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은 자기 이름으로 된 출입증을 발급받겠다고 했다. 나는 축하했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내 얼굴과 일부 기억을 가진 채 도원솔루션의 0층에서 나타났고, 시스템은 그를 내 대체 근무자로 등록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내가 고르지 않은 이름을 쓰고 내가 사지 않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서류에는 생년월일이 있어야 한다네요." 하진이 말했다. "제가 생긴 날은 아는데 태어난 날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아는 것만 적으면 되죠. 없는 걸 만들어 쓰는 건 원래 회사가 잘합니다. 따라 할 필요 없어요."
공공 신원 지원 담당자는 긴급 보호용 별도 신분 확인 절차와 임시 출입 허가를 안내했다. 기존 인물과 동일하다고 선언하지 않아도 안전 구역을 방문할 방법이 있었다. 임시 출입증은 사람의 법적 신원을 결정하는 서류가 아니라 현장 책임자가 확인한 방문 범위만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하진은 그것을 스스로 받아 들었다. 출입증에는 `하진 / 관측 보조 / 현장 진입 승인 아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전 회의에서 태형공간자산은 반대 제안을 냈다. 공간 중첩 현상을 계속 추적하기 위해 하진을 '원본 차도윤의 환경 재현 대조군'으로 두겠다는 것이다. 대가로 생활비와 숙박비를 준다고 했다. 현금이 필요한 사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는 조건 자체를 비웃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의 다른 조항을 읽어 보았다.
`본인 또는 원본 동일인 인식 결과에 따른 자율 이동 제한 가능.`
"생활비 지원에 자유 제한이 덤으로 붙네요." 내가 말했다.
하진은 계약서를 접었다. "제가 누구랑 같은지 확인할 수 없다면서, 왜 자유를 제한할 때만 같다고 하나요? 거절하겠습니다."
그의 선택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다. 태형은 하진과 내 얼굴이 찍힌 영상들을 이용해 019-3 관측면의 '두 장소 동시 입회' 요건을 충족시켰다고 주장하려 했다. 동일하게 생긴 두 사람이 각 현장에서 찍혔으니 한 사람이 두 곳을 동시에 확인한 것처럼 처리하려는 것이다. 정상적인 말로 번역하면 인증을 가장한 사기였다.
오재현은 해당 절차를 중단하고 영상의 촬영 시각과 실제 출입 범위를 재조사했다. 하진은 자신이 참석한 곳과 참석하지 않은 곳을 하나씩 확인했다. 가끔은 본인도 기억이 흔들려서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사실도 그대로 남겼다. 불확실하다는 답을 허락해야 거짓 확정을 막을 수 있다.
점심 무렵 도원솔루션 지하 출입구에서 이상 신호가 발생했다. 하진의 영상이 자동 재생되면서 실물 회의실 벽이 금융센터의 넓어진 문틀로 바뀌기 시작했다. 직원 두 명은 회의실에 들어갔다가 복도가 낯설게 변해 제자리에서 멈췄다. 문서윤은 즉시 현장 피난 안내와 임시 폐쇄를 요청했다. 나는 시설팀과 함께 수동 안전 경고를 내보냈다. 회사 시스템은 `관측 성공 / 대조군 입장`을 표시했지만 실제로 하진은 현장에 없었다.
"이건 제 영상인데, 제가 만든 결과는 아니에요." 하진이 전화로 말했다.
"압니다. 지금 그 영상을 승인에서 떼겠습니다."
우리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사진에 붙은 관측 토큰을 찾아 격리했다. `HJN-MATCH`라는 토큰은 도윤의 사원번호가 아닌 태형 외주 장치에서 발급한 영상 비교값이었다. 이름과 얼굴이 비슷하면 동일인을 강제로 만들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잘못됐다. 토큰 격리 뒤 회의실 벽의 변형이 멈췄다. 이미 움직인 문틀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배만식은 안전 받침대를 추가했다.
