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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별가루 지도 제작자 · 7화
PAYLUA ORIGINAL · 제7화

제7화 - 투명해지는 성벽의 마지막 경비병

별가루 지도 제작자 · 3,606자

오프라인 책장
성벽이 사라진다는 소문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아르켄의 남쪽 성벽은 돌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사라지고 있었다. 돌 틈이 흐려지고, 성가퀴 너머로 보이던 하늘이 성벽을 뚫고 보였다. 투명해진 벽에 손을 대자 차가운 감촉이 남아 있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손으로는 만질 수 있는 성벽. 누구든 설명하려고 들면 어딘가 크게 틀릴 수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레이븐 씨! 저 안에 우리 아버지가 계세요!” 성벽 근처의 어린 경비병이 외쳤다. 이름은 보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성문 경비대장으로, 투명해지는 성벽의 저편 순찰로에 올라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병사들은 겁에 질려 순찰로를 폐쇄했고 경계조사국은 ‘일시 관측 장애’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사람이 갇혔는데 장애 신고서부터 쓰는군요.” “당장이라도 무너질지 모르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보른의 상관이 말했다. 나는 손으로 벽을 짚었다. 표면에 저녁 햇살의 따뜻함은 없었다. 머리 위에서는 새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 성벽에 부딪쳐 방향을 틀었다. 미라가 밧줄을 풀었다. “나는 들어갈게요. 당신은 위치를 표시해 줘요.” “줄이 벽에 걸리면요?” “그럼 나를 당기고, 안 당겨지면 헤론한테 잔소리라도 해줘요.” 테온은 함께 가겠다고 고집했다. 헤론은 왕자의 손목에 별가루가 묻은 실을 묶었다. “길이 기억과 함께 떠버릴 때는 자기 이름을 크게 말해야 한다네. 이름을 잊으면 돌아올 좌표도 잃어.” 나는 벽을 따라 지도를 펼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순찰로가 은색 선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선이 몇 걸음마다 끊어졌다. 그 사이에는 아르켄의 성벽이 아니라 오래된 루메르의 항만이 겹쳤다. 바닷물 냄새까지 났다. “왼쪽 세 걸음. 다음은 멈추세요. 거기서 오른쪽은 바다예요.” “왕도 성벽 위에 바다라니!” 보른이 소리쳤다. “제가 바다를 싫어해서 만들어낸 건 아닙니다.” 미라가 내 지시대로 움직였다. 그녀의 모습은 가끔씩 흐려지고, 어떤 순간에는 선실 안의 항해사처럼 보였다. 테온이 멈췄다. 눈앞에 루메르 병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병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병사는 오래전 왕자를 지키다 죽은 호위병이었다. “테온!” 내가 소리쳤다. “그 사람은 여기에 없어요!” “내가 분명히 봤어.” “그렇다고 지금 그곳에 있는 건 아닙니다!” 테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눈을 감고 헤론이 묶은 실을 잡았다. “내 이름은 테온. 루메르의 마지막 왕자. 지금은 아르켄에 있다.” 그렇게 세 번 외친 뒤에야 그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미라가 성벽 저편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보른의 아버지를 찾았다. 경비대장은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자 고개를 저었다. “성문 안쪽이 이상하다. 저기에 내가 열아홉 살 때 근무하던 길이 보여.” 나는 그를 데려오라고 외쳤다. 동시에 검은 첨탑에서 길고 낮은 종이 울렸다. 사람들의 기억 속 아르켄이 한곳에 겹치기 시작했다. 어떤 상인은 어제 사라진 다리를 보았고, 어떤 아이는 태어나기 전의 놀이터를 보았다. 성벽은 여전히 서 있었지만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성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돌아오지 못한 경비대장을 찾는 동안, 나는 보른에게 아버지와 함께 했던 일 하나를 떠올려 달라고 했다. 보른은 눈을 감고 말했다. 겨울 축제 전날 눈사람을 만들려다 아버지의 장갑을 훔쳤다고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여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장갑에 구멍이 하나 있었어요. 검지손가락에요.” 나는 그 말을 성벽 쪽으로 전했다. 잠시 뒤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경비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갑에 구멍 난 건 네가 칼로 눈을 퍼내려고 해서다!