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우리는 벽에서 밀려 나온 종이들을 바닥에 펼치지 않았다. 멋모르고 늘어놓았다가 다른 층의 통로가 동시에 열리기라도 하면, 누가 그 일을 책임질지 알 수 없었다. 배만식 소장이 먼저 복도 양쪽에 고정 지지대를 세우고, 문서윤은 실제 대피 계단이 열려 있는지 확인했다. 종이가 움직이는 광경은 공포 영화처럼 보였지만 거기서 제일 위험한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누군가 신기하다는 이유로 안전선을 넘어가는 일이었다.
AH-07이 적힌 문서만 현장 촬영해 보았다. 종이에는 출퇴근 시간 대신 회신을 받을 장치의 상태가 적혀 있었다. `통신 정상 / 사람 확인 불가 / 외부 경계 대기 유지.` 그런데 오늘 생성된 전자 출근부에는 같은 줄이 `직원 재직 정상 / 퇴사 승인 불가 / 출근 대기`로 바뀌어 있었다. 민재는 화면을 보다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 정도면 번역기가 아니라 창작 프로그램 아닌가요?” “우리가 쓰는 프로그램이라고 다 글을 잘 쓰는 건 아니야.” 나는 농담했지만 입안이 썼다. 누군가는 그 창작 때문에 실제로 퇴근하지 못했다.
윤상미 씨의 허락을 받아 먹지 복사본 가장자리를 정밀 촬영했다. 오래된 서류는 접어서 보관할 때 서로 다른 장의 필압이 겹치곤 한다. 서윤이 빛의 각도를 바꾸자 접수인의 이름 자리 뒤로 다른 문장이 희미하게 보였다. `AH-07은 개인 식별 부호로 사용하지 않는다.` 바로 아래에는 `현장 안전 담당 실제 성명 별도 봉함.` 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람을 숨기려고 만든 장치였을까, 위험 신고자가 누구든 연락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였을까. 두 설명은 비슷해 보여도 정반대의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상미 씨가 말했다. “그분은 원래 밤 당직 끝나면 꼭 시장에 들렀어요. 꽃을 사는 것도, 장을 보는 것도 아니었는데요. 늘 시장을 돌아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어요.” “혹시 어디에 사셨습니까?” 내가 물었다가 바로 말을 고쳤다. “답하시기 곤란하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희가 알아야 할 건 그분이 안전하게 일을 마쳤는지니까요.” 상미 씨는 잠깐 생각하더니 옛 정류장 앞에 있던 수선집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그분이 자기 구두 뒷굽을 고치면서도 분리판의 선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물어보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했다.
우리는 시장까지 걸어갔다.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는 사람, 떡볶이 국물을 묻힌 아이, 버스가 멈추자 급하게 손을 드는 할머니. 그런 평범한 풍경이 기이하게 소중했다. 이곳은 여전히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동네였다. 도원 건물의 가짜 0층이 이 거리까지 자기 출입구라고 주장하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시장 수선집은 이미 세탁 수선점으로 바뀌었지만, 새 주인은 오래된 간판을 창고에 걸어 두었다. 우리는 시설 안전 조사에 필요한 공개 기록만 확인했고, 개인 고객 장부는 볼 수 없다는 말에 동의했다.
주인은 뒤편 문을 열어 장마 때 침수되지 않도록 높은 선반에 둔 낡은 점검표를 보여 줬다. 수선집 앞 공용 경보등을 수리할 때 붙여 둔 안내였다. `경보등이 켜진 상태에서 실내 건물의 출입 확인으로 대체하지 말 것.` 별것 아닌 문장 같았지만, 바로 그 원칙이 도원에서 무너졌다. 수선집의 조명 아래에서 상미 씨는 보이지 않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끝내 이름은 말하지 못했다. 대신 “소매를 걷을 때마다 팔꿈치에 작은 흉터가 보였어요”라고 했다. 나는 그 정보를 불필요하게 공유하지 않기로 했다.
