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젖은 옷을 말릴 시간도 없이 헤론의 은신처로 향했다. 은신처라고 해 봐야 망해 가는 별자리 극장 뒤편이었다. 지붕은 새고, 관객석에는 고양이가 두 마리 살았다. 그중 한 마리는 헤론의 책 위에서만 잤다. 지식에 대한 존중이 없는 고양이였다.
“이제 뭘 해야 하죠?” 내가 물었다.
헤론은 천문도를 펼치고 검은 점 하나를 찍었다. “별락을 이용해 길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냈지. 그가 어느 길을 고정하는지 알아내야 하네.”
“그 전에 제가 가진 지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첫 방향의 점이 빛났다. 그 옆에서 아르켄의 외곽선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제와 오늘이 한 종이 위에서 서로 밀고 당기는 듯했다.
헤론은 가루를 소량 덜어 작은 저울 위에 올렸다. “별가루는 진실을 말하는 물질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억이 충돌하는 자리를 보여 주는 물질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싫어한다고들 하지.”
“저는 방금 지도를 정확하다고 팔았습니다.”
“그것도 거짓말인가?”
“작성 당일에는 진실입니다.”
테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처음으로 그가 왕자가 아니라 열한 살짜리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을 갖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웃음을 금방 거두었다. 왕관 아래에서 루메르의 그림자가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론이 별가루를 유리 접시에 덜고 실험을 제안했다. 나는 빈 지도에 ‘이 방의 문은 북쪽에 있다’고 적었다. 별가루는 움직이지 않았다. 실제로 문은 북쪽이었다. 다음에는 ‘문은 서쪽에 있다’고 적었다. 가루가 검게 뭉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짓을 기록하면 선이 죽었다.
“그러면 마음대로 새로운 길을 만들 수는 없겠군요.”
“그래. 없는 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 이미 어딘가에 존재하는 길을 이어 보는 거지.”
“우물에서 벽에 틈을 만들었는데요?”
“그 틈은 내일 존재할 길이었을 수도 있지.”
미라가 수로에서 주워 온 작은 청동 패를 놓았다. 별을 가리키는 바늘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그녀는 그 안쪽에 조각된 문구를 읽었다. ‘둘째 방향은 바람이 아닌 사람이 정한다.’
“사람이 정한다면 항해사가 아니라 누구죠?”
헤론이 대답하기 전에 극장 문이 열렸다. 에린과 린네가 들어왔다. 유리울 마을에서 만났던 모녀였다. 린네는 빵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내가 아이를 찾도록 도왔다는 소문을 듣고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고 했다.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내가 물었다.
“집은 그대로예요. 그런데 저희를 기억하던 아르켄 친척들이 어제부터 저희 이름을 잊기 시작했어요.”
린네는 손수건을 꺼냈다. 그 위에는 ‘에린 열 번째 생일’이라고 수놓아져 있었다. 글씨는 반쯤 흐려지고 있었다. 아이는 금세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수건을 꼭 쥐었다.
“저희가 여기 있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나는 차마 위로의 말을 하지 못했다. 실험 접시의 별가루가 손수건 쪽으로 움직였다. 가장 선명한 은선은 에린의 손에서 린네의 손으로 이어졌다.
헤론이 속삭였다. “증언. 기억의 방향을 고정하는 건 지도만이 아니군.”
미라가 에린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네가 살던 집을 설명해 줄래?”
“문을 열면 빵 냄새가 나요. 오른쪽 벽에는 파란 접시가 있고, 엄마가 제 키를 문틀에 그어 놨어요.”
“그럼 우린 그 집을 보러 갈 거야.”
우리는 다시 유리울로 향했다. 이번에는 경계조사국이 마을을 통제하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 검은 표지판이 놓여 있었다. ‘임시 귀환지. 주민 신원 재검토 중.’
