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목소리의 정체를 물을 틈은 없었다. 도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윤 씨, 뒤로!"
문서윤의 외침에 몸을 숙였다. 거대한 도장이 내 머리 위를 스쳤고 등 뒤의 파티션에 '책임자'라는 글자를 찍었다. 플라스틱 칸막이가 종잇장처럼 접혔다. 평생 업무 책임을 강조하던 회사가 마침내 책임자를 물리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퇴사자를 업무에 다시 배정할 수 있다고?" 나는 허공에 떠 있는 글자를 노려봤다. "누가 승인해?"
[예외 처리 권한자: 본사]
"여기가 본사잖아."
[본사가 아닙니다.]
등골이 식었다. 열한 층이 갑자기 던전이 됐다는 것보다 저 문장이 더 무서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사 건물이 이제 누군가에게는 본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두 번째 출구를 찾았다. 바닥의 파란 화살표는 아직 살아 있었다. 다만 방향이 달라졌다. 유리벽 밖의 문이 아니라 복도 안쪽 화장실을 가리켰다.
복도 입구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재무팀 직원이 쓰러진 동료를 업으려다 함께 넘어졌고, 누군가 사무실 책상을 끌어다 유리문 앞에 쌓고 있었다. 문서윤은 책상을 치우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이 어디로 도망갈 수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스프링클러는 천장에서 검은 물을 뿌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타지 마세요!" 그녀가 외쳤다. "계단으로 이동하고, 부상자는 가운데로!"
나는 서윤이 몇 달 전 비상 훈련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시 직원들은 귀찮다며 계단을 내려가다 편의점으로 빠졌고, 황 팀장은 훈련 시간이 낭비라고 불평했다. 서윤은 끝까지 한 명씩 확인했다. 사람들을 숫자로 세는 게 아니라 실제로 안전한 장소에 도착했는지 보려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쓰러진 직원을 문 옆 의자에 앉혔다. 그가 내 소매를 잡았다. "밖에 연락 좀 해주세요. 아내한테 애 데리러 가라고 해야 합니다."
"제 전화로 한번 해볼게요." 휴대전화를 들어 보니 통화 연결음만 들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수신 화면에 아내의 이름 대신 회사 대표번호가 나타났다. 상대편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퇴사자는 연결할 수 있습니다. 재직자는 연결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잘못된 연결 하나를 믿고 가족에게 위험한 말을 전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통화가 안 되네요. 대신 성함을 적어둘게요. 연결되면 가장 먼저 연락할게요."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두고 떠나는 발이 무거웠다.
"나한테만 저 화살표 보이나요?"
"무슨 화살표요?" 문서윤이 물었다.
나는 자세히 설명할 틈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금부터 제 말 믿어 주세요. 한 번만."
"한 번으로 안 끝날 것 같은데요?"
"좋은 질문입니다.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우리는 뛰었다. 민재가 뒤따랐다. 사무실 끝 화장실 문에는 검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긴급 피난구 / 퇴사자 전용]
"화장실이요?" 민재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선배가 요즘 퇴사하고 싶어 하시더니 현실도 그 수준으로 가네요."
"입 닫고 뛰어."
문을 열었다. 세면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좁은 계단이 있었다. 계단의 아래에서 고속도로 같은 차량 소음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 소리 사이에 냉장고 압축기처럼 울리는 기계음이 끼어 있었다. 현실의 바깥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먼저 발을 디뎠다. 계단은 묵직하고 차가웠다. 두 번째 칸을 내려가자 손목에 메시지가 떴다.
[퇴사자 이동 허가: 차도윤]
[동행자 2명 감지]
[동행자 자격 조회 중]
문서윤이 뒤에서 내 어깨를 잡았다. "왜 멈춰요?"
"이 계단이 우리 셋을 전부 보내 줄지 확인해야 해요."
계단 아래쪽이 움직였다. 콘크리트가 고무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아래에서 올라오던 빛을 집어삼켰다. 잠시 뒤 계단 끝에 커다란 문이 보였다. 문에 붙은 작은 명찰 두 개가 자꾸 바뀌었다.
