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도원솔루션 0층 회의실에는 오래된 안내소 우편함이 그대로 있었다. 직원들은 그 앞을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출근 도장을 찍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고, 나중에는 우편함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업무에 충실한 회사답게 안내문이 붙었다. `임시 우편함 사용 금지 / 수신 확인 시 인사 반영 가능성 있음.` 나는 그 아래 작은 글씨를 덧붙였다. `사람 목소리 들리면 인사팀 대신 구조대 연락.`
강민재가 밤새 준비한 것은 자동 분석 보고서가 아니었다. 도원 복도와 강변 019-2 앞의 실제 기압·습도·온도 자료를 손으로 대조한 표였다. 사진 속 강변의 우편함은 창문 높이보다 낮았다. 그런데 도원에 나타난 우편함은 복도 바닥에서 두 손바닥 높이 떠 있었다. 누군가 옛 사진을 옮겨 놓은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물리적 차이였다.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어요.” 민재가 말했다. “도원에서 우편함이 젖으면 강변 쪽 보관함은 말라요. 같은 순간에 같은 장소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요.”
“그걸 입증할 수 있어?”
“아직은요. 지금은 관측 둘뿐이라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몇 달 전의 민재와 달랐다. 유능해졌다는 말보다, 모른다고 말할 줄 알게 됐다는 점이 좋았다.
우리는 우편함을 열지 않고 외부 스피커를 통해 안쪽 소리를 들었다. 고장 난 환풍기 소리와 함께 낯익은 회사 벨소리가 섞였다. `미처리 업무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음성은 없었다. 도윤이 아닌 직원의 이름을 강제로 붙이는 오래된 대역 안내일 수도 있어 저장된 소리와 실시간 음성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서윤이 문을 벌컥 열었다. “세림병원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복구 대상으로 등록됐던 휴게실이 응급실로 나타났대요.”
병원 응급실에는 새벽부터 환자가 밀려 있었다. 복도 한쪽 벽이 도원의 사무실 휴게실처럼 바뀌면서 산소통 보관 공간이 좁아졌고, 응급 환자를 밀고 가던 침대가 회전할 수 없었다. 환자 이름은 묻지 않았다. 의료진 박유라가 실물 동선을 파악했고, 나는 시설팀과 함께 침대가 지나갈 폭부터 확보했다.
“저 벽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까요?” 누군가 물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원래 복도 전체를 안전하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어요.” 서윤이 답했다.
우리는 다른 승강기를 이용해 환자를 먼저 옮겼다. 필요한 구역만 물리적으로 차단했고 산소 공급은 유지했다. 환자 이동을 완료한 뒤에야 벽에 나타난 도원 휴게실의 시계를 촬영했다. 바늘은 17시 54분에 멈춰 있었다. 지금까지 17:54는 최초 관측 스냅샷이 요청된 시각이었다. 그런데 왜 병원 휴게실까지 그 시각으로 고정됐을까?
답의 일부는 오승필이 제출한 새 문서에 있었다. 그는 병원 시설이 안정화된 대가로 `긴급 재현 공간 임시 관리권`을 신청했다. 겉으로는 병원 운영을 돕겠다는 내용이었지만, 첨부 도면에는 방금 등장한 휴게실을 임대 가능한 구역으로 표시해 두었다. 실제 사람을 피신시키는 동안 누군가는 새로 생긴 면적을 계산하고 있었다.
“저렇게 빨리 도면을 그릴 수 있어요?” 민재가 믿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
나는 서류 작성 시간을 확인했다. 신청서는 휴게실 벽이 나타나기 아홉 분 전에 임시저장돼 있었다. 오승필이 물리 현상을 예측했거나, 재현 예약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우연의 수준은 아니었다.
오재현은 그 사실을 정식 증거로 보존했다. 그는 업무상 이해관계를 밝혔고, 감사 권한과 구조 권한을 분리했다. 특정 업체를 의심한다고 시설 점검 자체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직 확인되지 않은 공간의 임대 등록은 중지시킬 수 있었다.
