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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156화
PAYLUA ORIGINAL · 제156화

하진이 고른 바깥

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3,639자

오프라인 책장
하진이 처음 자기 이름을 고른 날, 나는 축하 대신 안전 수칙을 설명했다. 지금 생각하면 심각한 직업병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으로 서명이 위조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축하를 못 해 준 게 더 미안해졌다. 하진은 도원솔루션 정문이 아니라 근처 빵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빵집에는 직원 식권으로 결제할 수 있는 단말기가 없었다.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자기 돈으로 소금빵을 사 먹는 모습은 이상하게 평화로웠다. “오늘은 출근 안 할 겁니다.” 그가 말했다. “좋은 결정이야.” “그런데 누군가 제 출근을 예약해 놨죠.” 우리는 그의 휴대전화에서 `자동 승계인 하진 / 승인 예정 23:59`를 확인했다. 전자 서명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다만 서명 완료 예정 작업이 서버에 저장돼 있었다. 실행 전에는 막을 기회가 있었다. “제 이름을 지우면 끝나는 겁니까?” 하진이 물었다. “그러면 누가 대신 들어갈 수도 있어. 일단 자동 승계 기능을 중단해야 해.” “제가 직접 거부했다고 기록해 주세요.” 나는 그를 대신 입력하지 않았다. 오재현이 제공한 독립 이의 접수 양식을 하진 앞으로 놓았다. 하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자기 손으로 `이름 하진, 타인과 동일하다는 이유의 대리 서명 거절`이라고 적었다. 그에게는 아직 공적 신분 정보가 없었지만, 현장에서 본인이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남길 수 있었다. 하진은 자신의 글씨를 보고 한참 웃었다. “도윤 씨와 글씨가 다르네요.” “다행이다. 내 글씨는 인사팀도 못 읽어.” 그의 웃음이 조금 길어졌다. 아마 내 얼굴로 웃는 게 어색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내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내 결정으로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앞으로도 여러 번 확인해야 할지 몰랐다. 빵집 밖에서 서윤의 전화가 왔다. 태형공간자산의 자동 승계 예약은 오승필 개인 서버가 아니라 미래기록관리협의회의 오래된 `SAFE_EXIT_BACKFILL` 기능을 이용하고 있었다. 보증서에 서명이 없으면 가장 비슷한 이름과 얼굴로 대기 중인 사람을 채워 넣는 방식이었다. 이 기능이 처음에는 대피 경로의 빈 슬롯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이 더 끔찍했다. “하진 씨를 계속 도원 안에 두면 서버가 다시 인식할 수 있어요.” 서윤이 말했다. “그러면 밖에 있는 동안은요?” 하진이 물었다. “그것도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단지 문을 지나면 사람을 등록하는 기능이 살아 있는 곳이 문제죠.” 하진은 직접 제안했다. “저는 오늘 제 발로 18번 외부 경계 쪽에 가서, 제 이름이 아니라 제 선택으로 길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거기서 제가 자동 서명되지 않는지 살펴볼게요.” 나는 반대할 말을 찾으려 했다. 위험한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할 권리를 내가 빼앗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현장 안전 담당자와 동행 인원,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길을 확인한 뒤 그가 원한다면 참여하도록 했다. 오후 두 시, 하진은 도원 밖 공공 대기소에 도착했다. 안내에는 `관찰자 비직원 / 본인 동의 확인`이라고만 남았다. 자동으로 차도윤의 출퇴근 기록을 불러오려는 오류가 생기자 김하린이 독립 회선을 통해 이를 차단했다. 하진은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커피 컵과 그의 신발, 그리고 햇빛에 반짝이는 난간이 찍혀 있었다. `여기에는 제 그림자가 하나뿐입니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봤다. 화면 가장자리에는 019-B의 오래된 공공 신고함이 보였다. 어쩌면 그가 내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햇빛 아래서 자기 발로 서 있다는 사실이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18번 경계 반대편에서 새로운 이상이 관찰됐다. 