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 보조가 도원을 다시 찾은 것은 회사가 그에게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원해서 찾아온 게 아니라, 시스템이 `동일 얼굴 미배정자 / 신규 시설 거주자 예비`라는 안내를 보냈다고 했다. 나는 안내 문장을 세 번 읽었다. 회사가 만들어 낸 사람에게 회사가 살 집을 정해 주겠다는 것인가. 아직 회사가 사람을 만들었다고 확정할 수도 없는데, 벌써 월세부터 청구할 기세였다.
“저는 여기 살고 싶지 않습니다.” 경로 보조가 말했다. “그리고 제게는 주민등록번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기서 기다리는 물건이 되는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나는 답했다. “당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몰라도 지금 원하지 않는 곳에 가두면 안 됩니다.” 그는 내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을 앞에 놓고 도덕 시험을 보는 기분이었다. 정답을 고르기 쉬운 문제만 나오길 바랐다.
문서윤은 경로 보조가 받은 안내를 실제 주민등록 신청과 구별했다. 정부기관의 공식 통지가 아니라 도원의 시설관리 시스템이 내부 주민번호 비슷한 식별자를 요구한 것이었다. 그 정보가 실제 신원확인 번호처럼 사용되면 개인의 이동과 의료 접근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민간 시설정보의 자동 인사 이관을 중단하고, 해당 존재가 본인의 선택에 따라 휴식·이동할 수 있도록 현장 지원 창구를 안내했다.
그러자 화면에 또 다른 지시가 나타났다. `[원본 차도윤 동의 시 대역 일괄 정리 가능.]` 나는 손을 떼었다. 다른 얼굴의 누군가를 정리하겠다는 문구에 내 동의를 써서는 안 됐다. “정리라는 게 뭡니까?” 경로 보조가 물었다. 민재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화면의 위험한 점을 숨기지 않았다. “구형 장부에서 당신의 별도 기록을 지우고 제 기록으로 합치겠다는 뜻일 수 있어요. 실제로 당신이 사라지는지까지는 모르지만, 시도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작은 종이를 꺼냈다. 어제 영화관에서 본 표였다. 좌석번호는 열아홉 번이었다. “영화관에서도 열아홉 번째 자리에 앉는 사람은 있었어요. 하지만 그 자리를 채운다고 다른 사람이 일을 끝내는 건 아니던데요.” 나는 웃었다. “회사 밖은 원래 그래야죠.” 그의 말이 맞았다. 열아홉이라는 숫자는 우리에게 회신 실패의 상징이었지만, 그에게는 스스로 고른 영화관 좌석이었다. 숫자 하나가 사람을 지배하게 내버려 두지 말아야 했다.
오후에는 검은 셔츠 임현규와 양복 임현규가 동시에 면담을 요청했다. 시설 자산 등록이 막히자 운영 프로그램에서 두 사람을 `원본 대표 / 대체 관리자`로 구분하고, 한쪽을 0층 거주 직원으로 지정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의 동의와 실제 법적 지위를 따로 확인할 수 있도록 각각 면담을 진행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기억과 신원을 의심했지만, 새 기숙사에 강제로 들어갈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양복 임현규는 처음으로 불안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대역일 수 있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여기 있는 동안 제가 한 선택은 제 거잖습니까.” 나는 그의 말을 메모했다. 검은 셔츠 임현규도 같은 질문을 했다. 두 존재의 실체를 판정할 과학적 방법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통행권을 빼앗기 위해 실체 판정을 먼저 요구하는 건 순서가 틀렸다.
한편 도원 골목에서는 가짜 기숙사 표지가 또 바뀌었다. `정원 미달 / 외부 관찰자 충원 가능.` 이번에는 000 아이가 대상이었다. 한서림이 통지를 직접 받은 것은 아니었다. 도원 내부 프로그램이 공공 단말번호를 가져와 가짜 거주자 칸에 넣으려는 시도였다. 우리는 아이의 개인정보와 실제 위치가 시스템으로 넘어가지 않았는지 즉시 확인했다. 하린은 공공 회선에서 단말 코드 000을 공개 식별자로 사용할 수 없도록 안전하게 구분 표시했다.
