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 코드 1758 / 최초 외부 경고]
종이 뒷면에 찍힌 문구였다. 나는 이명주가 준 열쇠를 뒤집어 봤다. 1758이라는 숫자는 내 퇴사 승인보다 삼 분 빠른 시각과 같았다. 하지만 병원 기록에는 이 장비가 삼 년 전부터 켜져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날짜와 장비 번호가 우연히 일치했을까,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같은 숫자를 선택했을까.
“이걸 바로 신고 장비라고 결정하면 안 되죠.” 나는 서윤에게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여기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어요.”
“맞아요. 그래서 증거가 여러 개 필요합니다.”
서윤은 병원 시설팀의 도움을 받아 무전실 옆 창고 목록을 확인했다. 장비 도면에는 1758이 단순한 무선 중계기가 아니라, 사용자가 현장에서 직접 누르는 별도 위험 신고 장치로 나왔다. 통신망이 끊겨도 종이 기록을 남기고 외부 관제실에 신호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오래된 공장 비상 호출기와 비슷했다.
“장비만 있으면 밖에 알려 줄 수 있겠네요.” 서윤이 말했다.
“누가 누른 건지는 아직 모르지만요.”
우리는 장비실로 이동했다. 복도의 병원 안내 전광판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0층 표시는 지워지지 않았다. 건물이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의료진이 위험을 계속 떠안을 수 있었다. 서윤은 시설 당직자에게 이곳을 출입 금지로 막는 대신, 물리적으로 안전한 구역과 미확인 구역을 구분해 표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어설픈 임시 수리가 다른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까 봐 배선에 손대지 않았다.
장비실 문은 반쯤 열린 상태였다. 안에는 단자대와 오래된 프린터가 쌓여 있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종이 뱀 같은 것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기계가 실제로 작동하는 소리, 느릿느릿한 팬의 회전음이 들렸다. 내가 아는 소리였다. 누군가 중요한 장치를 24시간 켜 놓았을 때 나는 특유의 진동이었다.
“이렇게 오래 켜 둔 이유가 뭘까요?”
이명주가 문 옆을 두드렸다. “끊으면 밖과 연결된 증거가 사라져요. 그래서 끊지 않았어요.”
그는 자신이 이곳에 갇히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경고음을 기억했다. 낮은 음 세 번, 높은 음 한 번. 지금은 다른 기계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청력에 의존하지 않고 장치의 물리 기록을 확인했다. 팬 옆에 좁은 종이 배출구가 있었고, 배출구 아래에는 종이 뭉치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프린터 용지가 몇 년이나 버틸 수 있죠?”
“한 번에 그렇게 많이 찍은 게 아니에요.” 이명주가 말했다. “장비가 켜질 때마다 한 줄씩 남겨요.”
우리는 시설 담당자의 입회 아래 가장 최근 출력물의 공개 부분만 확인했다. 개인정보가 있는 줄은 가리고 장비 코드와 상태만 기록했다. 맨 마지막 줄에는 오늘의 날짜와 시각이 찍혀 있었다.
[2026-10-31 17:58]
[수동 경고 출력]
[전송 상태: 외부 수신 불명]
“누가 눌렀죠?” 서윤이 물었다.
“모릅니다.” 이명주가 말했다. “이 장비는 발신 이름을 쓰지 않아요. 사람을 특정하지 않는 대신 신호가 먼저 가게 만들어졌거든요.”
나는 출력물의 한쪽 모서리를 살폈다. 거기에는 장비 번호가 아니라 작은 구멍 네 개가 있었다. 구멍 사이에는 붉은 실 조각이 끼어 있었다. 이름 없는 아이의 팔찌와 색깔이 비슷했다. 그러나 비슷한 색이라는 이유로 아이가 버튼을 눌렀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 기록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이명주가 말했다. “내가 책임자라서가 아니라, 여기서는 제일 오래 보고 있었으니까.”
