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사건 다음 날, 아르켄에는 장터보다 공고문이 더 많아졌다. 왕실은 시민들에게 집에 머물라고 명령했다. 상인들은 물가를 올렸고, 사람들은 오르기 전에 사야 한다는 생각으로 더 많이 샀다. 나는 지도를 팔지 않았다. 왕도가 통째로 바뀌는데 평범한 지도 한 장을 팔아 봤자 구매자의 분노만 늘릴 테니까.
대신 우리는 왕궁 지하 지도실로 가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브렌이 경계선을 다시 긋는다면, 그가 참고하는 원본이 거기 있을 것이다.
헤론이 왕궁 근무자의 교대표를 구했다. 놀랍게도 그 명단에는 자기 이름도 있었다. “쫓겨난 지 열두 해가 지났는데 아직 근무 중으로 적혀 있군.”
“급여는요?”
“한 푼도 못 받았지.”
“그러면 오늘은 체불 임금을 받으러 오신 걸로 하죠.”
미라는 왕궁 동쪽 수로를 찾아냈다. 맨홀 아래로 이어지는 배수로였다. 테온은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자 한숨을 쉬었다. “왕자라는 직업은 배수관 청소도 포함하나?”
“멸망한 나라의 왕자라면 업무 범위가 좀 넓을 겁니다.”
우리는 수로를 통과해 왕궁 뒷정원에 도착했다. 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왕국의 지붕들은 비를 받아 반짝였지만 검은 첨탑만은 물방울 하나 묻지 않았다. 첨탑이 있는 자리의 하늘은 구멍처럼 어두웠다.
지하 계단의 마지막 굽이를 돌 때 우리는 두 개의 묵은 문을 만났다. 하나에는 ‘국가 경계 원본’, 다른 하나에는 ‘폐기 경계 보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헤론은 잠시 뒤쪽 문을 살펴보았다. 문틈에는 먼지가 없었다. 누군가 아주 최근 드나든 흔적이었다.
“폐기한 지도를 왜 자주 꺼내 보죠?” 내가 속삭였다.
“폐기한 지도가 유용할 때가 있으니까.” 헤론은 표정을 굳혔다.
우리는 두 번째 문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도시의 일부가 빠진 지도들이 걸려 있었다. 지도마다 누락된 구역에는 검은 동그라미가 찍혀 있었고, 그 아래에 ‘안정성 향상’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나는 세 장을 겹쳐 봤다. 동그라미가 커질수록 평가 점수가 높아졌다. 다른 곳을 지워 안전해졌다고 기록한 셈이었다.
미라는 가장 아래 지도에 그려진 옛 항구를 짚었다. “여기 우리 배가 지나간 항로예요. 안전성 향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못 돌아오게 한 거잖아요.”
테온은 루메르의 지도를 찾았다. 왕궁이 사라지고 경계의 위험 수치가 낮아졌다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낙인을 문질렀다. 잉크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사고가 아니라 성공으로 기록했어.”
나는 말없이 그 페이지를 베껴 그렸다. 그대로 훔쳐 갈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가 지운 흔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는 남겨야 했다. 헤론이 불안한 눈으로 복도를 살폈다. 왕실 경비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복도 모퉁이의 창문에서 잠깐 멈췄다. 왕궁 정원 너머 새로 생긴 검은 첨탑이 보였다. 사람들에게는 재앙의 표식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훌륭한 길잡이일 것이다. 누구를 위해 세운 표식인지가 결국 문제였다. 미라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감상문은 나중에. 경비가 돌아와요.”
지도실은 지하 두 층에 있었다. 문 앞에는 별 모양 자물쇠와 왕실 인장이 겹쳐져 있었다. 테온의 오래된 왕관이 반응했다. 문이 열리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루메르의 왕실 기술이 여기에도 쓰였군.”
실내에는 수백 장의 지도가 보관돼 있었다. 일부에는 오늘의 아르켄이, 일부에는 수백 년 뒤의 아르켄이 있었다. 나는 옛 도로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비교했다. 이상한 것은 가장 오래된 지도에도 검은 첨탑이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첨탑은 오늘 나타났는데 기록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헤론은 오래된 지도 아래의 작은 주석을 읽었다. ‘도시는 떠나도 기준은 남는다.’