현장에 도착한 하진은 나와 나란히 서서 변형된 벽을 바라봤다. 그는 나처럼 한쪽 눈썹을 올리지 않았다. 대신 난간 아래를 오래 보았다. "이게 제 기억처럼 느껴지던 장면입니다. 그런데 정말 제 기억인지는 모르겠어요."
"그걸 꼭 오늘 알아야 합니까?"
"아니요. 제가 오늘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다."
하진이 현장 방문 시간을 스스로 적는 순간, 태형의 출입 기록 서버에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차도윤 복귀 / 하진 대체 승인]`. 알고 보니 비슷한 얼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같은 공간에 있을 때, 자동화는 둘 중 하나를 원본으로 골라 다른 하나를 그 자리에 덮어쓰게 돼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막아 온 원본-대역 병합의 새로운 우회로였다.
하진은 급하게 서명하지 않았다. "제 거절을 기록해 주세요. 어느 쪽이든 대체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의 옆에서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이 충분했다. 서윤이 두 사람의 응답을 따로 보존했다.
그때 장혜원이 가져온 옛 관측 사진에서 비슷한 장면을 발견했다. 사진에는 019-3의 두 관측 위치와 안전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한 명은 카메라를 향하고 다른 한 명은 등을 보였다. 얼굴은 식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진 아래의 주석에는 `인원 2, 관측값 1`이라고 적혀 있었다. 회사는 이 기록을 관측자 한 명으로 줄였고, 결국 공간이 하나여야 한다는 명령으로 바꾸었다.
"두 사람이 하나의 결과를 확인했다고, 그 사람들이 한 명이 되는 건 아니죠." 서윤이 말했다.
"기획서에는 그런 말이 없었겠죠." 나는 대답했다.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는 늘 짧으니까요."
하진은 먼저 가겠다고 했다. 그는 강변 안전 점검에는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처럼 얼굴 대조 자동화가 활성화된 곳에 가는 일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왜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병원에서 명주 둘을 만날 약속을 잡았다. 둘 다 스스로 이름과 얼굴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처음부터 같은 기억을 가졌다는 사실보다 서로 다른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진은 현장을 떠나기 전에 내가 꺼내지 못한 말을 해 주었다. "우리가 같은 얼굴이면 사람들은 늘 누가 먼저였는지 물어요. 그런데 먼저였다는 사실이 더 많은 권리를 준다는 뜻인가요?" 나는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아니요. 다만 처음 나타난 기록과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뜻이겠죠." 그는 수첩에 그 말을 적고 내게 보여 주었다. 자기 이름 아래에는 아주 단순한 한 줄이 있었다. '오늘의 위치는 내가 고른다.' 그걸 보면서 나는 0층에 남은 빈 의자가 왜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야 했는지 조금 이해했다.
저녁에 하진은 나에게 한 장의 사진을 보냈다. 탁 트인 하늘 아래 놓인 의자, 그 옆의 노란 운동화. 사진 속에는 사람이 없었다. 메시지는 짧았다. `제가 가고 싶은 곳에 갔습니다. 누가 대신 출근하라고 해도 안 갈 겁니다.`
나는 사진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진에게 '고맙다' 대신 '잘 쉬라'고 답했다. 누군가를 구했더라도 그 사람이 다시 나를 도와줄 의무는 없다.
그날 밤 019-3의 원본 보존 장치가 이상한 작업을 시작했다. `[관측자 수: 2 / 기록상 정본 수: 1 / 남는 관측자 자동 정리]`. 이것은 사람뿐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생긴 틈을 하나의 공간으로 접겠다는 명령이었다. 나는 작업 자체를 보류했다. 그런데 마지막 항목 하나가 따로 남았다.
`현장 실제 관측자 2명 / 첫 관측자리에서 돌아온 사람 수: 1 / 다른 한 명: 귀가 기록 없음.`
하진의 선택을 지킨 날, 우리는 과거 019-3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문밖에 있던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더 있었을 가능성과 마주했다. 다만 귀가 기록이 없다는 것만으로 지금도 갇혀 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사람을 먼저 찾고, 기록은 그다음에 믿을 것이다.
제17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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