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문 앞의 출입 통제선이 두 배로 늘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위험을 잘 믿지 않는다. 특히 그 위험이 멀쩡한 보도 한가운데 생길 때는 더 그렇다. 시민들이 “공사하는 거예요?”라고 물으면 시설 담당자는 사실 그대로 답했다. 지반과 통로 상태가 안정되지 않아 잠시 우회해야 한다고. 굳이 던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실제 위험을 알려 줄 수 있었다. 나는 퇴사자가 아닌 민원 응대 직원처럼 서 있었다. 하필 내 손에는 남의 회사 로고가 찍힌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이 정도면 노동법보다 괴담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도원 0층에서는 `경계 직접 복귀`라는 문구가 일 분마다 반복됐다. 이전 같았으면 자동 프로그램을 강제로 종료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버실 B를 구조하던 날 배웠다. 연결된 통로의 원본을 끄면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의 발밑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서윤은 도원 쪽을, 배만식은 강변 설비 쪽을 맡았다. 김하린은 공공 신고 회선을 유지했다. 내게 주어진 일은 옛 시설의 점검 기록을 읽는 것이었다. 내가 프로그램보다 종이에서 더 많은 진실을 발견할 줄이야. 퇴사하며 반납한 노트북이 억울할 일이었다.
오래된 수첩 가운데 한 페이지가 눈에 띄었다. `계단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출입구로 사용 금지.` 그 아래 다른 필체로 `그래도 계단 아래에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메모가 있었다.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이선경이 당시 배수문 도면을 꺼내자 실물 설계에는 계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원으로 옮긴 설비의 점검 스케치에는 내려가는 계단 여섯 칸이 그려져 있었다. 민재가 화면에 두 도면을 겹쳤다. 서로 같아 보이던 치수가 정확히 한 칸씩 어긋났다. “형, 한쪽에는 첫 계단이 없고 다른 쪽에는 마지막 계단이 없어요.”
나는 외부 CCTV를 다시 봤다. 강변 배수문 틈으로 그림자 하나가 지나갔다. 형체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처럼 위아래로 흔들렸지만, 실제 물리적 깊이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옛 019에서 꺼낸 유리판의 잔상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그림자 뒤로 금속 가방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배만식이 초음파 센서와 열 감지 결과를 대조했다. “소리는 났는데 충격이 가해진 바닥이 없네요.” 민재가 속삭였다. “마술 같아요.” “마술이면 끝나고 관객이 박수라도 쳐 주겠지. 여기선 사고 보고서를 써야 한다.”
오성태는 아버지가 쓰던 오래된 수첩의 일부를 직접 읽어 주었다. 종이에는 커피 얼룩과 연필로 그린 나사가 있었다. `여섯 번째 계단은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보가 울리면 없는 쪽도 확인할 것.` 아버지는 어떤 날 점검을 마친 뒤 “누군가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 신호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적어 두었다고 했다. 오성태는 그 문장을 어린 시절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날 집에 와서 밥을 먹었어요. 그러니 사람이 갇힌 건 아닌 줄 알았죠.”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문장에 등장하는 누군가가 아버지인지 다른 현장 시험자인지는 아직 모른다는 점을 함께 확인했다. 오래된 가족의 기억을 시설 보고서의 확정 증언으로 바꾸는 일은 해서는 안 됐다.