나는 한서림에게 짧게 연락했다. “회사의 잘못된 연결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특별한 행동을 부탁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녀는 안도하며 아이가 오늘 공원에 갔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창밖을 봤다. 나도 퇴사하면 공원이나 갈 생각이었는데. 회사가 이상해진 날부터 내가 구경한 것은 복도뿐이었다.
늦은 오후, 오재현이 실증사업의 원본 검토 메일을 확보했다. 제목은 `0층 임시 거주 공간 편입 시 담당자 공백 해소`. 회신에는 협의회 내부 담당자들의 우려가 남아 있었다. “외부 경계에 실제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관리 책임은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다른 답변에는 더 위험한 말이 있었다. “인사 시스템의 미귀환 항목을 이용자 목록으로 대체하면 된다.” 누군가 원래의 안전 목적과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 했다는 구체적 문구였다. 아직 실제 작성자 신원과 그 뒤의 결재 여부는 조사해야 했다.
서윤은 그 메일을 별도 보존했다. 우리는 협의회 전체를 하나의 악당으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원래 안전 기능을 설계한 사람과 이를 바꾸려 한 사람, 나중에 오류를 보고도 방치한 사람의 책임은 서로 달랐다. 다만 지금 당장 막아야 할 행동은 분명했다. 외부 통로에 실제 사람의 거주 의무를 만들고, 없으면 대역을 대신 채우는 일이다.
밤이 되자 경로 보조는 내게 처음으로 자기 이름 후보를 말해 줬다. “아직 정하진 않았는데요. 차도윤이 아닌 이름이었으면 좋겠어요.” “천천히 고르세요.” 내가 말했다. 그는 작게 웃었다. “이름이 없으면 등록할 수 없는 시스템은 제가 고쳐야 합니까?” “그건 원래 고용주의 일인데요. 아, 저도 고용주가 아니군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경로 보조는 시험을 거부한 뒤에도 자료를 하나 남겼다. 자신이 동의한 범위의 관찰 메모였다. `출구를 보았을 때 가고 싶은 곳이 떠오름. 원본 차도윤의 근무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음.` 나는 종이 아래에 그가 직접 써 놓은 `철회 가능`이라는 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의 증언이 필요해도 그 사람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증거를 얻겠다는 이유로 또 다른 출석부를 만들게 된다.
이명주도 짧게 연락했다. 병원에서 만났던 또 한 명의 명주와 서로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고 했다. 두 사람은 어떤 기억을 공유하는지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서로에게 같은 업무를 맡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명주는 “한 사람은 라디오를 배우고 싶어 하더군요”라고 말했다. 나는 웃었다. “퇴사하고도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찾았으면 그게 먼저죠.” 이 소식을 경로 보조에게 전하자 그는 아직 이름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회사가 정해 준 명칭보다 자신이 직접 부를 이름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오후에 서윤은 거주자 자동 지정 목록에서 모든 실명 연결을 보류한 상태를 점검했다. 목록은 공란으로 남았지만 경보는 정상 작동했다. 누군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면 이름을 등록해야 한다는 주장이 틀렸다는 작은 증거였다. 그 공란을 바라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했다. 내 퇴사를 인정하지 않는 회사가 적어도 지금은 남의 이름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때 모니터에서 0층 기숙사 계획의 마지막 단계가 열렸다. `[거주자 확보 실패 / 도시 경계 편입 절차 자동 전환]`. 이제 사람을 모으지 못하자, 건물이 도시의 일부로 등록되는 우회 절차로 바뀌고 있었다. 프로그램은 실패할 때마다 더 큰 것을 자기 안에 넣으려 했다. 내일 아침 정해진 시각에 `최종 경계 이관`을 실행하겠다는 경고가 나타났다.
내가 서윤에게 말했다. “이건 단순히 사람을 못 찾는 문제가 아니야. 건물을 만들어서라도 미귀환자를 채우려는 거야.” 서윤이 답했다. “그럼 사람과 건물 어느 쪽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죠.” 우리에겐 하룻밤이 있었다.
제11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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