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보른은 울다가 웃었다. 그의 상관도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숙였다. 두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 길에는 분명히 경비대장이 있었다. 나는 지도 위의 흐린 선에 구멍 난 장갑 하나를 조그맣게 그렸다. 그림이 길을 바꾸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길을 끝까지 확인해야 하는 이유를 잊지 않게 했다. "바보 같은 낙서군." 헤론이 내 수첩을 보며 말했다. "정확한 측량 기호가 없어서요." "그러면 새 기호를 만들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자리라는 뜻으로." 그는 내 낙서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나는 그 동그라미를 앞으로 더 자주 쓰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보른이 아버지를 찾으러 가겠다며 내 팔을 붙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여기 있어야 아버지가 돌아올 자리를 찾을 수 있어.” 소년은 분한 듯 주먹을 쥐었다. 그러고는 성벽 앞 돌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바람에 지워질까 봐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눌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알았다. 기다리는 사람 역시 길의 일부였다. 그때 아브렌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투명한 벽 앞에 검은 말뚝을 박았다. 말뚝을 박은 지점부터 은색 선이 검게 굳었다. 미라와 경비대장이 서 있는 길이 점점 희미해졌다. “거기서 뭘 하는 거야!” 내가 외쳤다. 병사는 차갑게 말했다. “혼란 방지 조치다. 관측되지 않는 길은 폐기한다.” 나는 말뚝 하나를 뽑았다. 손바닥이 데일 만큼 뜨거웠다. 병사들이 달려왔지만 보른이 앞을 가로막았다. “제 아버지가 저 안에 계십니다!” “명령이다. 물러서라!” 보른은 창을 들지 않았다. 대신 투명한 벽을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 제가 여기 있어요! 지난겨울 성문 밑에서 같이 눈을 치웠잖아요!” 그 외침에 내 지도 위 끊어진 선 하나가 이어졌다. 미라가 보른의 아버지를 부축하고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경비대장은 아들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사람의 목소리가 서로 닿자 길은 조금씩 선명해졌다. 마침내 그들이 돌아왔다. 보른은 아버지를 끌어안았고, 미라는 내게 달려와 손바닥에 남은 화상 자국을 보았다. “지도는 손으로 그리는 거예요. 손부터 지키세요.” “제 직업의식이 좀 지나쳤죠.” 그때 아브렌이 등장했다. 그는 검은 말뚝을 다시 세우게 했다. 하지만 보른과 아버지 사이의 길은 지워지지 않았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기억이 한 장소를 붙잡고 있었다. 아브렌은 나를 빤히 보았다. “네가 만든 길은 왕도를 살릴 수 없다. 그저 소멸을 늦출 뿐이다.” “그걸 알고 있는 분이 왜 성벽을 먼저 지우려고 하셨죠?”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스쳤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수첩 한쪽에 성벽이 돌아온 시간을 적어 두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만난 길의 넓이까지 표시했다. 누군가 훗날 이 길이 원래 없었다고 말해도, 적어도 내가 직접 지나온 거리만큼은 남겨 두고 싶었다. 아브렌의 검집 안쪽에 희미한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0. 그리고 ‘왕도 이전’이라는 문자. 그는 소멸을 막으려는 조사관이 아니었다. 왕도가 어디로 옮겨 가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튿날 아침, 남문 성벽은 다시 보이게 되었다. 다만 검은 말뚝이 박혔던 구간은 지도에서도 사라졌다. 경계조사국은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왕도 전체에 낯선 공고가 붙었다. ‘닷새 뒤, 왕도 경계 재설정. 시민은 거주 구역을 벗어나지 말 것.’ 나는 공고를 떼어 들었다. 그 안에는 ‘소멸’이라는 말이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도시를 없애는 일이 단지 경계선을 다시 긋는 행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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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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