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조실이 보낸 서류는 고급 종이에 인쇄돼 있었다. 네 귀퉁이는 금빛으로 장식됐고 가운데에는 아주 반듯한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내가 평생 그린 지도는 습기에 약했고, 그래서 이 종이가 조금 부러웠다. 다만 이 종이의 내용까지 부러워할 수는 없었다. 서류 첫 줄에 ‘아르켄 서부 옛 지도실 사용자 승인’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승인한 적 없는 일을 누군가 자꾸 승인했군요.” 나는 말했다.
아셀이 내 앞에 서류를 놓았다. 정박지 전체에서 미확정으로 남은 사람과 항로를 제칠 낮 정오에 영의 귀환처로 합친다는 명령이었다. 문서 아래쪽에는 작은 예외 조항도 있었다. ‘현지 증인이 부족할 경우 중앙의 대체 증인으로 승인 가능.’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증인이 부족하니 증인을 만들어 준다는 뜻인가. 그럴 거면 길도 대신 걸어 주지 그래.
헤론은 종이의 도장을 살폈다. 왕실 천문국 표준 자획과 달랐고, 검인 번호에는 왕도가 이전하기 전의 옛 구역번호가 쓰여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오래된 권한을 재활용한 듯했다. 하지만 위조라고 확정하기 전에 우리는 원본 등록지를 확인해야 했다. 나는 카엔에게 등록 열람을 다시 요청했고 이번에는 아셀과 테온, 베린이 함께 입회했다.
카엔은 처음에는 문을 닫으려 했다. 아셀이 정박지 주민의 생명 안전을 근거로 현장 열람권을 선언하자 그는 마지못해 봉인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에는 원격 발신권한이 등록된 관리인 목록이 있었다. 이름은 사람이 아닌 기관별칭으로 적혀 있었다. 딱 한 칸에만 개인 이름의 첫 글자가 남아 있었다. ‘마슈엘 — 중앙 등록 책임.’
“그 사람을 만나야겠군.” 테온이 말했다.
“먼저 실제 사람인지부터요.” 내가 답했다. “기관 별칭으로 자기 이름을 지울 수 있는 곳이라면 명부에 쓴 이름도 믿기 어렵습니다.”
카엔은 마슈엘이 중앙대조실의 책임자라고 설명했다. 정박지의 예전 관리인이 바뀌고 난 뒤부터 모든 판정을 한곳에서 처리하도록 명령한 사람이라고 했다. 카엔 자신은 명령서를 받아 실행할 뿐이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증언으로 남겼다. 실행한 일이 남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묻는 일은 그다음이었다.
우리는 어제 세나가 나온 배수 통로의 기록을 찾았다. 한쪽 서류에는 ‘귀환 완료’가, 다른 쪽에는 ‘수령 인수’가 남아 있었다. 두 기록은 같은 시각에 찍혀 있었지만 필체는 달랐다. 원본 인계표에는 사람이 실제로 나왔다고 확인한 서명이 없었다. 대신 자동 처리판의 금색 흔적이 있었다. 헤론이 얇은 종이를 덧대 탁본을 떠서 원본을 건드리지 않고 문양을 확인했다.
그 문양에는 작은 숫자 ‘3·7·0’이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이 표식이 여러 항구에서 다르게 사용된 사실을 기억했다. 원래라면 셋의 관측, 일곱의 대기, 영의 대체 귀환 금지를 뜻하는 문맥이 있었다. 그런데 이 판은 영을 ‘대조할 필요 없는 귀환처’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같은 숫자를 완전히 다른 명령으로 바꿔 놓은 셈이었다.
“이 정도면 실수라기엔 정교하군.” 헤론이 말했다.
“정교한 실수도 있죠.” 나는 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판을 갈아 끼웠는지 찾아야 합니다.”
그때 중계탑 밖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노동자가 서류함을 들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 아셀이 앞을 막았다. 노동자들은 중앙의 보관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누가 서류함을 넘겼는지 묻자 카엔의 이름을 댔다. 카엔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자기가 명령한 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책상 아래에는 같은 운송 신청서의 사본이 있었다.