[차도윤: 통과]
[강민재: 보류]
[문서윤: 보류]
"역시 그렇군요." 문서윤은 명찰을 읽지 못했지만 내 얼굴을 보고 알았다. "우리는 못 지나가죠?"
"아직은요."
사무실 쪽에서 도장이 유리를 부수는 소리가 났다.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나는 계단 옆 금속 배관을 두드렸다. 건물을 이리저리 뜯어놓아도 물이 지나가는 배관은 남아 있었다. 실내의 공기가 서늘했다. 아래쪽에 공조 시설이 있다는 뜻이었다.
"여긴 피난구가 아니라 사람을 가르는 검사대일지도 몰라요." 나는 말했다. "만약 퇴사자 자격 때문에 나만 나갈 수 있다면, 굳이 여러분을 이리 데려온 건 실수죠."
문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실수가 아니라 정보죠. 우리한테 필요한 건 진짜 비상구가 따로 있다는 정보."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안전관리팀이 매달 점검할 때 쓰던 것이었다. 열한 층과 열두 층 사이에 실제 피난 계단이 있었고, 그 끝은 지상 북문으로 이어진다. 마침 이번 주에 방화문 교체 작업이 예정되어 있다는 메모도 있었다.
"회사가 잘난 척하며 뿌린 조감도보다 이 종이가 훨씬 믿을 만하네요."
"그 말은 제가 회의 때마다 하고 싶었어요."
내 눈앞에 갑자기 다른 메시지가 겹쳤다.
[퇴사자 전용 도움말]
[현재 건물은 일반 업무 공간이 아닙니다.]
[내부 규칙을 '던전'이라고 부르는 외부 신고 1건이 존재합니다.]
"외부 신고?"
외부에서 이미 이 건물을 봤다는 뜻이다. 나는 손목의 글자를 눌러봤다. 글자가 물처럼 퍼지더니 작고 낯선 화면이 열렸다.
[신고 시간: 17:58]
[신고자: 차도윤]
나는 숨을 멈췄다. 17시 58분이면 아직 사직서 승인 전이었다. 그때 나는 분명 자리에 앉아 수하물 상자를 접고 있었다. 누구에게 신고한 적도 없다. 그런데 신고 사유에는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제발 열한 층의 문을 열지 마세요.]
"왜 그래요?" 문서윤이 물었다.
"제가 보내지 않은 신고가 있어요."
"회사 계정이 도용된 건가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저 문장이 문제예요."
나는 열한 층 문을 열었다. 아까까지 복도 끝에 있던 사무실은 없었다. 길고 축축한 물류 창고가 펼쳐졌다. 종이 상자 사이를 검은 정장 소매가 기어 다녔다.
우리는 뒤로 물러났다. 계단 입구는 이미 사라지고, 깨진 타일 벽만 남았다. 가볍게 웃던 민재의 숨소리가 길어졌다.
"선배, 저한테 솔직히 말해요. 여기가 왜 이래요?"
"나도 몰라. 그래도 어딜 가야 하는지는 찾을 수 있어."
나는 화살표를 따라가려 했지만, 방향 표시가 두 개로 갈라졌다. 하나는 북문을 향했다. 다른 하나는 건물의 실제 설계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0층'으로 향했다.
그때 문서윤의 무전기가 울렸다.
"안전관리실, 들립니까? 여기는 배만식입니다. 지하 설비실에서 사람이 올라오고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직. 찢어진 소리 뒤에 거친 숨이 들렸다.
"문서윤 대리, 거기 누가 있습니까?"
"차도윤 씨랑 강민재 씨요. 무슨 일이에요?"
"차도윤?"
배만식이 그 이름을 다시 발음했다.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 사람 지금 회사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방금 관리실에 퇴사자 사망 통보가 내려왔어요."
"뭐라고요?"
"사망 시간 18시 01분. 그런데 발신이…"
무전이 끊겼다. 나는 무전기 화면에 떠오른 마지막 한 줄을 보았다.
[사망 통보 정정: 차도윤은 현재 생존 중]
그 아래 새 글씨가 천천히 찍혔다.
[회수 담당자를 파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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