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칠 거면 적어도 목적지는 알려 주십시오.”
나는 지도를 접으며 말했다. 미라는 대답 대신 별가루가 묻은 내 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가락에 달라붙은 은색 선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유리울의 우물에서 시작해 왕도의 중앙 광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당신 손이 길을 기억하네요.”
“손이 원래 이런 취미가 없는데요.”
“그럼 지도 제작자치고 드문 재능이겠네요. 대개는 길을 그리면서 자기가 길을 잃거든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평가받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미라는 자신을 항해사라고 소개했다. 왕도에는 바다가 없는데 무슨 항해사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나를 남문 밖 높은 언덕으로 데려갔다. 분명 아침까지 넓게 펼쳐져 있던 황금빛 밀밭 사이에 푸른 물길이 생겨 있었다. 작은 항구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돛대에 걸린 깃발은 오래되어 바랜 채였다.
“어제까진 없던 항구죠.”
“오늘부터는 있군요.”
“그런데 내 배가 저기에 묶여 있었어요. 사흘 전부터.”
그녀는 주머니에서 항해일지를 꺼냈다. 가죽 표지에는 소금 자국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첫 장에 오늘 날짜가 적혀 있었다. 다음 장에는 사흘 전에 이 항구에 정박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선원 네 명의 서명까지 있었다. 마지막 장에는 불길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아르켄까지 일곱 날.’
“이건 항해 소요일 수도 있잖습니까?”
“나는 아르켄에서 태어났어요. 이 물길에서 항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죠. 그런데 배 바닥에는 일곱 차례의 기항 표시가 있어요.”
미라는 신발을 벗어 배에 올라탔다. 나는 신발을 신고 뛰어들었다가 밧줄에 걸려 넘어졌다. 그녀는 한심한 표정으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지 중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아니다.
배의 갑판에는 마른 소금이 쌓여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갑판의 판자 사이를 훑었다. 판자 하나가 미세하게 들떠 있어 얇은 철침으로 들어 올렸다. 안에는 동전 네 닢이 놓여 있었다. 같은 왕국의 화폐였지만 제작 연도가 모두 달랐다. 가장 오래된 동전과 가장 최근 동전 사이에는 백 년의 차이가 있었다.
미라가 동전을 보자 한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난 동전 한 닢을 골랐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쓰던 항해 부적이에요.”
“그분 것이 확실해요?”
“닻 모양 흠집을 제가 냈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배에 태워 주지 않아 화가 났거든요.”
그녀의 목소리가 씩씩한 척할수록 조금씩 갈라졌다. 나는 동전을 돌려주었다. 미라는 손바닥으로 그것을 쥐었다가 다시 판자 아래 넣었다.
“왜 가져가지 않아요?”
“아버지가 돌아올 때 찾으려고 숨겨 둔 거라면, 아직 여기에 있어야죠.”
잠시 뒤 그녀는 뭔가 생각난 듯 판자를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동전 아래에 작은 조개껍데기가 놓여 있었다. 껍데기 바깥에는 붉은 실로 매듭이 묶여 있었다. 그녀가 어릴 때 아버지에게 알려 주었다는 항구의 신호 매듭이었다. ‘풍랑이 와도 다시 돌아와.’
“그 사람은 아직 이 배에 있었던 걸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신이 찾을 흔적은 있군요.”
미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도 제작자가 모른다고 말할 때는 정말 모르는 거겠죠.”
“모르는 길에는 모른다고 써야 사람을 살립니다.”
나는 그 말을 지도 가장자리에 적었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별가루가 작게 반짝였다. 지도가 내가 해야 할 일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선원이 남긴 것일 수도 있는 흔적을, 나는 명확한 답이라고 팔고 싶지 않았다.
선실에는 빈 침대 네 개가 있었다. 침구는 사람이 방금 일어난 듯 구겨져 있었고, 구리 컵 하나에는 아직 차가 남아 있었다. 선원들은 어디로 갔을까. 미라가 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여러 도시 이름이 손톱으로 긁혀 있었다. 이름마다 하나씩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 도시들은?”
“전부 사라졌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도시가 있었다는 걸 대부분 잊었죠.”
나는 오래된 도시 이름 하나를 알아봤다. 루메르. 역사책에서는 산사태로 멸망한 작은 공국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미라는 루메르에 바다도 왕궁도 있었다고 말했다. 내가 들고 온 상업 지도에는 산사태만이 표시되어 있었다.
“사라진 도시마다 이런 항구가 나타났나요?”
“늘 그렇진 않아요. 다만 이동하는 물길과 지워진 도시가 겹치는 곳에 배가 나타날 때가 있었죠. 우리 배의 이름은 ‘어제의 파도’예요.”
“예언적인 이름이군요.”
“선주가 빚을 갚기 싫어서 지었어요. 오늘 채권자가 오면 어제 떠났다고 하려고.”
내가 처음으로 웃자 미라도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선실의 거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거울 속에는 우리가 둘이 아닌 셋이었다. 내 뒤에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돌아보자 텅 빈 선실뿐이었다.
거울 속 아이가 입을 열었다.
“세 번째 귀환은 오래 못 가.”
나는 뒤로 물러서며 머리를 선실 천장에 부딪쳤다. 미라는 곧장 거울을 헝겊으로 덮었다. 헝겊 위로 물이 스며들더니 작은 별 모양 얼룩을 만들었다.
“거울의 잔상이면 늘 저렇게 말합니까?”
“아니요. 대개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 줘요. 저 아이는 내가 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항구 뒤편의 어시장으로 갔다. 시장은 있었지만 상인들이 파는 물고기에는 눈이 없었다. 어떤 할머니는 미라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미라, 오늘도 늦었네. 네 동생이 기다린다.”
미라의 표정이 굳었다. “제 동생은 열두 해 전에 죽었어요.”
할머니는 못 들은 듯 생선을 손질했다. 칼날 아래 떨어진 비늘이 잠깐씩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미라는 나를 끌고 시장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어째서 서둘렀는지 이제 이해했다. 이 항구는 사라진 것을 돌려주는 대신 다른 기억을 가져가는 장소일 수 있었다.
왕도 방향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남문 위에 왕실 깃발이 새로 걸리고 있었다. 흰 천 위에 까만 별 하나. 국왕 직속 경계조사국의 표식이다. 별락 이후 나타나는 모든 땅을 왕실 소유로 선언하는 부서였다.
“저 사람들 오기 전에 지도 원본을 숨겨요.”
“왜요? 그쪽도 지도 필요하잖아요.”
“필요해서가 아니라 없애려고 찾을 거예요.”
미라가 손목에서 은제 고리를 풀었다. 고리 안쪽에는 숫자 셋이 새겨져 있었다. 3, 7, 0.
“이게 뭔지 아세요?”
“저를 놀리는 점수인가요?”
“지형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세 개의 기준점. 항해사들은 그것을 ‘붙박이 별’이라 불러요.”
그녀는 고리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은선이 고리의 숫자 3에 닿자, 내 지도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구멍 아래로 새 지형이 비쳤다. 왕도의 중앙 광장,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키 큰 검은 기둥.
나는 숨을 삼켰다. 아르켄 광장에는 그런 기둥이 없었다. 하지만 지도는 내일의 위치처럼 명확하게 그 기둥을 가리켰다.
미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첫 번째 기준점이 아르켄에 나타나면, 남은 건 여섯 날이에요.”
기둥의 그림자가 지도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멀리 왕도 광장 뒤로 검은 첨탑 하나가 솟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첨탑 꼭대기에는, 왕궁의 깃발이 아니라 처음 보는 검은 별이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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