“별락은 땅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의 지형과 교환하는 현상일 수 있어.”
“그럼 사라진 땅은 어디로 갑니까?”
“그걸 알아내면 이곳에 숨길 필요도 없었겠지.”
미라는 벽 한쪽에 걸린 해도를 보았다. 그녀의 배가 항해한 적 없는 항구들이 차례대로 적혀 있었다. ‘어제의 파도’가 경유한 항구 중 세 곳은 루메르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사라져도 그곳을 오가던 길은 남아 있었던 셈이다.
테온은 왕관을 벗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내 나라의 지도를 찾고 싶어.”
나는 잠시 망설였다. 아르켄의 시간이 부족했지만, 테온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루메르 기록을 찾아 가장 아래 선반을 뒤졌다. 거기에는 표지가 없는 얇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펼치자 모든 페이지가 하얬다.
“빈 책이네요.” 내가 말했다.
헤론이 속삭였다. “그렇지 않아. 별가루가 없는 사람에게만 비어 보이는 걸 수도 있어.”
나는 손끝의 은색 잉크를 떨어뜨렸다. 첫 번째 페이지에 글자가 떠올랐다.
[경계전이 원안 — 아르켄의 다음 자리]
두 번째 페이지에는 바다가 있었다. 세 번째 페이지에는 산맥이 있었다. 네 번째 페이지에는 왕도의 일곱 첨탑이 거꾸로 그려져 있었다.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이 놓여 있었다. 지도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축척도 방향도 없었다.
헤론이 책장을 만졌다. “지도에서 빈 곳이란 그리지 못한 곳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곳일 수 있네.”
그 순간 왕궁의 비상종이 울렸다. 문밖에서 아브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책을 내려놓아라. 그것은 도시의 안전을 위한 왕실 기록이다.”
“안전하다면 왜 시민들에게 보여 주지 않죠?” 내가 물었다.
아브렌은 무장한 병사들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검은 별 표식이 바닥에 비쳤다. “여러 지형이 동시에 존재하면 시민들은 서로 다른 길로 나뉜다. 국가는 하나의 지도를 선택해야 한다.”
“국가가 고르는 지도에 사람은 빠져도 됩니까?”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그 대답이 이상하게도 진심처럼 들렸다. 아브렌은 왕도를 멸망시키고 즐기는 악당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을 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니 더 위험했다.
나는 책의 마지막 장을 그의 앞에 펼쳤다. 흰 공간에 내 손가락으로 선을 하나 그었다. 별가루가 흐르며 선 하나가 생겼다. 아브렌의 검은 표식이 잠시 떨렸다.
“당신이 고르지 않은 지도도 있습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최종 좌표는 하나다.”
헤론이 소리쳤다. “좌표를 하나로 만든 건 네놈이지, 별이 아니야!”
아브렌이 검을 뽑았다. 미라는 지도실의 등불을 꺼 버렸다. 어둠 속에서 은색 지도 선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나는 책을 가슴에 안고 테온과 함께 벽의 그림자 속으로 뛰었다. 그곳에는 미라가 찾아둔 폐쇄 배수구가 있었다.
우리는 왕궁을 빠져나왔지만 대가가 있었다. 테온의 왕관이 문을 여는 데 쓰이면서 반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그는 부러진 왕관을 손바닥 위에 놓고 오래 바라보았다.
“내 나라의 마지막 물건인데.”
“왕국이 물건 하나로 남지는 않겠죠.” 내가 말했다.
테온이 눈을 들었다. “그 말을 믿어도 될까?”
“아직은 반밖에요. 우리가 아르켄부터 살려야 하니까.”
왕궁을 나서는 순간, 거리에 있던 시계들이 하나같이 네 날 뒤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도에는 새 문장이 나타났다.
[왕도 아르켄 — 4일 후 소멸]
하지만 경계전이 원안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처음으로 희미한 단어가 떠올랐다.
[이전]
소멸이 전부는 아니었다. 도시가 떠날 자리가 어딘가에 있었다.
제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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