왜 저랑 닮아 가죠?”
화면의 대역은 고개를 기울였다. 영상 속 입술이 움직이며 말했다.
“구조 책임자는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저는 현장에 있는데요.”
“현장에 있다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제가 여기 서 있는 걸 확인하려고 저를 하나 더 만들겠다고요? 인사팀이 그 정도로 멀티태스킹을 요구하진 않았는데.”
서윤은 대역을 상대하지 않고 우찬에게 외부 구조대 도착 예상 시간과 현장 지휘 인계를 다시 확인했다. 실제 소방대는 출동 중이었다. 건물의 0층 현상 때문에 출입 기록이 이상해도 실제 현장 위험과 구조 통로를 설명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문을 강제로 열면 안쪽 환기 흐름이 바뀔 수 있어요.” 서윤이 말했다. “정상 설비와 이상한 승인 시스템을 분리하는 방법이 먼저입니다.”
배 소장은 문제의 온도 상승 원인을 찾았다. 방화문 위의 배선함에 건물의 비상 방송선과 공동 운영 시험 장치가 연결돼 있었다. 시험 장치에서 뜨거운 공기가 나오는 건 아닌데, ‘대역 승인 대기’가 계속 발생하면서 실제 전기 개폐기가 반복 동작해 과열되고 있었다.
“실물 전원을 차단하면 방화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먼저 검증해야 한다.” 소장이 말했다.
“그건 우찬 씨와 건물 시설팀이 직접 해야죠. 우리는 기록을 맡겠습니다.”
우찬은 점검 매뉴얼에 따라 안전한 예비 회로로 전환했다. 방화문은 닫힌 상태를 유지했지만 과열 신호가 서서히 내려갔다. 소방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사람 둘이 숨 쉬고 통화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 순간 내 휴대전화 화면에 새로운 팝업이 나타났다.
[외부 복구팀 현장 진입 요청]
[대역 차도윤: 확인 완료]
[원본 차도윤: 서명 대기]
나는 팝업을 닫았다. 화면 아래 작은 글씨가 보였다.
[대역의 진술과 원본의 진술이 불일치할 경우, 원본을 대역에 맞추어 수정]
“이런.” 나는 중얼거렸다. “우리 회사는 드디어 진실을 버전 관리로 해결하려는군요. 최신 파일만 남기고.”
문서윤은 내 손에 종이를 쥐여 줬다. 볼펜으로 적은 짧은 문장이었다.
[차도윤 본인, 구조 승인 서명 안 함. 23:21. 목격 문서윤·배만식·정우찬.]
“이걸 실제 종이에 남겨야 해요. 화면이 어떤 문장을 덮어쓰든 대조할 수 있게.”
나는 서명했다. 대역처럼 행동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 내가 지금 무엇을 했는지 나중에도 구별할 수 있게 하려는 서명이었다.
문 너머 박지수가 말했다. “여기 안에도 세 번째 종이 사람이 저희 얼굴을 따라 하고 있어요.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건 저희 둘뿐이에요.”
“혹시 종이에 무언가 적혀 있나요?”
“있어요. ‘인출 가능 인원 두 명’.”
나는 순간 은행이라는 장소를 떠올렸다. 인출이라는 단어는 이 회사가 병원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사람을 무슨 돈처럼 꺼내겠다는 거야?” 배 소장이 씁쓸하게 말했다.
우찬이 금고 설비와 연결된 구형 공동 시험 장비의 명칭을 찾아냈다. '보관 자산 출입 정산 모듈.' 그 밑에는 작은 안내가 있었다. 환불 대기 계정과 직원 출입 기록은 본래 연동할 수 없다는 금지 조항이었다.
그런데 화면에 다른 숫자가 떠올랐다.
[인원 인출 한도: 2]
[실제 응답 인원: 2]
[대역 인원: 1]
[인출 신청자: 차도윤]
한도가 딱 맞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수상했다. 시스템은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을 ‘인출’해 자기 계산을 끝내려고 하고 있었다.
“지수 씨, 태식 씨.” 나는 수화기를 잡았다.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돕겠습니다. 다만 어떤 곳으로 이동할지는 여러분이 안전을 확인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네. 저희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지수가 말했다.
그때 안쪽의 대역이 나와 똑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두 사람만 데리고 가면 됩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김태식이 멀리서 외쳤다.
“잠깐만요! 지금 방 안쪽 문을 누가 두드려요. 저희 둘 다 여기 있는데!”
금속 펌프의 소리와는 달랐다. 바닥 아래, 아무 설비도 없는 벽에서 아주 느린 네 번째 두드림이 시작됐다.
쿵. … 쿵. … 쿵. … 쿵.
화면에 새 메시지가 켜졌다.
[정산 불가: 보관 인원 원본이 한 명 더 존재합니다.]
제2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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