병원으로 돌아온 우리는 벽 앞에서 두 번째 이상을 목격했다. 휴게실 벽에 있던 `직원 전용` 글자가 지워지고, 대신 `대피 중`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젖은 벽이 마르면서 오래된 창틀이 드러났다. 그 너머로 강변의 가로등이 보였다. 실제 창문이 아니라, 어두운 밤의 강변을 현재 병원 안으로 붙여 놓은 듯했다.
“저 바깥은 아직 밤인데요.” 박유라가 말했다.
도원과 병원의 시간이 달라 보였다. 실시간 기상 정보와 창밖 풍경이 맞지 않았다. 누군가 원본 관측 사진을 정본으로 고정해 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화면이 보여 준 시간을 믿지 않고 실제 건물 밖의 시각을 따로 확인했다.
병원 시설팀이 마지막 침대를 옮긴 직후 우리는 강변 쪽의 실제 우편함 위치도 확인했다. 이선경은 기존 안내판 아래에 우편함을 고정한 볼트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원에 나타난 우편함에는 볼트가 없었다. 물건의 겉모습은 같아도 고정된 방법이 달랐다. 누군가 사진을 바탕으로 모양만 옮긴 듯했다. 나는 이것이 원본 보존 코일이 하는 일인지, 다른 장치가 개입하는지 단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도원에서 나온 물건은 원본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닐 수 있었다.
의료진은 보호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실제 환자 이동 경로는 확보됐습니다. 원인이 확인되지 않은 복도는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 안내를 듣고 한 보호자가 나를 붙잡았다. “회사에서 그런 걸 만들었다면서요. 그럼 여러분이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도원과 연결된 작업이 사고에 관여했다면 책임을 묻는 절차가 필요했다. 다만 나는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지금 당장 어떤 사실이 확인됐는지부터 설명했다. 법적 책임은 자료를 보존해 감사받겠다고 했다. 잘못한 사람을 아직 모르는 단계에서 무턱대고 이름을 내밀면 잠깐은 화를 잠재울 수 있어도 그다음이 위험했다.
보호자는 한참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을 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냥 우리 애가 있는 병실이 또 사라질까 봐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그제야 서류의 목적을 이해했다. 자동 보고서를 빨리 끝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오늘 밤 어떤 길을 지나갈 수 있는지 알려 주는 것이었다. 서윤은 작은 종이에 병원 담당자 연락처와 임시 통로 안내를 적어 건넸다. 공포를 없애 줄 수는 없어도, 확인 가능한 정보를 건넬 수는 있었다.
오후 네 시, 우편함에서 들어온 소리는 이제 분명한 한 문장이었다. `확인됐다고 처리하지 마세요.` 누가 말했는지는 모른다. 현재 통화인지 저장된 경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본 보존 규칙과 일치했다. 확인하지 않은 공간을 정본으로 만드는 순간, 실제 사람의 이동 경로가 사라질 수 있다.
그날 서윤은 내게 병원 복도 사진과 오승필의 도면을 동시에 보여 주었다. 두 그림의 우편함 위치가 정확히 같았다. 오승필이 쓴 도면에는 `019-2 원본 임대 기준`이라는 낯선 항목이 있었다.
“도윤 씨, 이 사람은 공간이 만들어진 뒤 팔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미리 팔아 놓고 나중에 만들려고 하는 거군요.”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더 큰 위험을 예상해야 했다. 누군가 강제로 관측 위치를 확정하면, 그 장소에서 피신하던 사람들에게 실제 물리적인 문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은 회사가 정한 주소로 사람들을 밀어 넣을지도 몰랐다.
마지막 자료에서 나는 서명되지 않은 `재현 일정 요청` 한 줄을 발견했다. 제출처는 태형공간자산의 외부 협력 서버. 예정 시각은 다음날 17시 54분. 설명란에는 단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최초 보관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최초 관측자를 대신 생성한다.`
제16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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