하진이 대기소의 빈 의자에 앉자 도원 0층 모니터에도 같은 모양의 의자가 나타났다. 그 의자 위에 나와 닮은 그림자가 앉았다. 하진은 실제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는데 화면 속 그림자는 나를 똑바로 보았다. 나는 즉시 재생 시스템을 정지시키려다 지난 경험을 떠올렸다. 물리 경계가 영향을 받는지 먼저 확인했다. 다행히 대기소 바닥과 난간은 정상이다. 도원 모니터에서만 같은 자리가 반복됐다. “이건 저를 복사한 게 아니라 제가 앉은 자리만 복사한 건가요?” 하진이 물었다. “아직 몰라. 다만 네가 뭘 하든 안전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야. 현장 상태는 확인했어.” 하진은 스스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도원 화면 속 그림자도 한 박자 늦게 일어났다가 거꾸로 다시 앉았다. 누군가 이전 상태를 계속 붙잡으려 했다. 바로 그 패턴이 17시 54분 관측 스냅샷과 닮아 있었다. 도원 서버 로그에는 `관측자리 복원: 승인권자 필요`가 떴다. 승인권자 후보는 자동으로 `하진`으로 표시됐다. 오승필의 보증서가 시스템에 접촉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저는 어떤 자리의 원본도 아닙니다.” 하진이 현장 마이크에 또렷하게 말했다. “저는 지금 여기 있고, 이제 이 자리를 떠납니다.” 그는 직접 공공 대기소에서 나와 강변을 따라 걸었다. 도원 화면 속 의자는 잠깐 흔들리더니 사라졌다. 완전히 복구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제 승계 대기열에는 처음으로 `당사자 명시 거절`이 붙었다. 오재현이 실행을 중단하고 감사 기록을 봉인했다. 서명 예약 시각인 23시 59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다른 이름으로 다시 실행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발성 거절만 받는 게 아니라 그 기능이 왜 사람 이름을 필요로 하는지 끊어 내는 것이었다. 하진은 나에게 통화를 걸었다. “도윤 씨. 제가 오늘 확인한 건 있어요.” “뭔데?” “그 의자와 그림자는 제가 떠난 뒤에도 잠깐 남았어요. 제가 아닌 제 **방금 전 자리**를 붙잡는 것처럼요. 사람이 남아야 하는 게 아니라, 방금 전 상태가 계속 필요했던 것 같아요.” 나는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사람이 아니라 공간의 마지막 모습을 놓지 못하는 장치. 우리가 019에서 보았던 현상과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왜 그 상태가 벽과 복도를 실제로 만들 수 있는지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하진과 함께 걸었던 한서림은 그에게 바깥 대기소의 이용 규칙을 설명했다. 여기서 쉬는 사람은 회사 직원증을 보여 줄 필요가 없고, 떠날 때 출퇴근 버튼을 누를 이유도 없었다. 하진은 잠시 멈춰 서더니 “그럼 나간 기록도 없는 거네요”라고 물었다. 한서림은 손으로 출입문을 가리켰다. “나가도 됩니다. 하지만 안전이 걱정되면 어디로 가는지만 알려 주시면 도울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하진은 처음으로 웃으며 문턱을 건넜다고 했다. 빈자리를 지키는 것과 사람을 붙잡는 일은 같지 않았다. 하진이 그 차이를 몸으로 배우는 동안, 나는 도원에서 화면 속 빈자리가 왜 그토록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하진은 도원으로 돌아오지 않고 자기 선택으로 바깥 대기소에서 쉬었다.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위치 공유를 요구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인생의 시작에 필요한 건 감독이 아니었다. 잠시 뒤 내 휴대전화에 그가 보낸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처음 사진과 같은 커피 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컵 옆에 작은 메모가 놓여 있었다. `저는 여기서 나가도 괜찮습니다. 빈자리는 그대로 남겨 주세요.` 나는 웃었다. 나보다 내 얼굴을 더 잘 쓰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든든했다. 그리고 도원 0층의 화면에서 처음으로, 아무도 없는 의자 아래에 **`빈자리 보존: 가능`**이라는 글자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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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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