가게에서 나오는 순간 버스 정류장 도로가 스르르 길어졌다. 아까까지 횡단보도가 있던 자리에 유리문 두 개가 생겼다. 하나는 성하금융센터의 회전문, 다른 하나는 도원의 18층 승강기였다. 실제 건물이 여기로 이동한 것은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가던 학생이 어느 쪽으로 걸어갈지 망설이는 순간, 그의 발밑 흰 선이 벗겨져 검은 틈이 드러났다. 나는 학생에게 손짓해 인도 안쪽으로 물러나게 했고, 문서윤은 즉시 도로 통제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그때 검은 유리문 안에서 낯선 사람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옆을 돌아봤다. 경로 보조는 아직 내 옆에서 상미 씨의 가방을 들어 주고 있었다. 유리 속 얼굴은 그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다. 화면 같은 평면에서 입만 움직였다. `AH-07 대기자 확인 완료. 돌아갈 자리를 배정합니다.` 내 목소리와 조금 달랐다. 내가 야근 사흘째 목이 쉰 날에 낸 소리 같았다.
“저건 저 아닙니다.” 경로 보조가 먼저 말했다. “알아요.” 내가 대답했다. 서윤은 유리문에 붙은 부속 장치에서 `접근자 얼굴 참조: 과거 출입 기록`이라는 표시를 확인했다. 새로운 인격체인지 단순 영상인지 판별하기 전에 통행 위험부터 처리했다. 시설 담당자가 안내등을 분리하고 실제 도로 경계를 확보하자 회전문은 점점 흐려졌다. 검은 틈은 남았지만 도로에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를 찾는 프로그램이 우리가 사는 거리를 자기 사무실 복도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소름 끼쳤다.
수선집에서 나오는 길에 나는 소림이라는 이름이 아직 나오지 않았던 그때의 생각을 적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익명 업무 코드 하나와 인쇄된 안내문, 그리고 누군가 직접 끝내지 못한 일처럼 보이는 근무 종료 기록뿐이었다. 이 상태로 실종자 포스터를 만들면 기록 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반대로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면 코드라는 이유로 외면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이 둘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법 소박했다. 장치가 지금 정상적으로 위험을 알리는지 확인하고, 실제 연락할 권한이 있는 담당자에게만 검증을 맡기는 것.
정류장 한편에서는 오래된 안내 스피커가 작게 울렸다. “밖에 계신 분은 안쪽으로 이동하지 마십시오.” 한 아이가 소리를 듣고 내 쪽을 돌아봤다. “왜요, 안에 뭐 있어요?” 나는 스피커를 가리켰다. “공사 중인 길이 있대. 여기 노란 선 뒤에서 버스를 기다리면 돼.”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상 현상의 정체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다가 참았다.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두어도 된다. 누군가의 안전을 지키는 데 꼭 모든 비밀을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후 늦게 서윤이 오래된 출근부 표의 바닥에 숨어 있던 각주를 발견했다. `AH-07 / 출근 관리계정 아님 / 현장 경보 접수 대리 보관 코드.` 나는 테이블을 두드렸다. 또 코드였다. 지난달부터 우리를 쫓아다닌 실종자 이름의 반은 기계 번호였고, 기계 번호의 반은 사람 이름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 각주 아래에는 사람이 직접 쓴 문장이 있었다. `내가 근무를 마쳐도 경보가 계속 켜져 있도록 부탁합니다.`
상미 씨는 그 글씨를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아는 필체예요. 그렇지만 이 사진만 보고 이름을 확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래된 기록을 내놓는 일 자체가 누군가를 강제로 되돌려 놓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던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분이 돌아왔다고 발표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이 경보가 왜 사람을 붙잡는 것으로 바뀌었는지 알아볼게요.”
귀가하기 전 수선집 주인이 전화했다. 높은 선반 뒤편에 또 다른 판이 있었다고 했다. 종이 점검표가 아니라 작은 금속 패널이었다. 표면에는 손으로 긁은 문자 두 줄이 보였다. `[019-B-0 / 종료 확인은 이름이 아니라 두 개의 문에서.]` `[오른쪽 문을 닫으면 왼쪽 사람은 나가지 못함.]` 나는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실종자가 누구인지를 찾는 동안 우리는 아무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문을 하나 더 찾은 셈이었다.
제12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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