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함은 네모난데, 나는 그 안에서 더 많은 원을 보았다. 봉인을 두른 원, 인장에 찍힌 원, 그리고 이름을 적어야 할 자리를 비워 둔 원. 어째서 이 세계의 중요한 비밀들은 늘 속이 빈 모양으로 남아 있을까.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배가 고프다는 결론을 내렸다. 속이 빈 건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이번에는 누가 뭘 먹었어?” 미라가 물었다.
“아직 아무도 안 먹었습니다.”
“그럼 상자부터 열어.”
로문은 편지함의 봉인을 살폈다. 쇠줄은 오래됐지만 잠금쇠 한쪽에는 최근에 수리한 흔적이 있었다. 사엘은 폭풍 때 물이 들어오면서 잠금쇠가 흔들렸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둘의 설명을 그대로 기록한 뒤 로문과 사엘, 하크가 입회한 자리에서 함을 열었다. 안쪽에는 얇은 동판 네 장과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첫 세 장은 서로 다른 관측점의 그림자를 기록했다. 한 장은 고원의 종 없는 관측대, 한 장은 루메르 북쪽 별의 전당, 나머지 한 장은 사영대의 검은 거울을 가리켰다. 시각이 모두 달랐고, 어떤 장에는 ‘관측 중단’이라는 붉은 선이 있었다. 네 번째 장은 깨끗했다. 이름도 날짜도 없는 판이었다.
“이게 네 번째 관측?” 테온이 물었다.
“아직 관측하지 않은 것을 적는 자리일 수도 있어요.” 내가 대답했다.
헤론은 동판 뒤를 살폈다. 거기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네 번째 기록은 결론을 내는 자리가 아니다. 앞의 세 관측이 서로 다를 때, 그 차이를 보존하는 자리다.’
나는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고원의 영의 자리에도 비슷한 규칙이 있었다. 세 신호가 서로 다르면 일곱 날 동안 대조하고, 끝내 확인되지 않은 항목은 영으로 남겨 두라는 규정. 네 번째 거울은 빈칸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도구였을 것이다.
“누가 이 규칙을 만들었죠?” 미라가 물었다.
로문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오래된 관측자들은 에르안의 질문지를 같이 사용했다고 기억했다. 누군가의 귀환을 확정하지 못하면 그 사실을 빈칸으로 남기는 방식 말이다. 그가 에르안을 직접 만났다고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봉투 안에는 루카스라는 이름이 일부 남아 있었다. 정확한 서명인지, 그가 원안을 인수했다는 문서의 제목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뒷면에 적힌 주소는 또렷했다.
‘역광 군도 — 둘째 사영 보관정.’
나는 그 주소를 앞서 발견한 봉투와 대조했다. 종이의 결이 달랐고 기록 시각도 같지 않았다. 누군가 한 주소를 반복해서 남긴 것이다. 같은 문구가 두 번 나왔다고 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조사할 가치가 있는 곳임은 분명했다.
그날 정오, 우리는 사영대의 작은 마당에서 공개 대조회를 열었다. 로문과 사엘이 참석했고 누안과 라일라는 각자의 관측표를 들고 있었다. 베르트는 수리한 부표의 위치를 설명했다. 표류선에서 구출된 벨과 상선 선장은 자신이 실제로 지나간 수로와 금색 항적표가 가리킨 길이 어떻게 달랐는지 증언했다.
나는 무대 위에 지도 세 장을 올려놓았다. 첫 장은 금색 공식 항적표, 둘째는 수리선과 상선이 실제로 걸린 지점, 셋째는 우리가 직접 확인한 등불 두 개와 부두의 착선 기록이었다. 세 장이 꼭 맞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차이가 나는 부분을 빨간 실로 연결하고 날짜를 적었다.
“이제 어느 지도가 맞습니까?” 누안이 물었다.
“오늘 구조할 때는 우리가 실제로 지나간 길이 가장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내일 조수가 바뀌면 다시 확인해야 해.”
“그럼 영원히 완성할 수 없나요?”
“아마도. 그런데 영원히 틀린 지도보다 나아.”
키오가 내 뒤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지도를 여러 번 그려야 한다는 계산에 절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수리비를 누가 낼지 걱정하고 있었다. 누구든 책임을 나누어야 하는 시대였다.