서윤은 원본을 가져가지 않고 시설팀 보존함에 두자고 했다. 밖으로 나간 증거의 사본은 시설 담당자와 이명주가 각각 확인했다. 기록이 하나뿐이면 마음만 먹고 수정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이 서로 다른 장소에 보관하면 적어도 하나가 변조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장비가 두 번 울렸다. 실제 경보음이었다. 첫 번째는 낮게, 두 번째는 높게 울렸다. 내가 팬 전원을 보자 옆 모니터에 새로운 상태가 나타났다.
[외부 관찰자 연결 요청]
[확인 위치: 도원솔루션 조정실]
나는 즉시 무전기를 집었다. “배 소장님, 조정실 아이는 괜찮아요?”
“여기 있어. 민재랑 서지완도 옆에 있다. 근데 그 애가 방금 귀를 막았어.”
“무슨 일 있었어요?”
“작은 선이 울렸다고 하더라. 아무도 누르지 않았는데.”
나는 장비실의 구멍 네 개를 봤다. 구멍은 장비 뒷면의 기계식 선택 장치와 연결돼 있었다. 버튼을 누른 사람의 이름 대신, 위험 신고가 발생한 장소와 기계 상태만 남기는 구조였다. 누군가 외부 관찰자 자격으로 이 신호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바로 아이의 정체를 뜻하지는 않았다.
“아이한테 아무것도 누르게 하지 마세요. 본인이 원할 때만 확인하도록 하세요.”
배 소장이 낮게 대답했다. “이미 그러고 있어. 그 애는 지금도 밖에 나가고 싶다고 한다.”
나는 손에 든 노트를 덮었다. 아이를 보호한다는 말로 조정실에 계속 머물게 두는 것도 잘못이었다. 출구를 찾을 방법을 충분히 설명하고 아이가 안전한 선택을 하도록 돕는 게 필요했다. 그건 현장 안전 판단과 아이의 의사 확인이 함께 필요한 일이었다.
서윤은 무전실 바깥 복도에서 실제 외부 소방 담당자와 연결했다. 위험 사실과 병원 출입문의 현재 상태를 알리고, 관제실에 저장된 이상 경고의 수신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통화는 짧았다. 담당자는 17시 58분에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안전 경고 한 건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건물명은 공란이고, 발신 코드만 1758이었다.
“신고가 들어간 건 맞습니다.” 서윤이 말했다.
“사람 이름은요?”
“없어요. 애초에 이름을 받아 적지 않는 장치였대요.”
나는 17시 58분에 내가 신고했다는 의혹이 왜 생겼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시스템이 나를 외부 복구팀으로 등록하면서 사람 없는 경고 신호에 내 이름을 덧씌웠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가설이었다. 확실한 건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가 위험을 먼저 알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프린터 밑의 오래된 경고 시험 지침도 살폈다. 거기에는 '무응답은 위험 해제의 증거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굵게 적혀 있었다. 반대로 누군가 응답했다고 해서 현장 위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이 장치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설계자는 적어도 그 차이를 이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페이지를 보며 어쩐지 위로를 받았다. 우리의 문제는 모든 기록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었다. 원래 사람을 보호하도록 만든 기록을 후대의 자동 처리기가 엉뚱하게 쓰고 있는 것이었다.
장비가 마지막으로 한 번 울렸다. 프린터에서 짧은 쪽지가 나왔다.
[1758 회선 보호 시간 종료 예정]
[다음 경고부터 발신자 자동 지정]
[기본 지정자: 차도윤]
나는 쪽지를 읽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위험을 알리는 일까지 특정 사람의 책임으로 자동 배당하다니. 회사는 정말 끝까지 사람을 업무 항목으로 만들 셈이었다. 중요한 건 이 장비를 끄지 않으면서도 이름이 자동 지정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었다.
“우리 회사는 퇴사자한테 책임을 넘기려다 결국 전 세계 신고 전화를 저한테 받게 만들려고 하는군요.”
“농담은 그만해요.” 서윤이 말했다.
“저도 농담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 휴대전화에 황 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문자도 자동 공지도 아닌 일반 전화였다. 화면의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나는 서윤에게 내용을 함께 들어 달라고 했다.
“황 팀장님, 이제 그만 숨기고 설명하시죠.”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윤아. 네가 0층을 말하면 그쪽이 네 말을 계약으로 저장해.”
제1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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