오후 두 시에 실제 구조 요청이 들어왔다. 배수문 관리 직원 오성태가 점검 중 외부 안전 발판과 연결된 쇠사슬을 떨어뜨렸고, 사슬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쪽으로 끌려갔다. 그가 다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우리는 사람을 들여보내지 않고 전동 윈치로 사슬의 장력을 낮췄다. 사슬을 억지로 당기자 고정틀 아래 콘크리트가 흔들렸다. 배만식이 즉시 중지를 요청했다. 인양을 멈추자 진동도 멈췄다. 사슬 반대편에서 누군가 당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힘이 정말 사람에게서 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때 강변 감시 화면에 희미한 문자 한 줄이 나타났다. `발판 방향 복원 시뮬레이션.` 도원 서버는 이것을 `직원 복귀 완료`로 기록하려 했다. 서윤이 두 기록을 분리하자 시뮬레이션의 외부 화면만 남았다. 나는 거기서 뜻밖의 것을 발견했다. 사라진 첫 계단 자리에는 직사각형의 얇은 금속 덮개가 있었다. 그 크기는 019 원본 회신함 아래에 숨겨져 있던 `S-RIGHT`와 비슷했다. 이선경은 도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여기에는 실제 물체를 숨겨 두는 공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물체가 있어야 한다는 기억이 계단의 형태로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림자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던 시각, 도원 서버실 B의 기계식 시계는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17:57로 영원히 고정돼 있던 시계가 실제로 한 칸 움직인 것이다. 서윤은 바로 그 사진을 남겼다. 나중에 화면을 보니 바늘은 시간을 앞으로 움직인 게 아니라 세 초 뒤로 돌아왔다. 동기화가 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두 장소를 연결하는 통제값이 일방향이 아니라는 근거가 하나 더 생겼다. 나는 시계의 방향을 적고, 실제 강변의 물리 변화와 같은 시각인지 점검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가 필요한 건 근사한 설명이 아니라 사고를 막을 순서였다.
저녁에는 정하경이 과거에 남긴 공개 가능한 점검 메모를 다시 확인했다. `비상 방향은 계단으로 안내하지 않는다. 사람의 움직임을 유도하는 영상은 안전 승인 전 재생 금지.`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런 영상이라면, 0층은 장소가 아니라 잘못 재생되는 안내의 결과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건물의 바닥이 실제로 휘고 물건이 이동한 현상까지 영상이라고 단정하는 건 위험했다. 서윤은 원인 추정을 기록하고, 시민 접근은 계속 막기로 했다.
오후 네 시쯤 빗물이 고인 배수로에서 종이 한 장이 떠올랐다. 요즘 종이가 아니었다. 글씨는 거의 지워졌지만 `방향 표시 우선 / 발 디딤 금지`라는 경고가 남아 있었다. 시설팀은 위험선 안의 물건을 직접 주우려 하지 않았다. 물이 잦아든 뒤 정식 수거 장비로 회수했다. 그 종이는 수십 년 전 시설 수선 지시서와 서식이 비슷했다. 나는 종이가 지금 강물에서 흘러온 것인지, 과거 안내소에서 물리적으로 이동한 것인지 묻지 않고 먼저 종이의 상태부터 살폈다. 물에 젖어 글씨가 번진 종이는 서두를수록 더 상하기 쉬웠다. 오성태가 낮게 말했다. “아버지는 중요한 서류를 물에서 말릴 때 꼭 책 사이에 끼워 두셨어요.” 우리는 오래된 종이의 출처를 검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보존 담당자에게 물었다.
밤이 되자 오성태가 자신의 작업 일지를 가져왔다. 낮에 흘린 쇠사슬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시설 폐쇄 전 마지막 페이지에도 같은 번호가 등장했다. `쇠사슬 06 / 하부 계단 고정용 사용 금지 / 지하에 계단 없음.` 그는 표정을 굳혔다. “저 일지 쓰신 분이 제 아버지입니다. 여기서 오래 근무하셨거든요.” 수십 년 떨어진 두 날에 같은 쇠사슬이 계단을 향해 끌려간 것이다. 나는 구형 시스템이 흩어진 기록을 다시 연기시키는 것인지, 실제 공간이 두 시기를 겹쳐 놓은 것인지 고민했다.
그날 마지막 경고는 도원이 아니라 강변의 기계식 표지판에서 나왔다. `계단 표시 제거 전 외부 대기자 확인.` 바로 아래 작은 칸이 비어 있었다. `외부 대기자: ______.` 시스템은 또 그 빈칸에 차도윤을 넣으려 했다. 나는 거절했다. 그러자 빈칸이 사라지지 않고 새 문구로 바뀌었다. `대기자 대신 외부 상태를 확인할 것.` 오성태가 멀쩡한 보도를 가리켰다. “저기 비상등이 계속 켜져 있어요.” 그 불빛 아래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젖은 바닥에 발자국 두 쌍이 생겨났다. 한 쌍은 강 쪽으로, 다른 한 쌍은 존재하지 않는 계단 위로 이어지고 있었다.
제13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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