사엘은 금색 자동 장치를 정식으로 조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장치를 모두 파괴하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로문은 원본을 보존해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자동 완료 회로는 분리하고 수신 기록은 수동으로 남기되, 회로와 인장판 자체는 봉인 보관하기로 했다. 아직 납품과 개조에 관여한 사람들을 특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테온은 공개 대조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 루메르 시절 왕실 인장의 복제 방식을 설명했다. 사영대의 인장은 원본이 아니라 작은 결손이 남은 복제판으로 찍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가 가진 증거는 하나의 가설을 강하게 뒷받침했지만 최종 결론은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미라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지닌 붉은 매듭의 편지를 보여 주었다. 편지를 모든 사람에게 읽히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가족 이야기는 공공 기록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동생이 사용하던 숫자 약자와 사영대의 오래된 항로 장부에 남은 기호를 대조할 수 있도록 일부만 공개했다. 로문은 그 기호가 제삼 항로의 관측 표식과 닮았다고 했다. 그러나 미라의 동생이 살아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조회가 끝날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다 위의 검은 그림자가 다시 길어졌지만 이제 등대는 그 그림자를 통행 허가로 내보내지 않았다. 라일라가 첫째 등불을 켜자 둘째 등불이 실제로 답했다. 세 번째 등불은 꺼진 채로 남겨 두었다. 그것이 고장인지 아직 사람이 확인하지 못한 것인지 이유까지 구분해 적었다.
나는 한쪽에 서서 사영대가 바다를 지키는 방식을 바라봤다. 거대한 별을 멈추지는 못했다. 마지막 별이 떨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적어도 오늘 바다를 건너는 사람은 확인되지 않은 그림자를 길이라고 믿지 않게 됐다.
그날 밤 우리는 사영대에서 마지막으로 네 번째 거울을 조사했다. 금색 투영 회로를 분리하자 거울에는 더 이상 배의 가짜 항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거울 뒤편의 벽에 희미한 흔적이 드러났다. 오래된 바늘이 긁고 지나간 듯한 일곱 개의 선이었다. 선 끝에는 각각 관측 시각과 ‘미확정’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헤론은 그중 하나를 보며 숨을 멈췄다. 관측 시각이 그가 옛 왕실 천문대에서 파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날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별 하나의 기록을 지웠다. 누군가 명령이 내려오기 전에 그 기록을 다른 곳에 남겼다는 뜻일 수 있었다.
“스승님의 표식이야.” 그가 낮게 말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헤론은 평소 잘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스승님이 여기 오셨다는 뜻입니까?”
“아니. 적어도 누군가 스승님의 관측식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지.”
나는 그 말에서 스승의 생존 여부를 읽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은 사람을 살아 있다고 적는 것은, 확인하지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적는 것과 다르지 않게 위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바다의 마지막 수위를 기록했다. 미라는 다음 원정에 필요한 날짜별 조류표를 만들었고 하크는 돛을 손봤다. 베르트는 첫째 등불 부표를 보강해 주겠다고 했고 라일라는 두 번째 등불의 심지 창고를 지키기로 했다. 누안은 할아버지 로문과 함께 사영대의 수동 기록을 배우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기록이 아니라 직접 걸어간 곳이었다.
나는 백마흔 번째 지도를 펼쳤다. 종 없는 고원에서 우리가 내려온 길, 실제로 구조선을 보낸 조수의 방향, 항적표가 틀린 여울, 사영대의 바깥 부두까지의 통로를 표시했다. 검은 물속 등불이 가리킨 길은 지웠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내 지도에는 그 길이 없었다. 지울 대상은 길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했다고 믿게 만든 거짓 승인뿐이었다.
그때 지도통 안쪽에서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마지막 별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길 — 역광 군도 제이 사영 보관정]
나는 그 문장을 보고 바로 선을 긋지 않았다. 이름과 목적지가 있다는 것은 앞으로 가 볼 이유가 생겼다는 뜻이지, 그곳까지 통행 가능한 항로가 생겼다는 뜻은 아니었다. 미라가 은반지를 만지며 웃었다.
“어디로 가는지 이제 알겠네.”
“어떻게 가는지는 아직 모르지만요.”
“그게 항해지.”
나는 아르켄이 원래 자리에서 사라졌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우리는 하나의 안전한 길을 강요하는 대신 사람마다 실제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오늘 사영대에서는 한 가지를 더 배웠다. 세계가 지워진다는 예언의 뜻을 아직 알 수 없지만, 세상을 지우는 일은 누군가의 부재를 확인도 하지 않고 완료라고 적는 곳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
새벽 바다는 거울보다 어두웠다. 그러나 어둠 속에는 우리가 아직 걸어 보지 않은 길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곳을 무서워하면서도 가고 싶었다.
“선장님, 배삯은 역시 두 배인가요?”
미라는 돛을 올리며 대답했다.
“잘 그리면 한 번만 받지.”
“내가 장부에 그렇게 적어도 돼요?” 키오가 끼어들었다.
“아니.”
우리는 웃었다. 처음으로 지도통의 빈칸이 조금 덜 무서웠다. 빈칸은 사라진 세계가 아니라 아직 확인할 수 있는 미래를 남겨 두는 자리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빈칸 너머의 섬들에서, 우리보다 먼저 그 질문을 남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14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