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아니라 나가지 못한 방향. 그 문장은 밤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컴퓨터에 방향을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 좌표, 층수, 통로의 연결 상태, 경보가 돌아오는 경로. 하지만 방향이 제 주인을 잃어버리면 실제 건물 속에 문이 생기는 것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0층이 처음 나타난 날부터 나는 기계가 뭘 잘못했는지만 찾았다. 이제는 기계가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도 봐야 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강변 옛 019 고정틀과 도원 0층을 동시에 관측하기로 했다. 누군가를 강제로 두 장소에 보내는 대신 공공 담당자와 시설팀이 각자의 권한에 따라 협조했다. 김하린은 1758 경보가 끊기지 않는지 확인했고, 배만식은 실제 구조물의 하중을 감시했다. 나는 도원에서 화면을 봤다. 서윤은 이번에는 현장 호출을 미리 나누었다. “실물 위험은 현장 팀이 먼저 멈춥니다. 도윤 씨는 모니터를 보고 건물 관리자 행세하지 말고요.” “퇴사한 사람이 그런 일 하면 재취업으로 처리될까 봐 무서워서라도 안 해요.”
신소림 씨는 자신의 기록을 공공 보존 담당자에게 정식으로 확인받았다. 그의 과거 근무 종료는 확인됐고 AH-07의 본래 뜻은 안전 경보 대리 접수 위치 코드였다. 이 확인서에는 2026년 도원 사고의 최초 시험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추측이 없었다. 하림 역시 지금의 자신의 안전한 외출 기록을 별도 보존했을 뿐 옛 출입증 이름을 법적 신원으로 확정하지 않았다. 윤상미 씨는 “이제 이걸 돌려줄 수 있겠네요”라고 말하며 오래된 수선 영수증의 원래 보관처를 담당자에게 맡겼다. 오래 묶여 있던 종이가 한 장씩 제자리로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열한 시 십칠 분, 도원 0층의 빈 상담실에서 또 다른 소리가 났다. 며칠 전처럼 금속판이 끌리는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종이컵에 물을 따르는 소리였다. 실제로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CCTV와 적외선 센서만으로 확인했다. 벤치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 강변의 흰 선 두 개가 그어져 있었다. 한 선은 밖을, 다른 한 선은 안을 향했다. 가운데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나는 그 빈 곳이 누군가의 자리라고 생각하려다가 멈췄다. 아무도 없다고 곧 사람을 세워야 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도원과 강변 관측값이 서로 다른 시각에 도착했다. 강변에서 한쪽 선의 진동이 멈춘 지 4초 뒤 도원의 화면에서는 반대쪽 경고등이 켜졌다. 민재는 그 4초를 보고 “시계가 다른 걸까요?”라고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우리가 시간을 같게 만들려고 사람을 합쳤던 기억이 있으니까, 이번엔 차이 자체를 남기자.” 두 기록을 따로 보존했다. 그러자 0층 화면에서 `[원본 대기자 복귀 실패]`라는 말이 사라지고 `[외부 방향 재확인 대기]`로 바뀌었다.
그 순간 세림병원에서 긴급 연락이 왔다. 복도 중첩이 남은 구역의 문이 닫히려 한다는 것이었다. 박유라와 시설팀은 실제 환자와 근무자를 먼저 안전한 통로로 옮겼다. 금융센터의 남은 격리 구간에서도 출입문이 두 겹으로 보였지만 시설 담당자가 접근을 차단했다. 우리는 원본 경계의 좌표를 서둘러 하나로 묶지 않았다. 대신 두 장소가 동시에 안전할 때만 수동 확인하는 방식으로 관측을 계속했다. 좁아지던 회색 틈은 잠시 멈췄고, 실제 대피 통로는 유지됐다.