아브렌은 지형뿐 아니라 사람들의 과거까지 관리하려 하고 있었다. 린네는 표지판을 보자 얼굴을 굳혔다. 내 손의 지도는 마을을 표시했지만, 아르켄의 공식 지도에는 그곳이 여전히 채석장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별가루 위에 펼쳤다. 에린이 집의 문틀과 접시를 말했고, 린네가 어제 구운 빵 종류를 말했다. 미라는 항구에서 건네받은 빵의 맛을 기억했고, 하브는 그 집 앞에서 말에 물을 먹였던 일을 떠올렸다. 서로 다른 사람의 진술이 하나의 장소를 가리켰다.
은선이 굵어졌다. 내 지도에 없던 길 한 조각이 생겼다. 그러나 누가 입을 맞춰서 같은 이야기를 하면 가루는 움직이지 않았다. 실제로 겪은 구체적인 경험만이 길을 붙잡았다.
헤론이 크게 웃었다. “둘째 방향은 단순한 좌표가 아니야. 여러 사람이 각자 본 길이 만나는 자리야!”
“그럼 왕도 주민 모두에게 그들이 본 왕도를 물으면 되겠네요.”
“어렵겠지. 아르켄 인구가 얼마나 되나?”
“많습니다. 제 빚쟁이보다 많죠.”
그때 유리울의 학교 교사가 나섰다. 그는 작은 출석부를 들고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 아이 열아홉 명이 수업을 받았고, 아이들 각자는 다른 날짜에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교사는 출석부를 내게 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지리학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사실까지 지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출석부를 펼쳤다. 아이들이 틀리게 쓴 글자와 교사의 붉은 수정이 페이지마다 남아 있었다. 똑같은 이야기를 외워서 한 게 아니라 그날그날 실제로 있었던 실수들이었다. 에린은 사과를 다섯 개 세다가 여섯 개라고 적은 날을 기억했다. 다른 아이는 그때 웃다가 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우리 네 사람이 각자의 날짜를 대조하자 은색 선이 더욱 선명해졌다. 나는 그 선을 유리울의 공동 창고와 학교, 린네의 빵집을 연결하는 지도에 옮겼다.
“기억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이 같은 장소를 가리킨다는 걸 확인하는 거군요.” 내가 말했다.
헤론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가 왕립천문대에서 잊은 일이었지.”
린네는 에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혹시 또 마을이 사라지더라도 이 출석부는 가져가 주세요.”
나는 대답 대신 출석부를 지도 가방 맨 안쪽에 넣었다. 지도 제작자는 길뿐 아니라 그 길을 걸은 사람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배웠다.
마을 입구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멈췄다. 린네가 작은 숨을 들이켰다. 나는 접시 조각과 출석부를 지도의 모서리에 올렸다. 서로 다른 날의 흔적이 한곳에 놓이자 은색 선이 다시 살아났다. 나는 그 선이 가리키는 집들을 손가락으로 세었다. 이제는 숫자뿐 아니라 이름까지 기억해야 했다.
그때 병사들이 달려왔다. 아브렌의 명령으로 린네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마을’에서 왔으니 공식 조사에 응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테온이 길을 막았다. “이 여자는 이곳에 살고 있어. 네 기록이 못 따라가는 거지.”
병사가 칼을 뽑았다. 미라가 짧은 칼로 그 손목을 쳤다. 나는 병사들 발밑에 별가루 지도를 펼쳤다. 그들이 지나온 길이 한순간씩 다른 골목으로 보였다. 병사들은 길을 잃은 사람처럼 서로를 향해 달리다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빵집 뒤쪽으로 피했다. 에린이 내 손에 파란 접시 조각을 쥐여 주었다.
“지도 아저씨. 이걸 가져가요. 우리 집이 진짜라는 증거예요.”
나는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은빛 선이 새로 생겨났다. 지도 위에 두 번째 점이 켜졌다. 동시에 멀리 검은 첨탑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헤론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브렌도 두 번째 방향을 알아챘을 거야.”
그리고 왕도 상공에 검은 별 모양의 거대한 그림자가 생겼다. 아직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성벽의 일부가 그림자 아래에서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제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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