우리는 노동자들을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 대신 서류함의 봉인 번호를 현장에서 확인하고 아셀의 안전 명령으로 보관을 일시 중단했다. 노동자들은 그럴 권한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셀은 구조된 세나를 가리켰다. “오늘 그 아이가 갇혔던 통로의 기록을 빼내면 내일 누가 책임질지 확인할 수 없어요. 여러분도 어떤 서류를 옮겼는지 모른 채 서명하지 마세요.” 노동자 한 사람이 조용히 상자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에게 왜 이 일을 맡았는지 물었다. 그는 빚 때문에 상회에서 고용한 일이라고 했다. 오늘 안에 원본을 중앙대조실로 보내면 보너스가 나온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마르첸과 백동상회를 떠올렸다. 여러 곳에서 원본을 모아 오려는 움직임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노동자가 상회가 사람을 지우려 한다는 계획까지 알고 있었다고 볼 근거는 없었다.
카엔은 결국 일부를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미확정 기록이 너무 많아 항구가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누가 돌아왔는지 매번 확인해야 하니 선박이 밀리고 치료소가 붐볐다. 중앙에서 일괄 처리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자 편해 보였다고 했다. 첫해에는 실제로 숫자가 정리됐다고 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이 출입문에서 막히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멈출 수도 있었잖아요.” 아셀이 말했다.
카엔은 고개를 숙였다. “한 번 완료된 기록은 되돌릴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기계의 규칙이죠. 사람의 규칙은 아니에요.” 테온이 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루메르의 왕자가 어느새 왕관보다 사람의 이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카엔을 곧바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선택할 기회를 남겼다. 내일 자동 명령을 중단하는 일에 협조한다면 자신의 책임까지 모두 기록하겠다고 했다. 그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책임을 면제해 주는 협상은 아니었다.
밤이 가까워지자 미라가 치료소에서 돌아왔다. 세나는 조금 나아졌다고 했다. 그리고 안쪽 통로에서 본 사람의 손목에 붉은 실이 있었지만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미라는 그 말에 오래전 동생의 손목을 떠올렸지만 표정만으로 결론 내리지 않았다.
나는 카엔에게 옛 아르켄 서부 지도실의 인장을 누가 보관했는지 물었다. 카엔은 창고에 같은 문양의 도장 틀이 여러 개 있었고, 중앙에서 보내온 설계에 따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원본 도장을 본 직원은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이 오히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 가게의 간판을 훔쳐 만들었다면 실제 인장 없이도 권한을 흉내 낼 수 있었다는 뜻이니까. 미라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네 가게가 그렇게 대단한 곳이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던 곳이었습니다. 세계를 관리하는 본부로는 최악이죠.” 웃음이 지나간 뒤 아셀은 도장 틀의 제작 명령과 원격 등록 기록을 각각 봉인했다. 누가 속였는지 밝힐 때 필요한 건 간판의 모양뿐 아니라 그 간판을 주문한 사람이었다.
그때 유란의 배에서 연락이 왔다. 정박지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짧은 조수길을 실제로 확인했고, 그곳에서 사람이 탄 낡은 작은 배 하나를 보았다고 했다. 배는 동쪽 아래쪽 수로에서 나왔고 부표 번호를 달지 않았다. 유란은 배에 접근하지 못했다. 물살이 갑자기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가 지나간 시각과 방향은 기록했다.
나는 그 방향을 지도 옆에 화살표로 적었다. 실제로 본 것은 유란이고,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직 정박지의 돌계단까지였다. 둘을 구분해 두지 않으면 우리가 찾는 사람이 있었다는 확신도 없는데 귀환 완료를 선언하는 꼴이 된다. 마지막 별의 그림자가 어디로 갔는지는 여전히 몰랐지만, 지금 정박지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행적이 분명히 남아 있었다.
제18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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