김하린이 강변에서 전화를 했다. “원래 고정틀에서 분리된 작은 칸이 발견됐습니다. 통행로 바닥이 아니라 설비함 외부에 있던 것이라 안전하게 확인할 수 있어요.” 그 칸에는 낡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바깥을 나가는 경로는 안쪽 복귀 완료의 증빙이 아니다.` 바로 아래에는 다른 글씨로 `마지막 확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호다.`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옛 설계 문서의 원본 일부인지 확인하기 위한 보존 절차를 시작했다. 문장은 지금까지의 오류를 꿰뚫고 있었지만 출처가 불확실한 문장을 만능 열쇠로 쓰진 않았다.
오후에는 문태수가 다시 찾아왔다. 그는 등록 사업의 긴급 자동 이관을 정식 중단 신청했다고 보고했다. 공공 통행 구획 제외 문구가 삭제된 경위와 무단 발송된 위임장 문제에 대해서도 감사에 협조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면책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 피해를 고칠 비용과 책임은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들여 확인해야 한다. 다만 적어도 오늘은 구형 장치가 그의 이름을 빌려 또 다른 사람을 관리자로 만드는 일을 막았다. 문태수는 안전모를 바르게 쓴 채 돌아갔다.
서지완이 저녁 무렵 방문했다. 그는 실제 인사 담당자와 자신의 입사 절차를 새로 협의했고, 도원 0층 회의에 참석하라는 구형 알림은 무효로 확인받았다고 했다. “그럼 저 회사 직원이 되는 겁니까?” 내가 묻자 그는 웃었다. “아직 결정 안 했어요. 건물이 던전인데 보통 입사 첫날 이렇게 시작하나요?” “아뇨. 보통은 프린터가 먼저 고장 나죠.” 지완은 웃다가 문서윤에게 자신이 직접 확인한 내용만 전달했다. 그의 내일 출근부는 여전히 날짜가 어긋나 있었지만,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그가 정하고 있었다.
밤에는 경로 보조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왔다. `이름을 정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나는 축하한다고 답하고 더 묻지 않았다. 그에게 자기 이름을 고를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볍게 했다. 내 이름이 먼저 출근부에 적히는 세상에서 누군가 자기 이름을 천천히 정할 수 있다니. 어쩌면 우리는 회사라는 던전 밖에서도 조금씩 다른 삶을 시작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열 시, 0층 회의실의 자동 자산 등록 패널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곁의 1758 경보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실제 외부 위험 신고는 정상 수신됐고, 강제 고용 명부는 생성되지 않았다. 남은 두 겹의 공간 중첩은 현장 통제 중이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종이에 `안전 담당자 귀가 확인 / 자산등록 정지 / 물리 이상 미해결`이라고 각각 적었다. 세 줄은 서로 다른 사실이었다. 어느 하나가 해결됐다고 나머지 둘까지 끝났다고 쓰지 않았다.
퇴근하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민재가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형, 예전 퇴사할 때 여기 두고 갔더라고요.” 안에는 내가 사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 둔 고장 난 볼펜이 있었다. 싸구려 볼펜인데도 손에 잡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 물건은 내가 다니던 회사의 것이 아니고, 회사가 기억해 줄 이유도 없었다. 나는 볼펜 끝을 눌러 봤다. 잉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쓸모없어도 내가 가져가기로 결정하면 끝나는 물건이 있었다.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B-0에서 나왔던 하림이 내게 전화를 했다. 그는 밤 산책을 하다가 낯익은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강변에서요. 제가 갇혀 있던 곳과 똑같은 환기팬 소리가 나는데, 도원에서 들었던 소리랑 방향이 반대예요.”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안전한 인도 위요.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에 안도했다. 우리는 현장 담당자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그 직후 1758 회선에 한 장의 스캔 문서가 들어왔다. 발신 확인 절차를 거친 기술 알림이었다. `[019 원본 경계 잔여물 / 제2 회신 지연 사유 확인 요청.]` 마지막 줄에는 처음 보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도원으로 장치를 옮기기 전의 지도 일부가 있었다. 강변의 낮은 길 아래로, 기존 도면에 없던 작은 화살표가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제0 경계 뒤쪽 / 사람 없는 비상 방향 / 자동 복귀 금지.]` 나는 사직서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퇴사한 회사가 던전이 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이제 회사 안이 아니라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강변 아래쪽을 살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이번에도 혼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제13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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